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31화 (31/62)

#031

한승의 턱이 저절로 굳어졌다. 겨우 맥주 반잔에 취한 건지, 아니면 본인이 지어내는 거짓에 취한 건지, 세현은 한승의 깊은 눈가가 매섭게 변하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댔다.

“제가 지난번에 그랬잖아요. 걔가 남자 신세 하나 망치려고 했다고. 어우, 무서운 년이에요. 형도 진짜 조심해요. 걔가 형편이 안 좋아서 그런지, 돈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요.”

“형편이 안 좋아?”

세현이 내뱉는 거짓 중에서 그녀에 관한 이야기 하나가 마음에 툭 걸렸다.

“아, 형은 모르시겠죠. 저도 시은이한테 대충 들었는데, 여기서 번 돈으로 뭐 엄마 병원비를 부쳐 줘야 한다나, 뭐라나. 암튼 애가 안되기는 했어요. 그래도 공부 욕심 있는 거는 칭찬해 줘야 할지, 남자 등까지 쳐 먹어 가면서 저러고 사는 걸 보면 독하다고 해야 할지.”

이제껏 그녀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들을 기회가 없었다. 차가운 얼굴로 벽을 세우고 사는 것은 어쩌면 타인에게 자신을 드러내기를 꺼리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한승이 웃는 얼굴로 선을 긋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형이 재벌 집 아들인 줄 알면.”

“뭐?”

한승은 어이가 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지으며 재차 되물었다.

“재벌 집 아들?”

만면에 선선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묻자, 세현이 당황한 듯 얼버무렸다.

“시은이가 그러던데요? 그러니까, 형이요……. 어…….”

“어디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을까.”

한승은 아니라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반박하지는 않았다. 이럴 때 괜한 말을 더 했다가는, 언젠가 문제가 되는 순간이 온다.

“적당히 하고 들어가자. 피곤하다. 내일 일정도 있고.”

사실 내일 투어 팀은 아르카숑 지역에 있는 듄드필라에 방문할 예정이다. 모래밭을 사이에 두고 한쪽에는 바다가, 다른 한쪽에는 푸른 잎이 무성한 숲이 있는 절경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다.

자연경관을 테마로 한 날이기에 내일 일정에는 한승이 동행하는 프로그램이 없었다.

“아, 그렇죠? 얼른 들어가요, 형.”

일하러 오면서 일정표도 제대로 살피지 않았는지, 세현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텔로 향하는 길. 세현은 끊임없이 도수아를 입에 올리며 상스럽게 굴었다.

“애가 반반하고 봐 줄 만하기는 해요. 마른 것 같으면서 은근히 가슴은 크더라고요. 형, 오늘 걔 봤어요? 어떻게 니트로 다 가렸는데도, 상체가 그렇게 야해요? 몸이 그러니, 남자 후리기도 쉬웠겠지.”

한승은 대꾸 없이 화를 억눌렀다. 지금 건드려 봐야 오해라고 발뺌할 것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잡아내야 했다. 그래야 썩은 종자를 단번에 도려낼 수 있다.

“그래서 오늘은 제가 받아 줄까 하고요. 괜히 딴 놈 인생 망치려고 설치는 꼴 보는 것보다, 수아가 좋아 죽겠다는 제가 받아 주는 게 낫죠. 아, 형. 먼저 들어가실래요? 저 뭐 좀 살 게 있어서.”

세현은 신나서 죽겠다는 얼굴로 어깨를 들썩거렸다.

“뭘 사러 가는데?”

“콘돔이요. 들어가세요, 형.”

친근하게 한승의 어깨까지 두드린 세현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껄렁거리는 자세로 쇼핑센터가 있다는 거리로 사라졌다.

저렇게 설치는 꼴을 보니, 그녀에게 한두 번 들이댄 모양새가 아니었다.

샤토 시음장에서 그녀는 눈에 띄게 긴장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특유의 서늘한 미소로 감정을 감추려 애쓰는 듯 보였지만, 그녀의 눈빛은 이따금 세현을 향하고 있었다.

설마 했는데.

세현이 득달같이 불러낸 이유가 설마 도수아일까 싶었다. 앞뒤 안 맞는 이야기를 저 유리한 쪽으로 맞춰 가며 거짓말을 지껄이는 입을 찢어 놓고 싶었다.

한승은 얼굴을 굳힌 채로 성큼성큼 호텔 로비를 가로질러 들어갔다.

* * *

아침 일찍 일어나서 파리에서 보르도로 이동한 것도 모자라, 보르도 생쟝역에서 차로 1시간 20분 거리에 있는 샤토까지 다녀왔더니 진이 다 빠졌다.

또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진 데에는 빡빡한 일정도 한몫했지만, 샤토 시음장에서 갑자기 나타난 세현 탓도 있었다.

시음회가 끝나고 뒷정리를 하는 동안에도 세현은 주위를 살피며 수아의 곁으로 슬금슬금 다가왔다. 혹시나 버스 안에서 옆자리를 차지하고 버티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머리가 지끈거리기까지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투어 버스에 오르는데, 맨 앞자리에 타고 있던 한승이 수아의 이름을 불렀다.

「도수아. 일정표 어디 있어?」

수아는 그의 옆자리에 앉아서 이동하는 내내 일정에 관한 논의를 하는 것처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마치 수아가 불안해하는 것을 알아차린 것처럼, 이미 오리엔테이션을 통해 훑은 내용을 처음 보는 것처럼 묻고 답했다.

「푹 쉬어. 일정 고된데.」

「네, 셰프님. 쉬세요.」

그에게 깍듯이 인사를 하고 제일 먼저 버스에서 내렸다. 등 뒤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는 세현의 목소리가 불길하게 울렸다.

「형, 우리 저녁 같이 할래요?」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저러나 싶어서 짜증이 났지만, 세현이 있는 자리에는 절대 끼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에 끼게 된다면 또 무슨 오해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제발 자신의 불안감을 눈치채고 두 사람이 만나는 저녁 식사 자리에 부르지 않기만을 바랐다.

수아는 초조하게 시간을 한 번 확인했다. 이제 막 저녁 8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밤늦게라도 와인 한잔하자고 연락이 오면 어쩌나 불안해졌다.

그나마 연락만 오면 다행이다. 방 번호를 알아내서 찾아온다면 골치가 아파진다.

“하아.”

언젠가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 세현이 제발 이번 투어가 끝날 때까지만, 제가 파리를 떠날 때까지만 잠잠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순간, 휴대전화가 길게 진동했다. 발신인은 세현이었다.

받을까, 말까. 망설여졌다. 그냥 차라리 자는 척을 하는 게 낫겠지?

앞으로 남은 투어 13일. 세현을 어떻게 피해야 하는지, 한승에게 어떻게 티 나지 않게 도와 달라고 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전화 수신이 끊기고, 짧은 진동과 함께 메시지 하나가 들어왔다.

[오빠, 지금 네 방으로 가. 잠깐 문 좀 열어 주라.]

소름이 오싹 돋아난 순간,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심장이 갑자기 목구멍까지 치솟았다.

방에 없는 척을 해야 할까, 고민하는 찰나 문 밖에서 나직이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도수아, 나야. 문 열어 봐.”

떨리는 손으로 얼른 방문을 열어젖혔다. 그가 주위를 살피며 방 안으로 몸을 숨겼다. 커다란 손이 어깨를 끌어당겨 안았다. 단단한 품에 안기자,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얼굴이 왜 이렇게 하얗게 질렸어?”

그의 입술이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왜 이렇게 떨어.”

떨고 있는 줄도 몰랐다.

“샤워하고 머리를 안 말렸더니, 좀 추웠나 봐요.”

수아의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물방울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씻고 나와서 불안한 나머지 방 안을 서성이느라 머리를 말릴 새도 없었다.

“일단 머리부터 말리자.”

그는 수아의 손을 잡은 채로 욕실로 향했다.

수아를 거울 앞에 세운 그는 드라이기를 켜고 젖은 머리를 털어 가며 말려 주기 시작했다. 세심하고 부드러운 그의 손길과 부드러운 바람이 마음결을 어루만져 주는 기분이다.

불안하게 날뛰던 심장이 놀랍도록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적당히 물기가 가시자, 그가 드라이기를 제자리에 올려놓고는 거울 속에 비친 수아의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언제부터야?”

수아보다 머리 하나는 족히 컸다. 그가 상체를 낮추고 턱을 내려야 수아의 정수리에 닿을 정도였다.

키가 얼마나 되려나, 187cm? 188cm? 이런 질문을 받은 상황에서도 그에게 매혹될 수 있음이 놀라웠다.

“좀 됐어요.”

그의 질문에 담긴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그는 세현의 존재에 대해 묻고 있었다.

“좋아한다고 해서, 저는 그냥 좋은 선후배 사이로 남고 싶다고 했었어요.”

누구한테도 해 본 적 없는 이야기가 그에게는 술술 흘러나slakpwkjmdm왔다. 긴 유학 생활, 의지가 되는 든든한 사람을, 자신을 보호해 줄 것 같은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다.

시은이 곁에 있다고는 하나, 시은에게도 세현이 얼마든지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기에 함부로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때, 셰프님 만나러 갑자기 호텔 근처로 찾아갔을 때요. 저 집까지 택시로 데려다주신 날이요.”

“어.”

그의 미간 사이에 미세한 주름이 잡혔다. 그는 턱을 완전히 굳힌 채로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수아는 거울 속에 비친 그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말을 이었다. 어쩐지 거울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은 더 근사하다는 생각도 이어졌다.

“그때 집 근처에서 세현 선배랑 마주쳤어요. 집 앞까지 가면 따라 들어올 것 같은데, 도움을 요청할 곳이 없었어요. 경찰서에 가면 세현 선배 신분이 분명하니까, 유학생끼리 해프닝으로 여길 테고. 또 그렇게 되면 껄끄러워진 상태로 세현 선배 마주해야 하고.”

말을 더할수록 그의 표정은 차갑게 굳어 갔다.

“마침 셰프님이 전화해서, 그래서 무작정 갔던 거예요. 세현 선배, 다른 사람 있을 때는 제 눈도 못 쳐다보거든요.”

“그래서 그날 택시 타고 가는 것만 봐 달라고 했던 거야?”

수아는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하아, 하고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두 팔로 수아의 어깨에 감아 안았다.

“나한테 말도 못 하고. 얼마나 무서웠을까. 저놈 완전히 미친놈이던데.”

가만히 손을 올려 그의 단단한 팔을 부드럽게 쓸어 보았다.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은이는 저놈이 저러는 거 몰라?”

“고백한 적 있다고는 말했는데, 세현 선배가 워낙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는 타입이라고. 별로 신경 안 썼어요.”

그가 얌전히 수아를 돌려세우고는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의 입술이 목덜미에 닿아 따뜻했다. 아득하게 차오르는 열기에 눈을 지그시 감은 순간,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수아야, 나야.”

방문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는 세현의 것이었다.

“여기 가만히 있어.”

조용히 읊조린 그가 방문 쪽으로 성큼성큼 발을 옮겼다.

“어쩌려고요.”

목소리를 낮춰 그를 붙잡은 순간, 세현의 소름 돋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네가 나한테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서 그래. 내가 다 설명할게.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하자. 응? 오빠가 너 많이 아끼는 거 알지? 자니? 아직 8신데……. 방에 있는 거 알아.”

세현의 목소리가 점점 뾰족해지기 시작했다.

“너 자꾸 이렇게 오빠 초조하게 할래? 너 그러다 정말 큰일 난다. 응? 수아야. 문 좀 열어 봐. 오빠가 너 때문에 진짜 못 살겠다. 오빠 한 번만 봐주라. 응?”

그가 한숨을 한 번 몰아쉬고는 끝내 방 문고리를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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