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7
감당할 수 없는 쾌락에 젖어 뱉어 내는 사랑 고백은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가.
그녀를 향한 고백의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원치 않는다.
한승은 주문을 외듯 경건하게 그녀의 이름을 한 번 더 불러 보았다.
“수아야.”
그녀의 이름에는 사랑이 담겼고, 애정이 흘렀고, 바람이 넘쳐났고, 그로 인한 갈망이 피어올랐고, 영원까지 함께하고 싶은 약속과 함께 시간의 경계조차 허물어뜨릴 힘이 존재했다.
이름이 갖는 함축성이 새삼 놀라웠다.
“수아야.”
모든 감정을 담아내듯 조용히 읊조렸다.
“흐읏.”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손을 뒤로 뻗어 한승의 목을 휘감아 안았다. 완벽한 결합이 주는 안정감 속에서 한승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 * *
푸른 하늘을 그어 놓은 새하얀 비행운 아래로 고요한 바다가 끝없이 펼쳐졌다. 뉘엿뉘엿 해가 넘어가는 하늘은 분홍빛으로 물들었고, 바다는 하늘에서 흘러내린 빛깔을 흡수한 듯 파스텔톤의 푸른빛으로 넘실거렸다.
바다와 하늘 사이 연보랏빛으로 어스름 드리운 곳을 바라보는데, 허리에 가녀린 팔이 휘감긴다.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보니 그녀가 팔뚝 근처에서 얼굴을 빠끔히 내밀며 웃는다.
“여기가 낙원인 것 같아요.”
조용히 읊조리는 목소리에 한승은 동의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니스에 온 지 이틀째. 어젯밤 늦게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탓에 일몰을 감상할 시간이 없었다. 오전에는 니스산 해산물을 넣고 만드는 부야베스(Bouillabaisse: 프랑스 남부식 생선 스프) 조리 과정을 시연했다.
배꼽 근처에서 맞잡은 그녀의 손에는 시연 과정의 훈장처럼 반창고가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프로답지 못하기는. 손이 왜 이래?”
한승은 그녀의 손을 움켜잡으며 물었다.
“프로의식 투철하신 셰프님 대신에 생선 지느러미 다듬느라?”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한승을 올려다보았다. 한승은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서 제 앞에 서게 했다. 바다를 향해 선 그녀를 등 뒤에서 포근히 끌어안았다.
“흐음.”
그녀의 입에서 어쩐지 짓궂은 분위기가 물씬 배어나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손가락이 꽤 아프네요.”
고작 생선 몇 마리 다듬었다고 해서 요리를 업으로 삼은 셰프의 손이 망가지지는 않는다. 따스하게 물드는 바다를 바라보며, 비릿한 바닷바람을 상쾌하게 가르는 그녀의 향기에 취한 탓인지, 그녀의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에 장단을 맞춰 주고 싶어진다.
“큰일이네. 호오 해 줄까?”
닭살 돋는 말이 잘도 흘러나왔다.
“와, 겨우 호오?”
그녀는 목소리를 높이며 과장된 어조로 되물었지만, 뜻 모를 불안감이 스며 있었다. 문득 그녀의 모친이 아프다고 했던 세현의 말이 떠올라서 한승은 그녀를 더 꼭 끌어안았다.
그녀는 좀처럼 가족이나, 집안에 대해 말하는 일이 없었다. 그건 한승도 마찬가지였고, 둘 사이에는 아슬아슬한 거리감이 빚어 낸 긴장감이 존재했다.
관계의 탄력을 유지하려면 긴장감이 필요했지만, 그녀의 아픔마저도 끌어안고 싶은 욕구도 동시에 일어났다.
“그럼, 뭘 바라는데?”
한승은 뭐든 들어줄 요량이었지만, 으름장을 놓듯 물었다. 그녀는 잠시 고민에 빠진 듯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개를 비스듬히 내리며 그녀의 어깨를 살짝 돌려세우자, 고운 얼굴에 망설임이 역력했다.
“얼마나 대단한 걸 바라는 거야, 대체?”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장난스럽게 물었지만, 한승의 눈동자는 불안하게 떨렸다.
“이거.”
내내 손에 쥐고 있었는지, 꾸깃꾸깃한 메모지 한 장을 그녀가 내밀었다.
“이게 뭔데?”
그녀는 아랫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놓고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짓눌려서 하얗게 변했던 입술이 더욱 붉게 물들었다. 단숨에 앙증맞은 입술을 머금고 싶었지만, 지금 그랬다가는 그녀가 화를 낼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저렇게 입술을 물었다 놓았을 때는 그녀가 소신껏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의미였다. 처음 그녀와 인사를 나누었을 때, 삶을 대하는 데 있어서 가장 마지막에 포기해야 할 것이 소신이라고 말했던 그녀였다.
그때도 입술을 물었다가 놓아서 한승을 혼란케 했었다.
“이사벨이 준 거예요.”
그녀는 한승이 뭐라고 대꾸하기 전에 재우쳐 덧붙였다.
“내가 상관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 알아요.”
한승은 그녀가 전해 준 종이쪽지를 천천히 열어 보았다. 그곳에는 니스에서 멀지 않은 소도시 에즈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지난번 이사벨을 만났을 때, 친모가 에즈에 살고 있다는 말을 했었다. 아마도 이것은 친모의 주소일 것이다.
한승은 낯선 주소를 내려다보며 마른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렸다. 그녀는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한승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그녀는 결심하듯 덧붙였다.
“내가 같이 갈게요.”
결연한 눈가에 어린 감정은 연민이 아니었다. 순수한 호의였고, 호의를 넘어선 애정이었고, 애정이라는 말로는 부족한 사랑이었다.
그녀가 내비친 진심에 가슴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두근거리는 감각이 버거워서 그녀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작은 손이 더듬듯 올라와 등허리를 어루만진다. 다정한 손길은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던 어린 가브리엘의 손을 잡고 건져 올리는 듯했다.
가망이 없다고 느껴지는 것처럼 무기력한 것은 없다. 한승은 지난날에 대해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물러섰다. 가망이 없는 거라고 생각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은 이미 일어났고, 수습할 이유도,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다 잊었다는 듯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멀쩡하게 잘 살아 내고 있다는 듯이, 누구든 보란 듯이 파리 유학을 택했었다. 요리가 좋기는 했지만 그중에서도 굳이 프랑스 요리를 택했고, 파리로 날아왔었다.
상처를 마주하는 대신, 상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마주했다. 그러면서 아무렇지 않다고 자위했다. 어린 날의 기억으로 얼룩지는 것을 외면했다. 언젠가는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유보하고, 지나쳤다.
그녀가 건넨 종이 안에 마주해야 할 사람이 존재했고, 그녀는 외로움의 근본을 채워 주기라도 할 것처럼 한승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곁을 지키겠다는 듯이 그녀의 눈동자는 부드럽게 빛났다.
한승은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홀린 듯 읊조렸다.
“에즈까지 얼마나 걸리지?”
물리적 거리가 궁금해서 흘러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녀에게 정말 함께해 줄 거냐고 묻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운전해서 가면 30분 정도요. 이번에는 내가 운전해도 되죠?”
그녀가 눈썹을 들썩이며 장난스럽게 눈을 찡긋거렸다. 한승은 아무렴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감이 역력했던 입가가 그녀의 미소 한 번에 맥없이 허물어졌다. 딱딱하게 굳어 가던 심장도 약체화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럼, 나가요.”
그녀는 한승의 손을 잡은 채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지금?”
한승은 굳건히 버티고 서서 그녀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그녀는 단단한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로 대꾸했다.
“말 나온 김에 가야죠. 내일은 칸에서 현지 가이드랑 낚시 투어 같이 해야 하잖아요. 내일 밤에나 시간 될 텐데, 나 밤 운전은 무서워요.”
차가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그녀의 목소리는 한승의 마음을 살살 녹여 댔다.
“오늘 밤에 고민하고, 내일 종일 일이 손에 안 잡힐 게 뻔하지 않아요?”
한승은 그녀의 논리에 쉽게 설득당했다. 아니, 설득당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결정한 순간부터 초조함이 밀려와 입안이 버석하게 말라 버렸다.
“호텔 컨시어지에 물어봤는데, 호텔 자체에서 보유한 렌트카가 있어서 바로 쓸 수 있다고 했어요.”
그녀는 한승이 당연히 갈 거라고 여기고 차편까지 미리 알아보았나 보다. 어쩌면 자신이 설득해야 한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이사벨 파리노드와의 만남을 주선했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 보건대, 그녀는 안타까운 사정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것 같다.
“도수아.”
그런 생각이 들자 비뚤어지고 싶어진다.
“누구라도 도왔을까? 아니면 나라서 이러는 거야?”
그녀가 단단한 가슴에 턱을 기대며 올려다본다. 눈빛이 형형하다.
“내가 그렇게 쉬운 여자로 보여요? 아무한테나 이렇게 해 주게?”
“난민한테 음식도 사다 주고 그러잖아.”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녀가 입을 쩍 벌렸다.
“빵 한 조각이랑, 이거랑 같아요?”
그녀가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팔을 풀어 내리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내가 얼마나 많이 고민했는지 알기나 해요? 내가 끼어들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고, 그런데 이사벨이 했던 말을 생각해 보면 그냥 물러설 수도 없고. 언제쯤 말해야 하나, 기분 좋을 때 말해야 하는데, 지금 기분이 백 프로 좋은 상황인 건가.”
한숨을 한 번 고른 그녀가 울분에 찬 목소리로 읊조렸다.
“괜히 이야기 꺼냈다가, 나랑 틀어지게 되면…… 그때는…….”
내내 당차게 이야기하던 그녀의 눈가에 삽시간에 맑은 물기가 고였다.
“그때는…….”
말을 잇지 못하고 그녀는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한승은 그녀의 턱을 부드럽게 잡고 끌어당김과 동시에 고개를 내려 그녀의 입술을 부드럽게 머금었다. 앙다문 입술을 혀로 핥으며 살살 달래자, 잇새가 슬쩍 벌어졌다.
말랑말랑한 입안을 훑고 들어가 정중하고 따뜻한 키스를 나누었다. 사과의 의미를 담은 부드러운 접촉에 그녀의 숨결이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입술을 슬쩍 떼어 내자, 그녀가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채로 가쁜 숨을 골랐다.
입술이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서 한승은 조용히 속삭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나는 너랑 틀어지지 않아.”
그녀는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가만히 끄덕거렸다. 부족하다. 그저 긍정의 대꾸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너는?”
그녀가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리며, 한승를 바라보았다.
“나도 무슨 일이 있어도. 셰프님 곁에 있을게요.”
고백 끝에 수줍은 미소가 자리했다.
한승은 그녀의 손을 잡고 호텔을 나섰다. 그녀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올라타자, 심장이 헤아릴 수 없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