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9
휴대전화 너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는 잠기운이 가득했다. 시은은 잠시 송화구에서 입을 떼어낸 뒤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디까지 갈래, 기시은?
남이 안 되기를 바랐던 적은 이제껏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관계가 어그러지자, 마음에 모가 나기 시작했다. 이루지 못한 관계를 다른 이가 대신 꿰차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제 손으로 직접 오물을 뒤집어쓰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간절했지만, 그렇다고 앞뒤 가리지 않고 지금껏 쌓아 온 관계를 모조리 걸고 치졸한 짓을 벌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 중요한 얘기 아니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세현이 가수면 상태인 듯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세현은 나쁜 쪽으로만 눈치가 빠르고, 말 옮기기 좋아하고, 일자리가 간절한 데다가, 수아에게 고백했던 전적이 있었다.
시은이 체스판의 말로 쓰기에 적절한 인물이었다.
감히 시은이 그들이 관계를 부술 혐오스러운 목적으로 세현에게 다가갔을 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할 것이다.
“내가 몸이 좀 안 좋아서 부탁 하나 하려고.”
― 아, 뭔데. 네 몸이 안 좋은데, 뭘 부탁해.
세현은 귀찮다는 듯이 신경질을 냈다. 좋지 않은 부류였지만, 세현과 어울린 데는 이유가 있었다.
인맥은 언젠가 써먹을 일이 있다. 어릴 때부터 관계지향적인 성격을 지녔던 덕에 시은은 곁에 사람을 두고, 그 관계를 적절히 불러내는 것에 감이 좋았다.
“너 그때 한승 선배랑 같이 일하고 싶다고 했지.”
― 그랬지. 근데 안 된다고 네가 길길이 날뛰었잖아.
야속하다는 듯이 세현은 불퉁스럽게 대꾸했다. 시은은 저도 모르게 조소하고 말았다. 능력은 없으면서, 그럴듯한 허울을 얻고 싶어 하는 세현의 간지러운 구석을 긁어 줘야겠다.
“미안해. 수아가 워낙 상황이 안 좋아서, 너한테 부탁할 수가 없었어. 그 팀 지금 보르도 가는데, 내가 몸이 안 좋아서 따라갈 수가 없어. 갑작스럽게 정말 미안한데, 네가 나 대신 가 줄 수…….”
― 기시은? 너 어디 아파? 어디가 아픈데? 병원은 다녀왔어?
세현의 목소리가 대번에 튀어 오른다. 아까는 몸이 안 좋다는 말에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놈이, 지금은 평소보다 한 톤은 높은 목소리를 내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어, 가벼운 식중독이라는데. 쉬어야 할 것 같아서. 갈 수 있어?”
― 나야, 뭐. 알잖아. 네가 소개해 준 일이면 끝까지 잘하는 거.
하마터면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시은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 보르도로 언제 가면 되는데, 오늘?
“어, 오늘. 내가 널 잘 알지. 그래서 너한테 부탁하는 거잖아. 보르도 갔다가, 거기서 비행기 타고 니스로 이동했다가, 디죵까지 간다고 들었어. 너한테도 좋은 경험일 거야. 그리고 세현아. 부탁이 하나 더 있는데.”
― 응.
세현은 입속의 혀라도 된 것처럼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수아가 요즘 많이 힘들어. 어머니 건강이 좀 그런가 봐. 네가 가서 위로 좀 해 줘. 한승 선배 성격 알잖아. 친절한 척하면서 은근히 무심한 거.”
서운한 감정이 숨길 새도 없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 야, 말이 나와서 말인데. 차한승 그 새끼 진짜 재수 없지 않냐? 아니 지가 한국에서 레스토랑 몇 개 한다고 뻐기는데, 너무 꼴 뵈기 싫어.
“네가 이해해. 워낙 있는 집 아들이잖아.”
― 차한승이?
소문으로만 들었고, 확인도 되지 않은 이야기인데도 속절없이 흘러나왔다.
“어, 뭐. 태민 선배한테 언뜻 들었는데…… 레스토랑 자수성가한 것도 아니라고, 어디 그룹 첫째 아들인데, 워낙 험하게 놀아서 밖으로 떠밀린 거란 말도 있고.”
어설프게 들은 말은 어느 그룹의 자식이고, 해당 그룹에서는 자녀들의 진로 선택을 강요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한승을 비롯한 형제들은 집안에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받으며 각자의 분야에서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그룹 차원에서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자녀들의 개인 정보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관리하고 있는 것 같다고도 했다.
잘 모르는 세계에 관한 이야기였기에, 어느 집안인지도 제대로 알아볼 기회가 없었다. 감히 직접 물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베일에 싸인 그들만의 주류 사회에 대한 동경을 은근히 키워 왔었다.
― 와, 진짜 세상 불공평하다니까? 와. 내가 그럴 줄 알았어. 그 나이에 레스토랑 다섯 개 거느린 그랜드 셰프가 말이 되냐? 안 그래?
“그러게. 좀 불공평하지.”
불공평하다. 그 마음은 제 것이었어야만 했다. 그를 오래도록 바라본 사람의 것이 되었어야 마땅했다. 얼굴을 마주한 지 겨우 열흘밖에 되지 않은 수아에게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네가 좀 가 주라. 그럴 수 있지?”
― 걱정하지 마. 내가 알아서 잘할게. 수아 또 아무 말도 못 하고, 다 참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그게 걱정이네.
역시나 세현은 수아를 향한 마음도 접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래, 네가 가서 수아도 좀 도와주고. 내가 나 대신 너 간다고 이야기해 놓을게. 일정표랑 보르도 어디로 가야 할지는 이메일로 보내 줄게.”
통화를 마친 시은은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로 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 언니, 괜찮아요?
수아의 목소리에는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어, 괜찮아. 내가 어지러워서 오래 통화 못 해. 나 대신 어시스트 할 수 있는 사람 한 명 보낸다고 선배한테 좀 전해 줘.”
― 언니 몸은 괜찮은 거예요? 무리해서 누구 안 보내셔도 돼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둘이 딱 달라붙어서 시시덕거리는 꼴을 볼 수는 없지.
“아냐. 사람 금방 구할 수 있을 거야. 그럼 수고해.”
이 정도로 수아의 목소리가 듣기 싫어질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전화를 끊은 시은은 이불을 폭 뒤집어쓰며 누웠다.
자괴감과 죄책감이 묘하게 피어올랐지만, 순간일 뿐이다.
* * *
“죽 늘어선 포도나무 끝에 보면 종류가 다른 나무가 한 그루 심겨 있습니다.”
파리에서는 얇은 니트 위에 트렌치코트를 걸쳐야 할 정도로 서늘했는데, 보르도는 얇은 셔츠 하나를 입어도 될 만큼 따뜻했다. 따사로운 태양 볕 아래 선 그는 흰색 드레스 셔츠에 검은색 슬랙스 차림이었다.
기본적인 옷차림인데도 그에게선 잘 숙성된 와인 같은 깊은 분위기가 풍겼다. 탄탄한 상체를 휘감은 드레스셔츠가 알맞게 달라붙어서 그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의 움직임이 손에 잡힐 듯 생생했다.
그는 포도밭 한가운데 서서 종이 다른 나무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장미나무인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선선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실려 듣기 좋은 멜로디처럼 울려 퍼졌다.
“포도나무 곁에 장미나무를 심어 놓은 이유에 관한 가설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장미는 환경에 예민한 식물입니다. 장미가 병들면, 테루아(포도밭을 구성하는 환경, 토양, 기후, 일조량 등)에 문제가 발생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는 게 첫 번째 가설입니다. 그래서 포도밭을 관리하는 사람들은 장미가 병들었는지, 아닌지를 예민하게 살핀다고 합니다.”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쏠려 있었다. 여행객보다 뒤에 서 있는 수아의 눈과 귀도 마찬가지였다. 포도밭이 끝없이 펼쳐진 곳에서 내리쬐는 햇살을 고스란히 받으며 서 있는 그의 모습은 그림 같았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장미와 포도는 종이 다른데, 병충해가 동일하게 작용할 리 없다고 주장합니다. 때문에 초록색이 일색인 공간에 심미적 만족감을 충족하기 위해 붉은 장미를 심었다는 속설도 있습니다. 프랑스는 식료품점에서 채소를 진열할 때도 심미적인 관점을 고려하는 나라인 거, 지난 시간에 말씀드렸었죠?”
햇살이 부서지는 것처럼 따뜻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피어났다.
“자, 이제 양조장 건물 안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수아는 재빨리 그의 곁으로 다가섰다. 손에 들고 있던 물병을 건네자, 그가 빙긋이 웃으며 받아 들었다.
“시은이는 연락 있었어? 누구 보낸다며.”
“아직 연락 없었어요. 구하기 쉽지 않을 거예요. 다들 일정이 차 있을 텐데, 갑자기 2주 이상 시간 낼 수 있는 사람을 찾기가…….”
“크게 신경 쓸 일 없게 할게. 정 지부장한테 이야기도 해 놨고.”
“걱정 마세요. 시은 언니 없어도, 셰프님 어시스턴트는 확실히 할 수 있어요.”
그가 커다란 손으로 수아의 등을 가볍게 다독였다. 잠시 손길이 닿았을 뿐인데, 금세 열기가 고여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저는 시음장 먼저 가서 거기 체크하고 있을 거예요. 여기.”
수아가 그를 향해 물병을 하나 더 내밀었다.
“지하 보관실에 은근히 먼지가 많아요. 물 자주 드세요.”
꾸벅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옮기는데, 등 뒤에서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수아 씨.”
며칠은 들어 보지 못한 싸늘한 부름에 수아는 천천히 돌아섰다. 그가 수아의 앞으로 한걸음에 다가왔다.
“예뻐 죽겠네, 어쩌려고 이래?”
수아는 누가 볼세라 주위를 얼른 두리번거리고는, 그를 잽싸게 돌려 세워 등을 떠밀었다.
“이러려고 그래요. 어서 들어가요. 다들 셰프님 기다려요.”
“알았다.”
그의 목소리에서 웃음기가 가득 배어났다. 기분 좋은 울림이 있는 목소리가 포도 향기에 실려 아찔할 정도다.
그가 양조장 건물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한 수아는 방문자 센터에 붙어 있는 방문객 전용 시음장으로 향했다. 네 개의 테이블 위에 각각 와인이 세 병씩 놓여 있었다.
여행객들은 샤토에서 생산되는 가장 저렴하고 대중적인 와인부터 시작해, 특별한 향이 첨가된 가향 와인 그리고 고가에 고품질을 자랑하는 샤토 시그니처 와인까지 맛보게 된다.
한 테이블당 다섯 명 씩, 한 사람당 와인 잔 세 개가 놓여 있어야 했고, 스피툰(spitton: 시음한 와인이나 입을 헹군 물을 뱉는 그릇), 생수를 마실 수 있는 잔도 따로 필요했다.
마지막 테이블에 놓인 잔의 개수를 확인하려 걸음을 옮기는데, 시음장 문이 빠끔히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양조장 건물로 향했던 인원이 도착하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샤토 관계자가 업무 진행을 위해 방문한 거라 예상했다.
“도수아, 여기 있었네.”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들려와서, 수아는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이야, 여기 되게 좋다? 그랑크뤼 1등급 먹을 만하네? 와인은 어때? 맛 좀 봤어?”
시은이 보내겠다고 했던 어시스턴트가 세현이었나 보다.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수아는 굽혔던 상체를 일으켜 세우며 세현이 걸어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어? 시은이한테 연락 못 받았어? 나한테 가 보라고 하던데.”
저도 모르게 입 안쪽 살을 짓씹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