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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한 비밀-27화 (27/62)

#027

누군가를 좋아하는 감정은 사람을 참 우습게 만들기도 한다. 정리되지 않은 생각을 이리저리 재 보지 않고 단번에 내뱉을 수 있음에 스스로가 놀라울 정도다. 수아는 새삼스러운 기분이 되어 그를 올려다보았다.

왜 자신에게만 감정적으로 구냐며 따져 물었던 말이 무색할 만큼, 지금 수아는 그에게 감정적으로 구는 중이다.

수아는 제가 내뱉었던 말 때문에 위축되려는 어깨를 펴고, 일부러 턱을 더 치켜들었다.

그리고 그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그의 감정이 일면 이해 가기 시작했다.

무섭게 밀어닥치는 감정을 어쩔 줄 몰랐던 거다. 이성적 사고를 마비시키고, 전에 느끼지 못했던 생경한 감정이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먹게 하고, 전신을 지배하려 들어서 감정이라도 폭발시키지 않으면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도수아, 너도 나한테 그래?」

디너 크루즈 출입 통제 구역에서 그가 물었던 말이 새삼 귓가를 맴돌기 시작한다. 그는 그때 폭발시킨 감정을, 수아는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고 있는 기분이다.

그에게 끌린 것은 사실이다. 이 사람과 애정을 나누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막연한 상상에 얼굴을 붉히기도 했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불안했다. 그가 내뱉는 모든 감정이 과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그를 이토록 간절하게 만들고, 저돌적으로 움직이게 했는지 의문이었다.

질투하기를 바랐다는 남자의 얼굴을 마주하며 갑갑한 속을 두서없이 터뜨린 순간, 희미하게 성에가 껴 있던 유리창이 투명하게 변하는 것처럼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던 감정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감정에 휩쓸려 가슴이 쓰라릴 만큼, 이 남자에게 빠지고 말았다.

그의 커다란 손이 수아의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손가락 끝이 섬세하게 귓바퀴를 매만졌고, 옴폭 파인 손바닥이 매끄러운 살결을 빈틈이 감쌌다.

그가 천천히 고개를 내리며 다가왔다. 수아는 눈을 가라뜨며 그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눈이 감기려는 찰나 입술이 닿았다. 이제껏 앞뒤 생각하지 않고 덤벼 오듯 입술을 집어삼키던 키스와는 사뭇 달랐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부드러운 생크림을 머금듯 수아의 입술을 살짝 물었다. 탱글탱글한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접촉이었다.

입술이 가벼운 듯 가볍지 않게 달라붙었다가 떨어지자 촉촉한 마찰음이 생생히 울렸다.

흐음, 저도 모르게 슬쩍 벌어진 잇새로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오른손으로는 매끄러운 뺨을 감싼 채, 왼팔로 등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는 그의 품은 단단하면서도 포근했다.

그의 진회색 트러커 재킷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얇은 아이보리색 니트를 사이에 두고 단단한 근육의 부산한 움직임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수아는 그의 허리께 니트 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을 슬쩍 풀어서 단단한 가슴팍 위에 올렸다. 손바닥에 닿는 둥그스름하면서 단단한 질감에서 따끔한 전기가 오르는 듯한 착각이 인다.

니트 자락에 닿은 손바닥이 간질간질해서 저도 모르게 꽉 움켜잡았다. 그가 낮게 신음하며 입술을 잠시 떼어 냈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데워진 숨결이 뒤섞였다. 떼어 낸 모양 그대로 굳어 있던 그의 외설적인 입술이 뺨을 타고 비스듬히 오르는가 싶더니 매혹적인 미소가 그려진다.

“수아야.”

낮게 가라앉은 탁성, 열기를 이겨 내지 못한 목소리는 재를 뒤집어쓴 것처럼 어두웠다.

“응?”

신음인 듯, 대답인 듯 달궈진 대꾸가 흘러나왔다.

“풀어 달라며? 더 자극하면 곤란한데.”

그가 제 가슴 위에 놓인 작은 손을 끌어다 수아의 등 뒤로 모아 쥐었다. 팔이 뒤로 젖혀지며 자연스레 동그란 가슴이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더운 숨을 색색 내쉴 때마다 색스러운 선을 그리며 가슴선이 들썩였다.

검게 젖은 그의 시선이 수아의 쇄골 아래로 향했다가 천천히 다시 위로 올라왔다. 수아는 그에게 손을 결박당한 채로 올려다보았다.

“풀어 준다며, 다시 묶는 심보는 뭔데요?”

목소리인지 숨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물음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안 하면.”

그가 혀를 내밀어 수아의 입술을 천천히 핥으며 읊조렸다.

“네 기분 풀어 주기 전에, 정신 나가게 만들어 버릴 것 같아서.”

간지러운 감각에 애가 타서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그의 입술을 머금으려 목을 길게 빼자, 그가 입을 크게 벌리며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쭉 빨아들였다. 손을 놓아줄 생각은 없는지, 그는 수아의 두 손을 꽉 움켜잡은 채 다른 팔로는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그를 만질 수도, 그에게 매달릴 수도 없는 상태. 열기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치솟았다.

입안 가득 그의 혀가 들어찼다. 거칠게 밀고 들어오면서도 그는 온화하게 입안을 점령했다. 수아가 응, 하고 신음을 흘리면, 그는 닿았던 곳을 또다시 핥고 빨며 자극했다.

어디에 닿으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섬세하게 알아가겠다는 듯이, 그는 느긋하면서도 집요한 열기로 숨을 옥죄였다.

고개를 비틀어 숨 쉴 틈을 만들 수도 없었다. 두 손을 쓸 수 없으니 그의 어깨를 지지대 삼아 몸을 트는 것도 불가능했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드문드문 코로 내뱉는 더운 숨결은 달아오른 온도를 발산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수아는 발을 들어 그의 종아리를 발등으로 긁어내렸다.

“흐음.”

그의 목울대에서 경고조의 신음이 울렸지만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발등에 닿는 그의 단단한 다리는 지나치게 유혹적이었다.

조금 더 닿고 싶고, 의지하고 싶은 굳건함이 느껴져서 수아는 그의 다리에 제 다리를 휘감으며 가차 없이 밀어붙였다.

단단한 가슴에 말캉한 가슴이 닿아 이지러질 듯했다. 가슴이 깊게 팽창하며 들썩거렸다. 발이 허공에 붕 떠올랐다. 그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며 결박된 손이 자연스럽게 풀어졌다.

수아는 또 붙잡힐세라 얼른 팔을 들어 올려 그의 목을 휘감아 안았다. 입술이 가까스로 떨어졌다.

“역시 도수아는 중간을 몰라.”

등 뒤에 푹신한 매트리스가 닿았다. 그가 쇄골 근처를 아프지 않게 깨물며 읊조렸다.

“내가, 얌전히, 풀어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의 입술이 옮겨 갈 때마다 숨이 토막토막 끊겼다. 그가 목덜미를 따라 입술을 찍으며 올라오더니, 두 팔로 머리 옆을 짚으며 내려다본다.

“아니.”

그는 짧은 대답을 내놓고는 지그시 바라보기만 했다.

“그럼?”

“키스하고 덤벼들면, 내 어깨를 찰싹 때리면서 정신 차리라고 새침하게 굴 줄 알았지.”

수아는 눈을 뾰족하게 만들고 그를 노려보았다. 놀렸다가, 풀어 준 댔다가, 또 놀렸다가.

“얄미워.”

“어떡할까? 이성적인 도수아는 지금 설명이 필요해, 아니면……?”

그의 눈빛과 미소는 다분히 유혹적이었다.

“그 중간이요.”

“중간이 어딘데?”

“글쎄요.”

“중간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넌 사람 미치게 하는 지점은 정확히 안다는 거야.”

뭐라 대꾸할 틈을 주지 않고 그가 입안을 파고들었다. 혀가 뒤엉키고, 타액이 뒤섞였다.

잘록한 허리를 쓸어 올린 손이 그대로 가슴 위로 올라왔다. 말랑말랑한 가슴을 움켜쥐는 손길은 부드럽고 섬세했다. 얇은 브래지어 아래로 빳빳하게 선 유두가 천에 쓸려 따끔거렸다.

“흐응.”

평소 내뱉는 목소리보다 훨씬 톤이 높은 앓는 소리가 속절없이 새어 나왔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기 시작했다. 티셔츠 자락이 불쑥 위로 들렸고, 브래지어 컵이 올라간 것도 순식간이었다.

“아흣.”

딱딱하게 선 가슴 끝을 그가 부드럽게 빨아 물었다. 혀로 좁게 팬 끝을 파고들 듯 쑤셨다가, 쭉 빨아들이자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되고 눈앞은 캄캄해졌다.

“흐읏, 그만.”

그는 커다란 손으로 가슴 밑동부터 밀어 올리며 통통하게 차오른 가슴을 가차 없이 집어삼키고 있었다.

수아는 손을 뻗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흐으, 셰프흐님. 그, 그만.”

도리질을 치며 몸을 뒤틀자 그의 입술이 가슴께에서 가까스로 떨어져 나갔다. 그의 타액으로 젖은 가슴 끝을 찬 공기가 날카롭게 스치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그가 수아의 앙가슴에 옆머리를 기댄 채로 숨을 골랐다. 그의 숨결이 가슴에 닿았다가 멀어지는 감촉이 간질간질했다.

“너 때문에 셰프님이 세상에서 제일 야한 단어가 된 것 같아.”

그의 어조에서 웃음기가 배어났다. 수아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 넘겼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나가는 머리카락의 감촉이 기가 막히게 좋다.

“이제 얘기 좀 해요.”

“응?”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려 가슴 사이에 턱을 댄 채로 수아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얘기?”

무슨 얘기를 하려고 했더라.

그가 밀어붙이는 통에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머릿속에 담겨 있던 생각과 가슴에 담겨 있던 감정이 통째로 날아가 버린 기분이다. 수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키스하기 전에 무슨 상황이었더라?

가까스로 시은을 떠올린 수아는 지금에 와서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했지만, 야릇한 분위기에 휩쓸려 타이밍을 놓치면 나중에 더 큰 오해가 생길지도 모르니 이야기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앞으로 이런 식으로 사람 놀리는 짓은 하지 마요.”

“앞으로 그런 식으로 사람 오해하는 짓도 하지 마. 내가 금세 누구한테 빠졌다가, 금세 다시 빠져나와서 딴 여자 뒤꽁무니 따라갈 놈으로 보였어?”

그가 기분 나쁘다는 투로 대꾸하며 몸을 일으켜 수아의 옆에 누웠다. 커다란 손이 목 아래를 파고든다.

“아, 왜…….”

“이렇게 하려고.”

수아의 목 아래로 팔을 집어넣은 그가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바로 누운 그의 가슴 위에 수아의 몸 절반이 겹쳤다. 손이 닿은 곳에는 그의 심장이 기분 좋은 박자로 뛰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 그런 식으로 놀리는 짓 안 해. 한 번만 더 했다가는 도수아가 날 아예 없는 사람 취급 할 것 같아서, 안 할래.”

그는 항상 의외성을 드러내는 인물이다. 차갑게 생긴 외모와 달리 상냥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만인에게 상냥한 것과 달리 수아에게는 날을 세웠고, 그러다 이제는 순한 강아지처럼 굴고 있다.

“이제 얘기 끝?”

어깨를 끌어안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이 수아의 턱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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