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34화 (34/62)

#034

그가 말했던 ‘감정적 을’에 관한 이론이 이제야 이해가 갔다. 그에게 유예 기간을 선언했을 때는 분명 감정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그에게 절대적인 안온함을 느끼고 허물어져 더 뜨거운 자극을 바라는 지금은, 그때 그가 그랬던 것처럼 초조함에 심장이 떨린다.

새삼 그의 인내가 존경스러울 정도다. 고작 며칠이 지났을 뿐이었지만, 그가 유예 기간을 받아들이고 기다려 줬다는 사실에 신뢰감은 더욱 증폭되었다.

그에게 빠질 수밖에 없도록 설계된 것처럼 사고가 한 방향으로만 흘렀다.

절대적으로 그를 원하고, 그와 함께하고 싶은 열망이 자리한 곳으로.

차에서 내려 그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해가 짧아진 탓에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내리쬐는 햇살이 저물고 있음이 느껴졌다. 짙은 어둠에 파묻히기 전, 가장 밝게 빛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오후의 빛깔은 아름다웠다.

오래된 돌벽에서 풍기는 투박한 냄새와 바람결에 실려 오는 달큼한 포도 냄새, 옆에 선 그에게서 풍겨 오는 시원한 체취까지.

평생의 시간을 지나 기억이 아슴아슴해지는 순간이 온다고 하더라도, 모든 것을 다 잊게 된다고 하더라도, 혹은 그와의 사랑이 저물어 퇴색되는 순간을 맞게 되더라도.

그와 손을 맞잡고 걷는 지금의 분위기만큼은 또렷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생떼밀리옹 마을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한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심장이 온몸을 구르는 것처럼 거세게 뛰어 댔다.

구름 위를 걷는다는 표현이 이해가 갔다. 발아래가 허공에 붕 떠 있는 것 같았고, 고산 지대로 아닌데 높은 곳에 올라 산소가 부족한 것처럼 숨이 가빠 왔다.

긴 복도를 지나 마침내 객실 앞에 도착했을 때, 이러다 숨이 콱 막혀서 죽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럴수록 그의 존재감은 더없이 커져만 갔다.

모든 게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를 알게 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이르다 싶을 정도로 서로에게 빠져들었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전개와 달리, 감각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기민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마치 오늘 있었던 일들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모조리 기억하겠다는 듯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다가왔다. 평소라면 눈여겨보지 않았을 호텔 복도의 카펫 색깔까지도 선명했다.

그가 객실 문을 열어젖히며, 수아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턱짓했다. 그의 얼굴에 고인 미소가 지나치게 준수했다.

“먼저 씻을래?”

그는 수아의 살짝 돌려세우고는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볼록하게 튀어나온 날개뼈를 커다란 손으로 감싸는 감각이 생생하다. 등줄기를 타고 생경한 전율이 흘러내린다.

내리깐 그의 눈빛이 더듬듯 수아를 바라보았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욕실에 들어서자마자,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뱉은 숨결조차 뜨겁다.

태어나서 누군가를 이토록 간절히 원했던 적은 없었다. 누군가의 손길이 닿기를, 누군가의 품에 안기기를, 그리고 깊은 몸속을 누군가 꿰뚫어 주기를.

얇은 블라우스와 슬랙스를 벗고, 브래지어를 풀어내자 빳빳하게 곤두선 유두에서 찌릿한 감각이 흘렀다.

첫 정사를 눈앞에 둔 상황, 평소와 같은 일련의 과정조차도 뜨겁게 다가왔다. 팬티는 이미 투명한 애액으로 흥건히 젖어 있다.

샤워 부스 안에서 들어서서, 뜨거운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았다. 그저 물줄기일 뿐이고, 제 손이 닿는 것인데도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로 육감적이다.

수아는 조심스럽게 손을 내려 질구를 만져 보았다. 뜨거운 물줄기와는 감촉 자체가 다른 애액이 묻어나 미끌미끌했다. 아무리 씻어 내도 흥분의 흔적은 마르지 않고 흘러나왔다.

짧은 샤워를 마친 수아는 마치 그를 두고 자위를 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만큼 달아올라 있었다. 그저 몸에 무언가 닿는 것만으로도 열기가 오르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그와 몸을 맞대면 발화해 버릴지도 모르겠다.

수아는 입었던 옷을 다시 꿰입을 수는 없어서 배스 가운을 걸치고 욕실 밖으로 향했다. 그는 2인용 테이블 앞에 서서 와인 잔에 붉고 진득한 액체를 채우고 있었다.

“기다리기 지루해서.”

열기가 자욱한 그의 목소리도 탁하게 쉬어 있었다. 그는 수아를 흘끗 보고는 와인 병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지루할 텐데, 기다릴 수 있겠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웃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눈앞이 어른어른 흔들리는 듯했다.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을 거잖아요.”

겨우 내뱉은 목소리에는 다행히 흔들림이 없었다. 그가 성큼성큼 수아의 곁으로 다가왔다.

예민해진 뺨에 그의 숨결이 가만히 내려앉자마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아쉬움에 저절로 눈이 감기고 아랫배가 바싹 조여든다.

“나는 1분, 1초가 고문 같았어.”

귓가에 스미는 듣기 좋은 목소리를 음미하는 사이, 그의 기척이 멀어지는 게 느껴진다. 가까스로 눈꺼풀을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이미 욕실 안으로 사라진 뒤였다.

이윽고 물줄기가 바닥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소리가 야하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무한한 상상력은 그의 벗은 몸을 그려 냈다. 온몸으로 느꼈었던 탄탄한 근육과 단단한 질감이 저절로 떠올랐다.

생각이 그의 하체 중심에 미치자, 누가 목구멍에 불을 댕긴 것처럼 열기가 확 끼쳤다. 수아는 그가 따라 놓은 와인을 급히 한 모금 들이켰다. 찌르르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 몸속을 휘돌았다.

“후우.”

와인 향이 짙게 밴 한숨을 내뱉은 순간, 사위가 조용해졌다. 침을 넘기기도 힘들 정도로 열기 어린 긴장감이 몰려왔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물 냄새가 방 안에 훅 끼쳤다. 그가 등 뒤에서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자연스럽게 돌아서려고 했는데, 옴짝달싹을 할 수가 없다. 빨라진 심장 박동 탓에 숨을 홉 들이켠 순간, 그의 왼팔이 허리에 감겼다.

그는 수아를 뒤에서 안듯이 선 자세로 수아의 손에 들려 있던 와인 잔을 가져갔다.

스템을 잡고 빙글빙글 돌린 그는 샹들리에 조명이 투과되도록 잔을 비추었다. 짙고 붉은색인데 맑다. 병입 후에도 관리가 잘된 와인이었다.

유리잔 벽을 타고 내리는 와인의 눈물이 선명한 것으로 보아 알코올 함량이 높아 보인다. 아까 목을 타고 내려갔던 찌르르한 감각이 뜬금없이 이해되었다.

긴장감 가득한 순간을 견디지 못하고 딴생각을 이어 가고 있는데, 그가 낮게 읊조렸다.

“와인을 맛있게 마시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

“와인 잔 가장 아랫부분을 잡고 마시면, 와인이 닿는 곳이 깊어져서.”

닿는 곳이 깊어진다는 말이 야하게 느껴져서 수아는 말을 뚝 멈추었다.

“그렇지. 깊숙이 닿아야 본연의 맛이 강해지지.”

그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고는 말을 이었다.

“와인은 잔에 담긴 이후에도 산소와 반응해서 다른 맛을 내기도 해.”

왜 지금 이 순간에 뜬금없이 와인 맛에 대한 논조를 펼치는 건지. 애가 타서 입안이 바짝 마르면서도 그가 내뱉을 말이 궁금해서 마른침이 넘어갈 정도다.

“그럼, 입안에서 섞이면 어떤 맛이 날까?”

그가 우아하게 목을 젖히며 와인을 한 모금 머금었다. 수아의 허리에 감겨 있던 손이 단숨에 목덜미를 움켜잡는가 싶더니 턱이 들렸다. 놀라서 벌어진 잇새로 그의 입안에 있던 와인이 흘러 들어왔다.

아까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와인을 머금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아찔한 액체가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 가서 배 속을 점화했다. 뒤이어 와인 향을 머금은 혀가 입안을 가득 채우고 들어왔다.

놀라서 머뭇거리는 혀를 그는 단숨에 얽고 비벼 댔다. 입안이 얼얼해질 만큼 자극적이다. 이제껏 그와 나누었던 키스는 다정했다고 느껴질 만큼 거세게 밀고 들어오는 움직임에 숨이 막혀 왔다.

파르르 떨리는 손끝으로 그의 단단한 팔뚝을 움켜잡았다. 턱을 움켜잡고 있던 그의 커다란 손이 배스 가운을 스르륵 풀어내렷다. 손쓸 틈 없이 천 무더기가 바닥에 고였다.

맨허리를 움켜잡은 그의 입술이 서서히 떨어졌다. 아쉬움에 이어진 숨결이 서로의 입가에서 흘렀다.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리자, 벗은 몸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눈에 들어왔다. 매끈한 살결을 샅샅이 탐하는 그의 시선은 생경한 충동을 불러일으킬 만큼 자극적이다.

크게 숨을 들이쉬자 부드럽게 흘러내린 젖가슴이 위아래로 들썩였다. 그의 시선이 먹음직스러운 음식을 바라보는 듯했다.

수아는 그의 시선을 한껏 느끼며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배스 가운 끈을 잡아당겼다. 앞섶이 힘없이 벌어지자, 그의 배꼽 근처까지 올라붙은 단단한 남성이 눈에 들어온다.

단단하게 갈라진 하얀 복근 위로 불거진 그의 남성은 열기를 발산하듯 핑크빛으로 달아올라 있었다. 마치 잘 익은 열매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처럼 수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단단한 어깨에 걸쳐진 배스 가운을 밀어 넘기자 마침내 온전한 나신이 드러났다. 조각조각 벌어진 근육을 수아는 경탄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쇄골 아래부터 발끝까지 전부 훑어 내렸을 때, 그가 한 발짝 가까이 다가섰다.

잔뜩 올라붙은 남성이 꺼떡거리며 수아의 말랑말랑한 배 위에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무릎을 굽히면 흘러내린 가슴 밑동에 닿을 것 같았다. 손으로 쥐고 쓸어 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의 손이 옆구리를 쓸고 올라와 봉긋하게 부풀어 오른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네 손가락으로 유두를 가볍게 튕긴 그는 엄지와 검지로 꼬집듯 비비며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반대쪽 목덜미에 닿았다.

“흐음.”

달아오른 숨결이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수아는 발꿈치를 살짝 들어 올려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살갗에 맞닿은 그의 감촉은 놀랍도록 부드러웠다. 그의 손아귀에 은근하게 힘이 가해지는가 싶더니 가슴 끝이 비틀렸다.

“흐읏.”

왼쪽 가슴에서 시작된 짜릿한 전율이 단번에 허벅지 사이로 흘러내렸다. 뜨끈한 애액이 살갗을 간질이는 느낌에 두 눈이 질끈 감겼다. 그의 손이 온몸 구석구석에 닿았으면 좋겠다는 열망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피어올랐다.

가장 은밀한 곳을 내어 주고, 깊은 곳까지 맞닿아, 세상 무엇보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갈망이 짙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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