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0
수백 번 입 맞추고, 수천 번 안고, 수만 번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부족하다. 그녀를 향한 마음을 표현하기에는 모든 게 역부족이다.
오늘의 만남은 그녀로 인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혼자였다면 절대 이곳에 오지 못했을 것이다.
한승에게 그녀는 평생에 갖지 못했던 용기였고, 앞으로의 시간을 위한 새로운 희망이 되었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두려움이었다.
만약 그녀와 앞으로의 삶을 함께할 수 없다면…….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바짝 조여들 만큼 끔찍했다.
한승은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려 그녀와 마주 보았다. 그녀는 열에 달뜬 얼굴로 한승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사랑해.”
잔뜩 부푼 마음이 툭 터져 나왔다. 그러니 앞으로 영원히 곁에 있어 달라는 마음을 담았다. 그녀는 한승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빤히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대꾸가 듣고 싶었다. 그녀도 저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가슴 떨리는 고백이 흘러나오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조심스러운 성격으로 짐작해 보건대 당장에 그런 말을 듣기는 어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몸을 탐하고, 마음을 섞기 시작했을지언정, 사랑이라는 말로 고백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고 여길 것이다.
“나는 셰프님이 어머니를 만나서 정말 기뻐요.”
그녀는 잔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상황이 안 좋게 흘러가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어요. 절대 그렇게 되는 일은 없게 해 달라고, 셰프님이 상처받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빌었어요.”
조금은 가라앉은 듯한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만약 나쁜 일이 생기면, 셰프님을 어떻게 위로해야 좋을지 계속 고민했어요.”
한승의 입가에 아련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런데 가족 모두가 셰프님을 반겨 주는 모습을 보니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좋았어요.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생각?”
“나는 이 남자의 행복을 바라는구나.”
그 행복 안에 네가 없으면 안 된다는 말을 하려고 했다.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구나.”
이어진 그녀의 말에 한승이 입이 슬쩍 벌어졌다.
“나도 사랑해요.”
세 글자의 짧은 고백을 그녀는 길고 긴 말로 대답해 주었다. 한승은 예쁜 말만 골라서 하는 입술을 머금었다.
이제는 온몸으로 그녀를 사랑할 차례였다.
그녀의 손이 한승의 셔츠 단추를 풀어 내려갔다. 한승은 어렵지 않게 셔츠를 벗어 던지고는 깊게 맞물린 입술을 떼 내며 그녀의 셔츠를 머리 위로 벗겨 냈다.
그녀가 크게 숨을 들이켜자 브래지어 위로 젖무덤이 탐스럽게 솟아오른다. 보드라운 살결을 입으로 부드럽게 빨아들이며 그녀의 등 뒤로 손을 뻗어 호크를 풀었다.
“하아.”
브래지어를 끈을 풀 때마다 그녀는 듣기 좋은 숨소리를 냈다. 이 소리가 다시 듣고 싶어서 속옷을 계속 벗겨 내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다.
한승은 손 안 가득 차오르는 가슴을 움켜쥐고 뾰족하게 솟아오른 유두를 이로 잘근잘근 깨물었다. 핑크빛으로 달아오른 유륜을 혀로 빙글 돌리자, 그녀가 골반을 들썩이며 한승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휘저었다.
“빨리. 으응?”
침대 위에서의 관계에 있어, 그녀는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원하는 바를 분명하게 이야기했고, 서툴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가감 없이 표현하는 그녀를 안는 것은 불가항력적인 이끌림이었다.
한승은 그녀의 뜻에 따라 푹 젖은 질구를 꿰뚫고 들어갔다. 그녀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히며 어금니를 꽉 물었다. 신음 소리가 밖에 들릴까 봐 걱정하는 듯했다. 쾌락 어린 소리가 새어 나가지 않도록 단속하는 모습은 그 어느 때보다 자극적이다.
파고든 물건을 쭉 잡아 뺐다가 다시금 깊이 찔러 넣었다. 그녀가 손을 뻗으며 안아 달라는 듯이 한승을 바라보았다. 한승은 곧추세우고 있던 상체를 내리며, 잘게 떨리는 몸을 끌어안았다.
그녀의 입술이 한승의 입술을 찾았다. 입안 가득 밀고 들어온 그녀는 남김없이 핥아 마시겠다는 듯이 간절하게 매달렸다.
한승은 온 마음을 다해 그녀를 끌어안고, 들쑤시고, 빨아 마셨다. 그녀의 모든 것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잘게 떨리는 부드러운 몸뿐 아니라, 뭉클 차오르는 고백을 해 왔던 마음과 그녀가 앞으로 살아갈 인생의 전부가 제 것이 되었으면 했다.
“흐으음.”
입안으로 익숙하고도 자극적인 신음이 흘러들었다. 꽉 맞물린 은밀한 내벽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의 절정을 끌어안으며, 한승도 그녀의 안에 모든 것을 쏟아 냈다.
후희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긴 여운을 만끽하며 축 처진 보드라운 몸을 끌어안았다.
사랑을 나눈다는 표현은 진부하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짐승처럼 몸을 섞는 짓을 너무 미화하는 것 아니냐고 비웃었었다.
그런데 섹스라는 행위 자체에 이렇게 깊은 의미가 실리게 될 줄은 몰랐다. 사랑을 나눈다는 말이 딱 적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평생 사랑을 나눌 상대는 그녀가 될 것이다. 아니, 모든 것을 나눌 상대가 그녀가 될 것이다.
한승은 무거워진 눈꺼풀을 내렸다. 의미 깊은 밤이 더욱 깊어 가고 있었다.
* * *
샤를 드골 공항 2 터미널 안은 언제나처럼 여행객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출국 게이트 앞에 선 한승은 애써 미소를 머금고 있는 그녀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정 지부장이 배웅 나오겠다는 것을 마다하고 그녀와 단둘이 공항으로 나온 참이었다.
“태민이랑 마리옹이 짐 옮기는 거 도와줄 거야.”
그녀는 태민이와 마리옹이 사는 집 근처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다. 그녀가 그 동네에 사는 것을 세현이 아는 이상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차올랐다.
“이제 두 달 후면 한국으로 오는 거지?”
이번에도 그녀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안 오기만 해 봐. 파리로 쫓아올 거다?”
“갈 거예요. 갈 거야.”
고작 두 달이라고 스스로를 달래 보려 노력했지만, 아쉽고 안타까운 것은 한승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막 뜨거워진 연인 앞에 두 달의 이별은 가혹했다.
“네가 잠깐씩 레스토랑 일 도와줄 거라고 하니까, 마리옹이 진짜 좋아하더라.”
아직 그녀의 집안 사정에 대해서는 자세히 듣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가 일을 계속 해야만 하는 상황인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다른 곳에서 일하는 것보다 태민의 레스토랑에서 일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어디서든 세현이 나타나는 상황을 배제해야만 했다.
“세현이 일, 태민이도 알고 있어.”
그녀가 흠칫 놀란 얼굴로 한승을 올려다보았다. 과거 뜬소문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걱정 마. 잘 이야기했어. 태민이도 잘 알아들었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제 혼자 견디지 않아도 돼.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꼭 말하고. 알았지?”
울고 있는 건지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꼭 군대 가는 기분이네. 이러고 있으니까. 군대보다 짧다, 두 달이면. 그렇지?”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이 픽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약속한 시간마다 전화할게.”
두 사람 모두 부엌을 오가는 셰프였기에 전화 통화를 할 시간도 미리 정해 두었다.
“전화 못 받는 상황이면 메시지 보낼게요.”
“한눈팔지 말고.”
“그런 거 할 줄 몰라요.”
그녀가 빙그레 웃었다. 보딩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이제 그녀를 품 안에서 놓아주어야 했다. 영영 이별하는 것도 아닌데, 가슴이 시리다. 만에 하나 그녀를 잃게 된다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얼른 가요. 이러다 비행기 놓치겠네.”
“그 핑계로 하루 더 있지, 뭐.”
“셰프님, 돈 많아요?”
무구한 그녀의 질문에 한승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앞으로 두 달 동안 매일 비행기 놓치고, 나랑 같이 있을래요?”
진지하게 묻는 말에 한승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앙증맞은 입술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추자, 그녀가 심각하게 읊조린다.
“진심인데.”
한승은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은 채로 웃었다.
“고마워.”
저 혼자만 불안한 줄 알았다. 그런데 그녀가 내뱉은 말이 발걸음을 뗄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공항으로 나 데리러 나와요. 꼭이요.”
“당연하지.”
“한눈팔지 말고요.”
“그런 거 할 줄 몰라.”
“잘 가요.”
“그래. 두 달 후에 한국에서 보자.”
“응.”
물기 어린 인사를 나누고 돌아섰다. 두 달은 금방, 무사히 지나가리라고 생각했다.
한승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녀에게 잘 도착했다는 말을 하려고 전화를 걸었다. 한국 시각 오후 5시, 프랑스는 지금 막 아침 9시가 되었을 터였다.
“아직 자나.”
파리에서의 마지막 밤이라는 핑계로 그녀를 밤새도록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아침까지 시달리다가 잠깐 눈을 붙이고 공항까지 따라 나왔으니 피곤할 만도 했다.
파리 현지 시각으로 오늘, 그녀는 태민과 마리옹의 도움을 받아 짐을 옮길 예정이었다. 한승이 파리에 머무는 동안 이사를 도우려고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귀국 일정을 조금 뒤로 미루고 그녀가 이사하는 것까지 보고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국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길, 손에 쥔 휴대전화가 부르르 진동한다. 반가운 마음에 확인했는데, 발신인은 그녀가 아닌 서형이다.
서형은 레스토랑을 두 개로 늘리던 시점에 고용한 셰프였다. 지금은 조리 작업을 하지 않고 식자재 납품처와 인사 관리, 재무 업무를 총괄하는 오피셜 셰프직을 맡고 있다.
“어, 왜.”
― 셰프님, 도착하셨죠?
“어. 방금.”
― 지금 주차장 막 들어섰거든요.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그래.”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는데도, 논의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라며 서형은 인천 공항까지 한승을 마중 나왔다.
한승은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에게 메시지를 남겨 두었다.
[일어나면 연락 줘. 보고 싶다.]
간결한 메시지를 보내고 쉴 새 없이 떠들어 대는 TV로 시선을 옮겨 갔다. TV 앞에 주르륵 놓인 의자에는 한승처럼 누군가를 기다리는 여행객들이 피곤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사망한 도진택 의원이 발견된 곳은 지역 의원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야산 중턱이었습니다. 도진택 의원은 변호사 출신으로 민생 현안을 다루는 일에 앞장서 왔습니다. 재소자 자녀의 생활 자립을 돕는 재단의 기금을 횡령하고, 재단을 통해 모 그룹의 비자금 세탁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기 시작하면서…….]
흘려듣는 뉴스 사이로 서형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