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25화 (25/62)

#025

순간 상상해 버리고 말았다. 햇살이 느른한 늦은 오후, 제가 낳은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동화책을 읽어 주며 웃고 있는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는 아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무거운 눈꺼풀을 이기지 못해 잠이 들락 말락 했고, 그는 아이의 정수리에 입을 맞춘다.

따뜻한 저녁을 해 먹고, 저녁놀이 지는 동네를 산책한 뒤, 집으로 돌아와 아이를 씻기고 재운다.

아이가 깊이 잠든 늦은 밤, 두 사람은 한 침대에 누워 한 이불 안에서 살을 맞대고 사랑을 나누다 잠이 든다.

사랑하는 이의 품에서 행복을 꿈꾸며 잠드는 일로 하루가 마무리되는 평범하고도 마법 같은 일을 떠올리며, 수아는 잠시 정신이 멍해지고 말았다.

“……하지 않을까, 수아야. 응?”

옆에서 시은이 뭐라고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

“네?”

수아는 잠시 몽롱해졌던 정신을 추스르며 시은을 돌아보았다.

“우리가 부엌에 가서 좀 도와 드려야 하지 않을까?”

시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아, 아. 손님이 왜 부엌에 들어갑니까? 이분들 참, 부엌에 가서 우리 애들 엄마 기죽이려고 그러는 건 아니죠? 그냥 여기 편하게들 앉아 계세요. 안사람 어시스턴트는 제가 합니다.”

정 지부장이 두 사람을 한승이 앉아 있는 소파로 떠밀 듯이 몰아넣었다.

“선배, 언제 오셨어요?”

얼굴이 발그레진 시은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원래 말투가 나긋나긋한 시은이었지만, 오늘따라 유독 그 어조가 사근사근하다. 수아는 수줍은 미소를 머금은 시은을 흘끗 보았다.

아, 세상에.

이제껏 막역하게 지냈으면서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시은은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인지, 선배가 아닌 남자를 마주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도 조금 전에 왔어. 앉아.”

그가 소파를 탁탁 치며 대꾸했다. 시은이 종종걸음으로 걸어가 그의 옆에 한 뼘 정도 거리를 두고 앉았다. 수아는 어정쩡하게 시은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소파는 창가부터 시작해 거실 맞은편까지 디귿 자로 이어지고 있었다. 세 사람이 한 섹션을 차지하고 마주 보고 앉아도 될 정도로 넓었다. 그런데 굳이 시은은 그의 곁에 붙어 앉았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지기 시작한다. 그가 시은의 머리 뒤로 수아를 흘끗거렸다. 반가운 미소가 어린 눈짓이었지만, 수아는 덩달아 웃어 줄 수가 없었다.

어쩐지 한숨이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후배들에게 두루 인기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시은조차도 그런 마음을 품고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주위에 여자가 많은, 만인에게 상냥한 남자라……. 고생길이 훤히 보이는 듯하다.

역시 유예 기간을 갖기로 한 것은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리 멋지고, 능력이 좋아도, 마음고생시키는 남자는 사절이다.

저도 모르게 따뜻한 가정을 꿈꿨던 이유가 있다.

아버지는 늘 집안일보다 바깥일에 관심이 더 많았다. 엄마와 수아는 항상 뒷전이었고, 어쩌다 가족이 모이는 날이어도 서먹한 침묵만이 자리하는 분위기가 싫었다.

엄마는 늘 그런 아빠를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아빠의 빈자리를 느낄 때마다 남몰래 붉히던 젖은 눈시울 뒤에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외로움이 자리했다.

유방암 수술을 할 때도, 수술실 앞을 지키고 있었던 사람은 이제 갓 소녀티를 벗은 수아뿐이었다.

물론 수아도 아버지를 마음속 깊이 존경했지만, 아빠 같은 남자와의 결혼은 사절이다. 마음고생시키고, 외롭게 하는 남자는 싫다.

“하아.”

수아는 저도 모르게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 코.”

정 지부장의 딸이 줄줄 흐르는 콧물을 가리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마치 으레 그래 왔던 것처럼 자연스레 아이를 안아 들고는 일어섰다. 그가 성큼성큼 어디론가 걸음을 옮겼다.

멀지 않은 곳에서 물소리가 솨아 들려왔고, 아이에게 흥, 하고 말하는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배는 누구하고나 잘 지내는 것 같아. 어린애도 잘 돌볼 줄은 몰랐네.”

시은이 꿈꾸는 듯한 표정으로 읊조렸다. 시은 역시 수아와 같은 상상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니, 마음 한구석이 뾰족하게 벼려진다.

그와 결혼해서, 그의 아이를 낳고, 그와 함께 한 침대에서 사랑을 나누다 잠이 들고.

그 장면에 다른 여자가 대입되는 게 불쾌하다.

“뭐 애 코 풀어 주는 건데요. 그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불퉁스러운 목소리가 그대로 흘러나오고 말았다. 이제껏 서늘한 얼굴을 유지하며 살아온 게 대견하다 싶을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가슴 한구석에 고여 식을 줄을 몰랐다.

그가 아이를 안고 소파 곁으로 다가왔다.

수아는 뾰족한 눈으로 그를 한 번 흘끗 보고는 이내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얄밉고 야속했다.

손가락 마디만 내려다보고 있는데, 오른쪽 허벅지 옆으로 아이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는 게 시야 끝에 걸린다. 퍼뜩 고개를 들어 보니, 아이의 옆으로 그가 태연하게 앉아서 동화책을 집어 들었다.

“이거 읽을까?”

그의 물음에 아이가 환한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거기 좀 잡아 봐.”

“네?”

수아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다 말고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책 끝을 얼른 집어 들었다. 수아와 그가 집어 든 책 사이에 아이가 자리했다. 심장이 기분 좋은 박자로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는 프랑스 그림 동화책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아이는 몇 번을 보았는지, 등장인물의 대사를 외울 정도였다.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그의 프랑스어 억양을 따라 하는 게 귀여워서 수아는 흐뭇한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이야, 보기 좋네요. 우리 지효가 사람 잘 안 따르는데, 어떻게 두 분 사이에 그렇게 얌전히 앉아 있죠?”

정 지부장의 아내로 보이는 사람이 앞치마에 손을 슥슥 문지르며 다가오고 있었다.

“식사 준비 다 됐어요. 어서 오세요.”

살짝 처진 눈을 곱게 접으며 웃은 정 지부장의 아내는 두 사람 사이에서 아이를 쏙 안아 갔다.

찰나의 순간, 그가 소파 위에 놓인 수아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가 잽싸게 놓아주었다. 갑자기 손끝으로 온몸의 피가 몰린 것처럼 뜨끈뜨끈해졌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태연자약하게 다이닝 룸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아와 시은이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그가 앉았던 소파 자리에도 신경 쓰며 예민하게 얼굴을 굳혔던 수아와 달리 시은은 여전히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차 셰프님은 한국에서 오셨지만, 여기 두 분은 한국 떠나오신 지 오래라고 들었어요. 집밥 그립죠? 내가 솜씨가 그렇게 좋지는 않지만, 많이 들어요.”

소고기뭇국에 잡채, 구운 굴비와 제육볶음, 잘 익은 김장 김치와 깍두기 등 갖은 반찬을 마주하는데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감격한 것은 시은도 마찬가지였다.

“아, 우리 차한승 셰프님이 후배들을 엄청나게 아끼신다고 들었거든요. 사실 이거 후배님들께 드리는 뇌물입니다. 우리 차 셰프님 설득 좀 해 주세요. 다음에 또 오시라고요.”

“이이는. 체하시겠다. 그런 말을 왜 지금 해.”

두 사람이 투덕거리자, 한승이 부드럽게 웃으며 덧붙였다.

“이거 너무 감사해서 제 고민이 깊어질 것 같네요.”

몇 번이고 단발성 이벤트임을 강조하던 한승이 꺼낸 뜻밖의 말에 정 지부장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났다.

“앉으세요, 일단.”

어찌나 행동이 빠른지, 그의 옆자리는 또 시은이 차지했다. 수아는 시은의 옆에 앉으며 자꾸만 집요한 질투심이 발동하려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동안 아무렇지 않았는데, 시은의 존재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하긴 그의 곁에 있는 여자가 한둘일까?

또다시 가슴이 무겁게 침잠한다.

모두에게 친절하게 굴지 말라고 말해 볼까? 너무 예민하게 군다고 생각하려나?

맛있는 집밥이 눈앞에 있는데도 얹힌 것처럼 음식이 잘 넘어가지 않는다.

식사를 마친 뒤, 디저트까지 먹고 나서야 정 지부장의 집을 나섰다. 융숭한 대접에 감사 인사를 몇 번이나 하고 나왔는지 모른다. 마음은 내내 편치 않았지만 말이다.

“선배, 어디로 가세요?”

늘 수아와 귀갓길을 같이했던 시은이 그의 곁에 바짝 붙어 서서 물었다.

“호텔 가서 좀 쉬려고.”

“아…….”

시은이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수아를 돌아보며 조용히 읊조렸다.

“수아야, 너 먼저 갈래? 나 선배한테 할 말 있어서.”

심장이 쑥 미끄러져 내려가는 것만 같았다. 시은은 굳이 수아의 대답을 들을 필요는 없다는 듯이 그를 향해 다시금 물었다.

“선배 잠깐 시간 좀 내주시겠어요?”

두 사람이 시야에서 점점 멀어졌다. 그는 늘 그랬듯 일상적인 친절을 몸에 두른 채 시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야, 이게.”

수아는 홀로 지하철역을 향해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기분이 말도 못 하게 가라앉아 버렸다. 머릿속에는 복잡한 상념들이 둥둥 떠다녔다.

그와의 관계는 분명히 갑작스러웠다. 그래서 수아는 한 발짝 물러나 재고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런데 이 와중에 시은이 그에게 고백이라도 한다면?

저보다는 시은이 그와 훨씬 더 친했을 뿐만 아니라, 서로를 잘 알고 있었다. 두루 친하게 지내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 그가 막역하게 지내는 후배도 시은이 유일하다고 들었다.

수아는 바짝 마른 손으로 얼굴을 한 번 문질렀다. 지금이라도 그에게 전화해서 당장 제 곁으로 오라고 해야 하는지 고민스럽기까지 하다.

충동적으로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 받는다.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가면서 두세 번을 더 걸어 보았지만, 묵묵부답이다.

시작하는 연인에게 부족한 것은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다. 오래도록 쌓아 온 시간의 물리적 경험이 없으니 막연한 불안감이 더 클 시기다.

그의 불응에 불안감이 계속 커져만 갔다. 집에 도착한 수아는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향긋하고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가며 마셨다. 마음이 평온해지기를 바라고 한 행동들이었지만 모두 허사였다.

대체 뭘 하는 거야, 둘이.

심통 맞은 얼굴로 휴대전화를 쏘아보고 있는데, 화면에 반짝 불이 들어오며 수신 화면으로 바뀐다.

“어디예요?”

퉁명한 물음이 그대로 쏟아져 나왔다.

― 너 사는 건물 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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