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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비밀-26화 (26/62)

#026

차갑게 쏟아진 목소리에 하마터면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 뾰족해진 기분 탓이라 여기기엔 그의 어조 역시 지나치게 건조했다.

“내가 사는 건물 앞이요?”

여기까지 오면서 왜 전화를 받지 않았을까. 왜 여기까지 오면서 전화를 하지 않았을까.

시은의 말간 얼굴이 눈앞을 스치고 지난다. 시은을 데려다주고 오는 길일지도 모른다.

수아의 집에서 지하철로 겨우 두 정거장 떨어진 곳에 시은이 살고 있다. 그 짧은 시간이나마 마음을 정리하기 위해 전화를 피한 걸까?

아직 그와 아무런 대화도 나누지 않았는데, 이미 결론이 난 것처럼 가슴속이 침잠했다. 사고능력이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는 듯했다. 시야가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도 바로잡을 수가 없을 만큼 가슴이 갑갑하게 차올랐다.

― 응.

그가 짧게 대꾸하고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내려갈게요. 잠깐만 기다려요.”

택시로 딱 한 번 와 봤을 뿐인데, 다시 묻지도 않고 그가 여기까지 용케 찾아왔다. 시은이 수아가 사는 곳 주소를 알려 줬을지도 모를 일이다.

― 내가 올라가면 안 될까?

그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리 가라앉아 있었다. 깊고 낮은 목소리를 가진 그였지만, 어조에는 항상 분명한 자신감이 묻어났다. 그런데 지금은 나직한 목소리가 불안한 심리를 머금고 있는 듯하다.

그는 왜 불안할까. 정의할 수 없는 감정 앞에 혼란스러워서, 섣불렀던 결정을 번복해야 할 것 같아서, 아니면 미안해서?

수아는 한숨을 집어삼키며 작게 대꾸했다.

“올라와요. 3층 A호 누르면 열어 줄게요.”

이윽고 오래된 전자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터폰에서 문 열림 버튼을 누르는데, 손끝이 속절없이 떨린다.

“하아.”

수아는 심호흡을 연거푸 내뱉었다.

갑작스럽게 끌린 감정이다. 깊어질 새도 없었다. 이대로 털어 내면 그만인 거다.

또다시 크게 숨을 들이마셨을 때, 현관문을 두드리는 정갈한 소리가 들려왔다. 수아는 폐부를 가득 채우고 있는 갑갑한 숨을 내뱉고는, 오래된 나무문을 열어젖혔다.

“어떻게 왔어요?”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서 얼른 돌아섰다. 등 뒤에서 문이 힘겹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늘 문이 말썽이었다. 삐걱 소리를 내며 닫히는 문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경첩을 여러 번 손봤지만, 건물이 오래된 탓에 문틀과 문을 새로 교체하는 게 좋겠다고 공사업자가 말했었다.

이후 집주인에게 문을 고쳐 달라고 요청했지만, 해 준다는 대답만 있었을 뿐 이렇다 할 진척은 아직 없다.

진작 고쳐 줄 것이지.

그동안 불편하지만 무시하고 살았던 문소리마저 신경질적으로 다가온다.

“차 마실래요? 블랙티 괜찮죠? 집에서 커피는 잘 안 마셔서, 커피는 없어요.”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을까? 대답할 만한 말이 이제껏 없었나?

그럼 그가 대답할 만한 질문을 던져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둘이 뭐 했어요? 혹시 시은 언니가 셰프님한테 고백이라도 했어요?”

“어.”

그는 미동도 하지 않고 현관문 앞에 선 채로 대꾸했다. 전기포트 전원을 올리는 수아의 손이 잘게 떨렸다.

수아는 얼른 손을 움켜쥐었다. 그렇다고 저렇게 순순히 대답을 내놓을 줄을 몰랐다.

마치 두 사람이 첫 키스를 나누기 전으로 시간을 되돌려 놓은 듯, 차가운 그의 태도와 망설이지 않고 나온 대답이 가슴을 그어 놓은 듯 쓰라리다.

“블랙티를 내가 어디에다 뒀더라.”

부엌이라고 해 봐야 싱크대 두 칸이 전부였고, 원룸 형태의 방 안은 그가 서 있는 곳에서 훤히 다 보였다. 떨리는 손길을 숨길 곳이 없어서 수아는 두 손을 꽉 맞잡은 채로 벽에 달린 선반 위를 올려다보았다.

마치 선반 위에 놓인 틴케이스 중 하나를 골라내야 한다는 듯이 신중하게 훑어보는데, 시야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심각할 것도 없다고 생각했으면서, 금방 털어 내면 된다고 여겼으면서, 눈가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 눈물 때문에 신경질이 다 나려고 했다.

수아는 눈을 길게 늘이며 가장 왼쪽에 놓인 틴케이스를 집어 들었다. 괜히 콧물이 나는 것처럼 휴지를 뽑아 들고, 입을 열었다.

“며칠 투어 나가느라 청소를 못 했더니, 집에 먼지가 좀 있네요.”

코맹맹이 소리가 먼지에 기인한다는 듯이 읊조리며 팽 소리가 나도록 코를 풀었다. 수전을 돌려 물을 틀고, 손을 깨끗이 씻었다. 차갑게 흐르는 물줄기가 영문 모를 정도로 뜨겁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다독여 주었다.

연보라색 틴케이스에서 평소 아껴 마시던 블랙티 티백을 두 개 꺼냈다. 떫지 않고, 입안을 휘감는 꽃향기가 부드러운 차였다.

떫지 않은 관계로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다. 그때 그런 일이 있었지, 하고 부드럽게 웃을 수 있는 해프닝이었으면.

“시은 언니랑은 알고 지낸 지 오래됐죠? 언니가 참 마음이 따뜻해요. 다정하고.”

제 선에서 먼저 말을 꺼내는 편이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선배를 더 잘 아는 사람이고. 또 언니는 요리만 배운 게 아니라, 비즈니스 과정도 했고…….”

목소리가 살짝 잠기려고 해서 수아는 잠시 호흡을 골랐다.

“아마 셰프님 일 잘 도울 수 있는 사람일 거예요.”

“그러게.”

등 뒤에서 들려온 대답에 수아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현관문 앞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가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도움이 될 것 같아. 지금도 도움 많이 받고 있고.”

그는 거리낄 게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머그컵에 티백을 넣고 뜨거운 물을 졸졸 따랐다.

“여기 누구 데려와서 대접한 적이 없어서……. 잔도 이런 것밖에 없어요.”

쓸데없는 말이라도 해서 목을 꽉 메우려는 물기를 잠재워야 했다. 그에게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머그컵을 내밀었다.

그는 수아가 건넨 머그컵을 받아 들고 향을 음미하듯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향 좋네.”

그가 서늘하게 내뱉은 말에 가슴이 기묘하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쵸? 저도 이 향기 좋아해요. 이것도 시은 언니가.”

수아는 애써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길게 팔을 뻗어 머그컵을 싱크대 위에 올려 두는 그에게서 가을 내음이 물씬 풍겼다. 그리고 가을바람에 차게 식은 커다란 손이 수아의 얼굴을 감쌌다.

순식간에 부드러운 꽃향기를 품은 입술이 수아의 입술 위로 내려앉았다. 저지할 틈도 없이 그가 입안을 차지하고 들어왔다. 뾰족하게 세운 혀로 입안 점막을 자극하고, 차향을 머금은 타액을 그가 고스란히 받아 마셨다.

신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아서, 수아는 가까스로 얼굴을 떼어 냈다.

“지금, 뭐 하는…….”

마음을 깊이 나누지 않았는데도, 이런 키스를 나눌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단지 입술을 뒤섞었을 뿐인데,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오만 가지 감정을 전부 경험한 기분이다.

“너는 지금 뭐 하는데? 내 얼굴도 안 보고.”

그가 양손으로 수아의 얼굴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고집스럽게 그의 눈을 피하며 대꾸했다.

“시은 언니가 고백했다면서요.”

“근데?”

할 말이 없어졌는데, 감정은 고집스레 터져 나와서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하아, 나 참.”

그가 어이없다는 듯이 웃음을 터뜨렸다. 눈물이 흘러내린 뺨을 따라 그의 입술이 내려앉는다. 젖은 자국을 지워 내듯 그의 입술이 촘촘하게 닿았다가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의 입술이 턱 선을 타고 내려가 목 안쪽 깊숙한 곳에 닿았을 때, 더운 숨이 터져 나왔다.

“질투 좀 하려나 했더니.”

그가 새하얀 목덜미를 살짝 깨물고는 달래듯 혀로 길게 핥았다.

“아예 밀어낼 생각을 해?”

그의 입술이 다시금 목선을 타고 오르기 시작했다. 짙어진 눈빛으로 내려다보며 그가 읊조렸다.

“마음 아프게, 울긴 왜 울어.”

수아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다.

“그래, 그렇게 노려보면서 나한테 따졌어야지. 내 앞에서 왜 다른 여자랑 단둘이 사라지냐고.”

“내 앞에서 왜 다른 여자랑 단둘이 사라졌어요?”

그가 잠시 기가 막힌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미소를 머금는다.

“매도 빨리 맞는 게 낫다고, 얼른 해치워야 할 것 같아서?”

“시은 선배가 셰프님 좋아하는 거 알았어요?”

“별로 신경 안 써서 몰랐지.”

“그럼, 왜 이제 와서 신경이 쓰인 건데요? 피할 수도 있었잖아요. 왜 하필 내 앞에서 그렇게 둘이 가요?”

말을 하면 할수록 화가 나는 것만 같았다. 생전 경험해 보지 못한 복합적인 감정이 들쑥날쑥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다.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도 모를 만큼 감정이 앞선다. 감정이 제멋대로 굴어서 통제가 되질 않는다.

“너 때문에. 너는 유예 기간이니 뭐니 하면서 재고 있는데, 중간에 누가 끼어들어 봐. 만난 시간이 너무 짧아서 날 못 믿겠다는 여잔데, 누가 끼어들면 홀랑 도망갈지 어떻게 알아?”

씩씩거리던 어깻숨이 조금씩 잦아들기 시작했다.

“좋아했대. 좋아한대, 지금도. 그런데 나는 아니라고 했어. 나는 따로 마음에 둔 사람이 있으니까, 그러지 말라고 했고. 걔도 알겠대. 그럴 것 같아서, 자기한테 마지막 기회인 것 같아서 고백해 본 거래. 말도 못 해 보고 마음 접으면 너무 서러울 것 같아서 그랬대.”

“그래서.”

만인에게 친절한 그의 성정이 이럴 때 마음에 덜컥 걸린다.

“위로해 줬어요?”

“너 나를 너무 띄엄띄엄 보는 것 같은데, 내가 내 여자 두고 다른 여자 위로해 줄 만큼 모자란 놈은 아니거든?”

인상을 구기며 나무라는 그를 수아는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럼, 왜.”

수아는 숨을 한 번 골랐다. 굳이 이것까지 물어봐야 하나 싶었지만, 말이 나왔으니 속 시원히 다 하는 게 좋았다.

“내 앞에서 그러고 둘이 사라질 필요까지는 없었잖아요. 이번에는 거절하고 따로 만나도 되잖아요. 왜 그렇게 보란 듯이. 사람 불안하게.”

“사람 불안하라고.”

“뭐요?”

수아가 ‘이씨.’ 하고 덧붙이며 그를 쏘아보았다.

“지금 감정적으로 내가 완전한 을이니까. 한 번쯤 네가 질투해 주는 걸 보고 싶어서.”

“하!”

수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중간이 없는 꽉 막힌 성격인 줄은 몰랐지. 이럴 때는 나를 어떻게 굴릴까 고민해야지. 난 네가 좀 삐쳐 있으면 어떻게 풀어 줘야 하나 고민하면서 왔는데.”

“감정적 을이요? 평생 을의 입장에는 서 본 적도 없죠? 을이 뭐야, 을이. 갑을병정 순서를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니죠? 세상에. 셰프님 주변에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알아요? 전부 눈에 불을 켜고 셰프님만 본다고요. 오늘도 그래. 여행객들이 셰프님한테 매달려서 와인 한잔하자는 둥, 애프터눈 티를 먹으러 가자는 둥.”

끝내 수아는 그를 노려보며 물었다.

“그래서 어떻게 풀어 줄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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