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30화 (30/62)

#030

급하게 대체자를 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주 이상 자리를 비울 수 있으면서 셰프를 어시스트할 수 있는 사람. 수아도 세현밖에는 떠오르는 인물이 없었다.

“근데 다들 어디 갔어? 왜 너만 여기 혼자 덩그러니 있어?”

안쓰러워 죽겠다는 듯이 염려 가득한 얼굴을 한 세현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시음장 상황 체크하느라고 그랬어요. 투어 팀은 지금 양조 과정 설명 듣고 있고요.”

“아.”

세현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수아를 똑바로 응시했다. 평소 타인과 뒤섞일 때는 볼 수 없는 눈빛을 희번덕거리며 세현은 기분 나쁘게 웃었다.

“앞으로 2주간 잘해 보자. 이렇게 둘이 있을 시간도 있고, 좋다.”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수아는 초조한 마음으로 시간을 체크하며, 세현에게서 멀어지려 천천히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직 투어 팀이 도착하려면 30분이나 남아 있었다. 세현과 둘이 시간을 보내기엔 지나치게 긴 시간이다.

둘만 있을 때, 세현의 눈빛에는 광기가 흘렀다. 언젠가 아버지를 협박했던 남자의 섬뜩한 눈동자와 닮아 있었다.

재심 전문 변호사였던 아버지의 활약으로 진범이 밝혀지고, 공소 시효를 한 달 앞두고 15년 형을 받아 복역했던 살인자. 모범수로 7년 만에 형기를 마치고 세상에 나온 그는 제일 먼저 아버지를 찾아왔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잘 살겠다고, 그러니 도와 달라고 아버지를 붙들고 애원도 했었다. 그날 공교롭게도 아버지 사무실을 찾았던 수아가 그와 마주쳤다.

끝내 아버지에게 물심양면으로 돕겠다는 약속을 받아 내고, 자리를 뜨던 그는 복도에 서 있는 수아를 보고 음흉한 눈빛을 빛냈다.

「진하랑 닮았네.」

성인이 되고 한참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진하라는 이름은 그놈이 강간하고 살해한 여고생의 것이었다.

끝을 모르고 나쁜 짓에 나쁜 짓을 얹을 수 있는 눈빛. 사람을 범하고 해하는 것에 거리낄 게 없고, 강자 앞에서는 약하고, 약자 앞에서는 한없이 강해지는 비겁한 포식자의 눈빛을 한 족속들.

그들의 눈동자는 영혼이 없는 듯 텅 비어 있었고, 악마에게 홀린 것처럼 섬뜩했다.

마주한 시선은, 거절을 거절로 알아듣지 못하고 피해망상에 젖은 눈빛은 그들의 세계 안에 속한 사람처럼 보였다.

“차한승이 나 없는 동안 괴롭힌 일은 없고?”

“셰프님이랑 마주할 일도 별로 없는걸요.”

“그 새끼, 저 잘났다고 뻐기지? 하여튼 세상 혼자 잘났어요.”

세현은 한승에 대한 적의를 여과 없이 드러냈다. 여기서 한승의 역성을 들었다가는 세현의 기분을 거스를 게 뻔했다. 언제 어느 포인트에서 화를 내고, 덤벼들지 몰라서 숨이 훅훅 차올랐다.

이런 부류의 인간들과는 상종하지 않는 게 상책이다. 차라리 아무도 보내지 말지. 세현을 보낸 시은이 야속하기까지 했다.

“그 새끼가 너한테 혹시 집적거리거나 하면, 바로 말해. 알았지? 반반한 얼굴로 헤실거리면서 여자깨나 후리고 다녔을 거야. 여자들이 그런 놈이면 또 환장하잖아, 안 그래?”

세현이 했다던 말이 문득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네가 여자 있는 남자 후려서, 갖고 놀다가 차 버렸다고. 그 남자는 한국 가서 원래 있던 여자 친구랑 결혼했다고. 너 때문에 그 남자는 신세 망칠 뻔했다고.」

좋아한다고 다가오면서, 타인의 시선이 있을 때는 감히 나서지도 못한다. 그것도 모자라 안 좋은 소문을 퍼뜨리기까지…….

세현에게서 위험하고 비뚤어진 소유욕이 기분 나쁘게 넘실거렸다.

여고생을 죽인 놈에게 왜 죽였는지 그 이유를 물었을 때, 그놈은 보통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내놓았다.

갖고 싶어서. 죽여서라도 갖고 싶어서.

세현은 저만이 아는 세계에서 수아를 독점하려고 들었다. 다른 이들이 수아를 배척하기를 바라고 험한 소문을 떠들어 댔다.

세현의 좋지 않은 행실 탓에 그의 말을 믿는 이들은 많지 않았지만, 이렇게 단둘이 있을 때가 문제였다.

자극하면 더 날뛸 것이다. 그동안 가까스로 피해 왔는데, 이렇게 맞닥뜨리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있지, 수아야. 이거 투어 일정 끝나면 자유 시간이라며? 오후에 뭐 해?”

“아, 저 보르도에 친구가 있어서요. 그 친구랑 만나기로 했어요.”

“친구? 친구 누구? 내가 아는 애야? 또 어학연수 같이 했다는 애라고 하려고?”

“아뇨. 대학 친구요. 같은 식영과 전공이었는데, 툴루즈에서 석사 과정 중이거든요. 툴루즈에서 보르도까지 TGV로 2시간 거리라, 보르도에서 만나기로 했어요.”

실제로 툴루즈에서 공부하는 친구가 있었기에 반은 거짓, 반은 진실이었다.

“아, 그래? 아쉽네. 뭐, 하긴 오늘만 날인가?”

세현은 여유롭게 웃으며 수아를 궁지로 몰아가려 들었다.

수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티 나지 않게 흘끗거렸다. 아직도 투어 팀이 오려면 25분이나 남았다.

“있잖아, 수아야.”

세현이 성큼 발을 내디뎠고, 수아가 그 모습을 바라보며 한숨을 집어삼켰다.

여차하면 잔을 하나 일부러 깨뜨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음회를 위한 잔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샤토 관계자를 찾아간다고 하면, 둘이 있는 공간을 벗어날 수 있었다.

수아가 와인 잔 밑동으로 슬쩍 손끝을 갖다 대었다.

“우리 언제 한번…….”

세현이 또다시 성큼 다가왔다. 여지를 준 적도 없다. 단지 피해망상에 젖은 세현의 해코지가 두려워 좋게 말하며 피해 왔을 뿐이다.

정신 상태가 썩어 빠진 것들은 거절을 거절로 알아듣지 못하고 저 좋은 대로 상상해서 나중에는 제가 더 억울하다고 길길이 날뛰기도 한다.

또다시 거절의 말을 꺼내려는 순간이었다.

“어우, 나는 냄새 때문에 못 견디겠더라.”

문밖이 어수선해지는가 싶더니, 여행객 두 명이 시음장 안으로 들어섰다.

“어, 여기 맞나 보다. 저분 있는 거 보니까. 여기 시음장 맞죠?”

고교 동창이라는 40대 중반의 아주머니 두 분이 환히 웃으며 수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뜻 본 세현의 눈동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선하게 풀려 있었다.

“네, 맞아요. 왜 이렇게 빨리 오셨어요?”

두 사람 중 한 명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내가 물갈이를 좀 하는지 며칠 설사를 좀 했어요. 근데 양조장 냄새 맡으니까 너무 역하더라고. 그래서 일찍 나왔어요. 미안해. 설명 좀 자세히 듣고 싶었을 텐데.”

“아유, 됐어. 뭐 잠깐 설명 듣는다고 아나? 와인 뭐 그게 그거지.”

“그래도 잘생긴 우리 셰프님 얼굴 못 보는 건 아쉽네.”

소녀처럼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우리 셰프님 어쩜 그렇게 목소리도 좋으실까? 발음도 무지하게 좋지? 마스크는 살짝 이국적인데 말이야.”

두 사람의 시선이 자연스레 수아를 향했다. 수아에게 뭔가 아는 게 있느냐고 묻는 눈치였다.

수아는 선을 긋는 미소를 드리운 채로 입을 꾹 다물고 그들을 응시했다. 그들은 아쉽다는 듯이 이내 시선을 옮겨 갔다.

불안한 박자로 쿵쿵거리던 심장이 차분히 가라앉기 시작한다.

이윽고 투어 팀 인원 모두가 시음장으로 들어섰다. 세현의 얼굴을 흘끗 살펴보니 아까와는 전혀 다른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시선을 옮기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짙은 눈썹을 한 번 들어 올리며 의문 어린 눈빛을 보냈다. 수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그저 엷은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 일도 없었으면 한다. 투어가 모두 끝날 때까지, 파리에 돌아가서 모든 공부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와인 잔의 어디를 잡느냐에 따라 와인 맛이 달라지기도 합니다. 와인 잔 제일 아랫부분을 잡고 와인을 마실 때, 목을 뒤로 젖히는 각도가 커지는데요. 입안으로 흘러 들어간 와인은 혀끝이 아닌, 혀뿌리 쪽에 닿게 되고요. 혀끝으로 맛보았을 때보다, 예민한 입 안쪽 점막에 닿았을 때 더 깊은 맛을 느끼게 됩니다.”

그는 투어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눈을 맞추며 와인을 따라 주었다. ‘예민한 입 안쪽 점막에 닿았을 때.’라고 말할 때는 그 모습이 너무도 매혹적이어서 수아도 숨을 죽이고 바라보았다.

그의 혀가 입 안쪽까지 닿았던 감각이 생생히 떠올라서, 괜히 목덜미에 열기까지 올랐다.

“와인을 실온에 두고 마셔야 한다, 그래서 서빙된 와인 잔을 잡고 손바닥으로 데워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실온은 중세 시대에 왕이 살던 성 안의 실내 온도를 말합니다. 대체로 성 안의 온도는 서늘했습니다. 레스토랑에서 알맞은 온도로 서빙된 와인을 굳이 손으로 데워서 마실 필요가 없다는 뜻입니다.”

시음장 안에 향긋한 와인 향기가 퍼져 나갔다.

“지금 시음하고 계신 와인은 카베르네 프랑 70%에 말벡, 메를로가 블렌딩된 와인입니다. 저렴한 와인 중에서도 고가의 와인에 결코 밀리지 않는 바디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시음장에 있는 모든 인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오직 한 사람 세현만이 수아를 흘끗거리며 훔쳐보았다.

여행객들이 와인을 맛보며 잠시 시선이 흐트러진 사이, 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듯 한쪽 눈썹을 들썩이며 수아를 응시했다.

수아는 티 나지 않게 어깨를 슬쩍 들었다가 내렸다. 그럼에도 그의 짙은 눈동자에 어린 의문은 가시지 않았다.

* * *

“아, 형! 여기요, 여기.”

한승은 요란하게 손을 흔드는 세현이 앉아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매년 6월이면 보르도 와인 축제가 열리는 깽꽁스 광장에는 철마다 행사가 끊이질 않았다. 지금은 회전목마와 대관람차를 비롯한 놀이기구와 맥주를 파는 상점들이 들어와 복작거렸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네.”

한승은 심심한 인사를 건네며 세현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러니까요, 형. 비리비리한 애들 말고 진작에 저 데리고 가라고 말씀드렸었잖아요.”

“그래, 와 줘서 고맙다.”

“형, 맥주 드실 거죠?”

“아니, 내일 일찍부터 일정이 있어서, 술은 됐고.”

“아, 그럼 저도 그만 마셔야겠네요.”

“맥주 한 잔인데, 뭐. 넌 좋을 대로 해.”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샤토 투어가 끝나고 호텔에 체크인을 하자마자 세현은 득달같이 한승에게 달려왔다.

한승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맥주를 한 모금 머금은 세현은 별 이상한 일을 다 겪었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형, 수아요.”

“수아?”

별 관심 없다는 듯이 심드렁히 되묻자, 세현이 기분 나쁘게 눈을 희번덕거리며 테이블 앞으로 상체를 숙인다. 엿들을 사람도 없는데, 꼴사납게 주위를 살피는 모습에 하마터면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걔가 저한테 엄청 들러붙거든요. 혹시 형한테도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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