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2
수아는 무릎까지 낮춰 가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수아를 향했다. 달래 주려는 듯 웃는 표정이었지만, 눈동자에는 분노가 그득했다.
“하지 마요.”
그가 문을 열어젖힌다면 이 방 안에 수아와 그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 그는 이번 프로젝트를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가 레스토랑 일에 전념할 것이다.
하지만 수아의 처지는 다르다. 그가 떠난 뒤에도 두 달은 더 프랑스에 머물러야 했고, 좁은 바닥에서 일자리도 구해야 한다.
그 어느 때보다 평판에 신경 써야 한다. 같은 사건을 두고도 여자와 남자에게 들이밀어지는 잣대는 확연히 다르다.
평소 거짓말을 일삼고, 성실하지 못한 세현이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도 소문이 되어 퍼지기 마련이다.
배성헌과 얽힌 괴소문이 가라앉는 데도 시간이 걸렸다. 이번에도 그와 같은 일이 발생하는 것은 막아야 한다.
처음은 쉽게 넘어간다. 하지만 비슷한 소문이 또 난다면, 무게가 실리게 된다. 수아는 자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는 이야기를 더는 듣고 싶지 않았다. 걸레를 물고 있는 것처럼 더러운 말만 뱉어 내는 세현의 입에서 어떤 말이 흘러나올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제발.”
수아가 애원하듯 그에게 매달렸다. 그는 고개를 내리고 한숨을 훅 내쉬더니 이내 수아를 당겨 안았다.
그의 입술이 순식간에 뭐라 떠들려는 붉고, 작은 입술을 집어삼켰다.
머릿속을 잠식했던 복잡한 상념이 단번에 날아가 버릴 만큼 그는 거세게 수아를 몰아붙였다.
“수아야, 너 혹시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어디 아파? 오늘 내내 안색이 안 좋던데…… 오빠가 봐 줄게. 응? 프론트에 문 열어 달라고 할까? 오빠가 같이 있어 줄게.”
세현의 소름 돋는 목소리가 문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수아의 등이 벽에 닿자, 그가 이마를 맞댄 채로 입술을 떼 냈다. 밖에서 아우성을 쳐 대는 세현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질 만큼 아찔한 숨결이 뒤섞였다.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나서지 말고, 여기 있어.”
그는 문을 열어도 보이지 않는 쪽에 수아를 숨기고는 문을 열어젖혔다.
“수아야. 오빠가 좋아한다잖아! 오빠가 너만 좋다잖아!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준다는데, 너는 산 사람 소원도 한 번 못 들어줘? 오빠랑 있자. 응? 문 좀 열어……!”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던 세현의 목소리가 뚝 멈추었다. 세현은 잠시 말을 잃은 사람처럼 입만 벙끗거렸다.
“혀, 형?”
혼이 나간 듯 멍해진 얼굴을 보고 한승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여기서 뭐 해?”
한승의 심상한 질문에 세현은 주위를 한 번 두리번거리더니 방 번호를 확인하고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형은 여기서 뭐 하세요?”
한승은 어이없다는 듯이 한숨을 한 번 몰아쉬었다. 한승의 눈빛과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본 세현은 은근히 긴장한 눈치였다.
한승은 위압적인 시선으로 세현을 위 아래로 훑어보았다. 꼼지락거리는 손에 들고 있는 콘돔이 눈에 들어온 순간, 꼭지가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너는 내 방문 앞에서 도수아를 왜 찾는데?”
“어? 어, 어.”
한승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물은 말에, 세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어버버했다.
“그리고 네가 지금 도수아한테 하는 짓, 그거 범죄야.”
치가 떨린다는 듯이 쏘아보자, 세현은 손사래를 치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니에요, 형! 범죄라뇨! 수아도 저를…….”
“도수아가 너 좋아한다고 말한 적 있어?”
스산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한없이 낮았다.
“그걸 꼭 말을 해야 아나요.”
세현은 우물쭈물하면서도 어이없는 말을 잘도 내뱉었다.
“말을 안 하는데 어떻게 알아? 그럼 너는 내가 지금 무슨 생각하는지도 알겠네?”
나쁜 머리를 못되게 굴리는지 세현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어, 형이, 그러니까. 어. 제가 수아를 좋아하는데, 수아도 저를 좋아하고. 그래서 제가 찾아왔는데, 형이 있었고……. 혹시 형, 도수아가 꼬셨어요? 걔 여기저기 흘리고 다닌다고 조심하라고……!”
“아니지, 세현아.”
한승이 입가에만 비릿한 미소를 드리운 채 말을 이었다.
“너는 수아한테 비이성적으로 집착하는 거고. 수아는 너한테 좋아한다는 말도 한 적 없고. 너는 수아 방을 찾으려다가, 내 방으로 찾아와서 미친놈 짓거리하다가 딱 걸린 거고. 그리고 나는 세상 미친 새끼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나 고민 중이고.”
“형, 그게 아니라요.”
“아니라?”
그럴 듯한 변명을 해 보라는 듯이 쏘아보자, 세현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눈동자에 어린 같잖은 광기가 우스울 정도다.
“저도 억울해요. 수아가 저한데.”
“도수아 불러서 삼자대면할까?”
세현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리고는 반 발짝 뒤로 물러났다.
“이제 네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줄게. 지금 당장 파리로 돌아가. 그리고 도수아 앞뿐만 아니라, 모임에도 나타나지 마. 앞으로 너는 평생을 내 눈 아래서 살아가게 될 거야. 축하해. 평생 내 관심 안에서 살아가게 된 걸.”
완강한 어조에도 세현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토를 달았다.
“형, 장난이 너무 심하신데요.”
“너는 도수아한테 안 심했고?”
끝까지 제 잘못은 없다고 떠들어 대는 꼬락서니가 불쌍할 정도다. 한승은 문고리를 잡은 채로 세현의 발치까지 단번에 다가갔다. 문 뒤에 서 있는 여자에게는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게 싫으면 마음대로 해 봐, 한번. 어떻게 되나.”
한승은 느른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네가 나에 대해 어디서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그게 진짜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될 거야. 세상에서 가장 잔악무도한 방식으로.”
방어적 폭력은 서슴지 않을 수 있다는 말에 세현의 눈가에 흐릿한 공포가 스민다. 한승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하얗게 질린 세현의 얼굴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가라. 좋은 말로 할 때.”
평소와 같은 다정한 목소리로 뇌까리자, 세현은 쭈뼛거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승은 세현의 모습이 긴 복도를 지나 모퉁이를 돌아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저대로 물러선다면 다행이지만, 그렇다면 미친놈이 아닌 거다.
수일 내로 사람을 하나 붙여 놓아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승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등 뒤에서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안쓰러운 얼굴을 하고 있는 그녀를 품에 당겨 안았다.
“마지막에 뭐라고 한 거예요?”
수아는 문 뒤에 꼼짝도 하지 않고 서서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세현의 기가 막힌 논리를 그는 손쉽게 제압했다.
언쟁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의 위압감에 세현은 압도당한 듯 헛소리만 지껄이다가 돌아갔다.
그의 커다란 손이 수아의 마른 등을 조심스럽게 쓸어내렸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더는 미친 짓 못 하게 할 거니까. 걱정 마.”
그가 수아의 이마에 가만히 입을 맞추었다. 이게 이렇게 쉬운 일이었나, 싶을 정도여서 맥이 탁 풀려 버렸다. 약간의 현기증이 느껴져서 그의 가슴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고 숨을 골랐다.
“좀 눕자.”
그가 한 발짝 물러서며 수아의 어깨를 그러쥐었다. 그제야 몸의 떨림이 느껴졌다.
그는 먼저 수아를 침대에 눕힌 뒤, 이불째로 수아를 끌어안았다. 포근한 이불에 감싸인 단단한 안정감, 불규칙하게 뛰던 심장이 조심스럽게 가라앉기 시작한다.
실체는 없더라도 엄연했던 폭력,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종류의 공포감, 누구에게도 도움을 요청할 수 없었던 무력감으로 얼룩졌던 시간이 그의 품 안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미친놈의 무분별한 짓거리를 털어놓으며 약체화되던 마음의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평생 느껴 보지 못한 깊은 안도감, 그의 품 안에서 느껴진 것은 영원히 이어지기를 바라는 안온함이었다. 무너진 벽 위에 한계가 없는 신뢰가 싹트기 시작했다.
이 남자라면, 다를 것 같다.
이 남자라면, 아버지처럼 가족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 삶을 몰입하는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것 같다.
“고마워요.”
“좀 자.”
그의 입술이 수아의 이마에 닿은 채로 떨어지지 않는다. 수아는 그의 보드랍고 따뜻한 입술의 감촉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며, 눈을 감았다.
따뜻한 무력감이 온몸을 지배해 온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게 감정이라지만, 완연해지고 깊어지고 분명해지는 순간은 있다.
모험을 떠나기 전, 모르는 세상에 대한 경외심으로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처럼 수아의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난생처음 맺은 인연으로 이제부터 다른 삶이 펼쳐질 것이다.
무엇이 되든 좋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 * *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어제와 다른 복장으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었다.
“사람 붙이고 나면 연락 주고. 응. 거기까진 알아서 처리해 줘. 그래. 한국엔 별일 없지? 응. 보조 주방? 거긴 굳이 내가 손댈 필요까지는 없고. 응. 그래. 한국 가서 보자.”
내내 창을 등지고 있던 그가 시선을 돌리다 수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눈을 한 번 찡긋하고는, 통화를 마치며 수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지금 몇 시예요?”
그의 머리카락이 물기에 젖어 평소보다 훨씬 검고 짙었다.
“10시 좀 넘었어.”
“내가 그렇게 오래 잤어요?”
흠칫 놀란 얼굴로 묻자, 그가 다감한 미소를 머금는다.
“피곤해 보여서 좀 자게 뒀지. 방에 가서 씻고, 짐도 옮겨 오고.”
두 뺨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진다.
“짐을, 옮겼어요?”
그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방에 혼자 두기 싫어서.”
여행객과는 호텔이 달라서 마주칠 일이 없는 게 다행이다.
“다들 듄드필라로 출발했을 거야, 아마. 우리도 나갈까?”
수아의 입가에 다정한 미소가 번졌다.
“예쁘네.”
가슴이 간질간질해진다.
“진짜로 웃으니까.”
순간 억지로 웃지 말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그의 차가운 얼굴이 생각나서 수아는 뾰족한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그렇게 노려볼 땐 섹시하고.”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얼굴이 단숨에 코앞까지 다가왔다. 시원한 체취가 비강을 훑고 들어와 폐부를 압도한다.
여실한 긴장감에 숨이 가빠진 순간, 그의 입술이 붉은 표피 위로 천천히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