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38화 (38/62)

#038

친모를 다시 마주하는 일은 어리석은 환상일지도 모른다고 여겼던 시절이 있었다. 아주 어릴 적, 아직 그녀가 전해 준 온기가 몸과 마음 곳곳에 남아 있을 때였을 것이다. 많이 그리웠던 것 같다.

당시에는 생생했을 기억들이 지금은 신기하리만큼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다정하게 차올랐던 우울감만큼은 내면 깊숙한 곳에 여전히 자리했다. 친모를 떠올릴 때면 따뜻했지만, 동시에 우울했다.

한승은 천천히 시선을 돌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구글맵과 도로 이정표와 좁은 길을 살피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내가 할까?”

대꾸도 할 수 없다는 듯이 빠르게 고개를 내젓는 그녀 때문에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대단한 사명감이라도 있는 것처럼 운전대를 움켜잡은 모습이 귀엽다.

“에즈까지 갈 수는 있는 거야?”

“자꾸 말 시키지 마요!”

그녀가 버럭 신경질을 냈다. 조수석 쪽으로 시선을 돌릴 여유조차 없는지 뾰족하게 부라린 눈은 여전히 앞 유리창을 향해 있다. 은근슬쩍 무거워지려고 했던 기분이 다시금 유쾌해진다.

구글맵에서 24분이 걸린다고 했던 거리를 무려 50분이 걸려서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멈춘 그녀는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 냈다.

“운전을 너무 오랜만에 해 봐서 그래요. 나 필기, 기능, 도로주행 전부 100점 맞은 트리플 크라운이거든요? 엄마가 예전에는 필기시험 100점 맞으면, 막 앞으로 불러서 박수도 쳐 주고 그랬다는데, 나는 아쉽게도 PC로 시험을 봐서 그럴 기회는 없었어요. 그래도 기능이나 도로주행에서 실수한 적 없어요.”

그녀는 한숨을 한 번 훅 빠르게 몰아쉬고는 말을 이었다.

“봐요! 지금도 잘하고 왔잖아요?”

한승의 입가에 의문 어린 미소가 번졌다.

“너 혹시.”

설마 싶었다.

“면허 따고 운전대 처음 잡은 거야?”

그녀가 혀를 날름 내밀어서 말라붙은 입술을 핥았다.

“내가 혹시나 몰라서, 운전할 일이 있을까 싶어서. 대사관 공증은 또 받아 놨잖아요?”

“딴소리하지 말고, 도수아.”

낮게 읊조리자 그녀가 어깨를 축 늘어 뜰이며 눈을 치뜨고는 한승을 바라보았다.

“들켰네요.”

“나 지금 내 목숨 걸고 여기까지 온 거야?”

“그래서 천천히 왔잖아요.”

“갈 땐 내가 운전한다.”

미간을 찌푸리며 읊조리자, 그녀가 미안한 표정으로 대꾸한다.

“내가 해 주고 싶었어요. 뭐든. 아무리 운전면허 따고 처음 운전대 잡는 거라도. 지금 셰프님 머릿속보다는 덜 복잡할 것 같았거든요.”

청량감 넘치는 맑은 목소리가 내뱉은 말에 한승은 그녀 쪽으로 상체를 숙였다. 동그란 이마에 입술을 가져다 댄 채로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폐부로 흘러들어온 향기는 한승을 들뜨게도 하지만, 지금만큼은 절대적인 안정감을 선사했다.

“이제 내려요.”

조용히 일깨우는 목소리에 한승은 입술을 떼어 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좁은 도로에 있는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우고, 그녀를 따라 걸었다. 그녀는 휴대전화 안에 있는 지도를 들여다보며 골몰했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서 50m.”

그곳에 친모가 운영하는 아틀리에가 있다고 했다. 혹시나 요리를 업으로 삼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녀의 손을 잡고 말없이 50m를 걸었다.

중세 지중해풍의 건물 앞에 서자 가슴이 빠듯하게 조여 왔다. 창가에는 여름날 보라색 꽃망울을 터뜨렸을 라벤더 화분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한때 아름다운 꽃을 피웠던 것처럼, 진한 향기만은 남아 심신을 위로하는 풀처럼. 서로에게 그렇게 남아 있는 존재였으면 했다.

가만히 서 있는 한승을 그녀는 조용히 기다려 주었다.

“들어가자.”

“같이요?”

그녀는 사뭇 놀랍다는 듯이 되물었다.

“왜? 언제나 같이 있겠다며?”

건조한 물음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는 바르르 떨리는 한승의 손을 꼭 잡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돌계단 서너 개를 올라, 주석으로 만든 문고리를 움켜잡고 돌렸다. 삐걱거리는 소리는 났지만, 문은 손쉽게 열렸다.

“Bon Soir.”

경쾌한 인사말이 들려오는 곳으로 한승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식탁으로 쓰면 10인용은 되어 보이는 테이블 앞에 앉은 여자가 콧잔등에 있던 안경을 머리 위로 밀어 올렸다.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짙푸른 니트 원피스를 입고 있는 여자는 까뜨린느 파리노드가 분명했다. 그녀는 일반 관광객을 대하듯 한승을 바라보았다.

한승이 한 걸음씩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섰다. 상냥한 미소가 드리웠던 친모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의자에서 천천히 몸을 일으킨 그녀가 단숨에 테이블을 돌아 나와 한승의 앞에 섰다.

그녀는 팔을 뻗어 한승을 와락 끌어안았다. 한승은 가만히 손을 올려 그녀의 마른 등을 다독였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몰라서 당황스러웠는데, 긴말이 필요 없어지는 순간이었다.

“Gabriel.”

조용히 속삭인 단어는 한승의 옛 이름이었다. 한승은 이름이 갖는 함축적 의미를 또다시 절감했다. 수아를 사랑이라 부른 것처럼, 그녀는 가브리엘이라는 이름에 지난한 세월만큼의 그리움을 담았다.

그녀를 어머니라 불렀던 시절을 한승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친모는 마치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애틋한 음성으로 가브리엘을 수없이 되뇌었다. 맞닿은 몸이 바르르 떨렸다. 이내 주저앉을 것 같은 그녀를 의자로 부축했다.

1인용 안락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그녀는 한승의 손을 잡은 채로 무너져 내렸다. 너무 갑작스럽게 찾아왔나 하는 후회가 들 만큼 그녀는 격한 감정을 토해 내느라 힘겨워했다. 한승은 그저 그녀의 손을 꼭 잡아 주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삐걱하는 소음과 함께 등 뒤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Mama?”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친모가 낳은 딸일까? 그럼 나와 아버지가 다른 남매가 되는 건가?

제 어머니와 한승을 번갈아 보던 아이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눈을 가늘게 뜨고는 물었다.

“Gabriel?”

한승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떠올랐다. 아이는 얼른 친모의 곁으로 다가와 몸을 낮추고는 눈물범벅이 된 그녀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사람이 오지 않았느냐고, 울지 말고 얼굴이라도 제대로 보라고 말하는 아이의 눈가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한승은 멍한 시선으로 아이를 바라보았다. 난생처음 만나는 타인이 저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 분위기가 생경하고도 기이한 동질감을 느끼게 했다.

친모는 딸아이를 따라 호흡을 여러 번 고른 후에 손수건으로 젖은 얼굴을 대충 닦아 내고는 한승을 마주 보았다.

“반가워, 내 아들.”

수백 번을 연습한 말인 것처럼 그녀는 젖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드리우며 읊조렸다. 친모의 무릎에 가만히 손을 얹은 아이는 눈시울을 붉히며 한승을 바라보았다. 친모가 재혼한 사람이 한국인인지, 아이의 얼굴에는 동양인의 외양이 섞여 있었다.

“아빠, 전화.”

아이는 한승을 배려하듯 단어만을 조합해서 한국어로 뜻을 전달했다. 친모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의 시선은 서로를 당기듯 바라보았다. 서로를 닮은 눈동자 안에 비친 모습도 놀랍도록 닮아 있었다.

역시나 얼굴만 보고 가는 것은 무리였다. 친모의 가족이 살고 있다는 곳으로 향하는 그의 곁을 수아는 묵묵히 지켰다. 그와 친모는 마주 앉아서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 모습을 수아는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서 바라보았다.

“오빠, 여자 친구?”

한국어를 드문드문 내뱉는 아이가 수아의 곁으로 다가서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수아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평생 제 인상이 차갑게 보이는 것을 걱정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의 여동생으로 보이는 아이 앞에 서자 괜한 긴장감이 밀려든다. 차갑게 보이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에 진한 미소를 머금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친동생. 아니에요. 나는. 입양아.”

한국에서 입양되어 왔다는 그녀는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는지 구김살 없는 미소를 머금으며 수아를 바라보았다.

“혹시. 언니. 오빠들. 알아요?”

“오빠들?”

그녀가 내민 휴대전화 화면 속에는 요즘 한창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아이돌 그룹의 사진이 있었다.

“응. 알아요. 노래 좋죠?”

그녀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자신의 뿌리가 맞닿아 있는 나라에서 온 수아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리고 어쩐지 그녀의 친근함에 가슴이 아렸다.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의 친모나 가족사에 대해 직접 털어놨던 적이 없었다. 이제껏 그리움을 드러낸 적 없는 사람처럼 지나치게 건조하기까지 했다.

알고 싶었을 것이다. 찾고 싶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을 만큼 아픔과 그리움을 삭이느라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이다.

방어적인 친절함.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본능적 선함도 작용했을 테지만, 만인에게 친절한 그의 태도는 철저히 방어적인 구석이 있었다.

수아는 방어적으로 굴기 위해 차가워지는 방법을 택했었다. 친절하게 구는 것보다, 차갑게 구는 게 더 용이했으니까. 어울리지 않는 편이 차라리 화를 피하는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누구하고든 잘 지내고 싶어 했다. 여행객들을 대할 때도 그의 태도는 변함없이 상냥했다. 그런 사람이라 가장 근원적인 곳과 맞닿아 있는 친모와의 관계 역시 고심했을 것이다.

그의 가족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알지 못하지만, 그 나름의 사정이 가슴깨나 아팠을 성싶다.

“엄마. 오빠. 많이. 보고 싶었어.”

아이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린다. 이 아이도 친부모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가슴이 묵직하게 가라앉아서 수아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아이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아이가 흠칫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따스한 미소를 머금는다.

“언니. 불러.”

아이가 손짓한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그와 그의 친모가 수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허락을 구하듯 물었다.

“잠깐, 이리 와 줄래?”

수아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들의 곁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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