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41화 (41/62)

#041

“셰프니임! 완전 보고 싶었어요. 정말! 웰컴 백!”

‘차한승 셰프님의 귀국을 환영합니다!’라고 휘갈겨 쓴 A4 용지를 흔들며 서형이 요란하게 다가왔다. 한승은 시선 끌지 말라며 미간을 슬쩍 구겼다.

“가시죠, 셰프님!”

오늘따라 서형이 이상하게 야단법석을 떨어 댔다. 길고 긴 세월을 함께한 것은 아니지만, 4년 동안 깨어 있는 시간 대부분을 서형과 함께 보냈다.

서형은 눈치가 빠르고, 분위기 파악이 빠르고 계산이 빨랐다. 때와 장소에 따라 바뀌는 처세도 기가 막혔다.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하며 일수를 놓았다는 친모로부터 터득한 기술이라며 돈 냄새를 맡는 능력도 탁월했다.

한승에게는 없어서는 안 될 오른팔과 같은 존재였다. 한승의 사업 확장에 있어 서형은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언제나 최종적인 의사 결정은 한승의 몫이었다.

오늘처럼 서형이 야단법석을 떨어 대는 날이면, 한승이 결정해야 할 중차대한 문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다. 언젠가 서형은 한승이 결정을 내려 줄 때마다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흥분된다고 말했었다.

변태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 주었지만, 서형이 그만큼 저를 믿고 따른다는 의미라는 것쯤은 알았다.

“12월 레스토랑 대관 예약이 거의 다 마무리됐어요.”

“제일 큰 행사는?”

조수석에 올라타며, 이제 막 엔진 스타트 버튼을 누른 서형을 향해 물었다.

“비승 푸드 임직원 송년회요.”

평소와 같은 어조였지만, 서형의 말끝이 살짝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한승은 대꾸 없이 가만히 앞 유리창을 바라보았다. 서형은 말이 없는 한승의 눈치를 살피며 운전대를 꾹 움켜쥐었다.

“뭐 해, 안 가고?”

한승의 심상한 질문에 서형은 얼른 가속 페달로 발을 옮겼다. 공항로를 빠져나와 공항 고속도로를 달리는 동안에도 한승을 입을 꾹 다문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 라디오라도…….”

어색함을 못 견디거니와 한승이 입을 꾹 다물면 눈에 띄게 긴장하는 서형이 라디오 버튼을 누르고는 한숨을 훅 내쉬었다.

『……숨진 도진택 의원의 장례는 유족들의 뜻에 따라 비공개 가족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며…….』

한승은 한 달 사이에 겨울 냄새를 물씬 풍기고 있는 11월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있잖아요, 형.”

서형이 저를 형이라 부를 때는 문제가 꽤나 심각하다는 의미였다.

“그냥 빨리 말해. 뜸 들이지 말고.”

“비승 푸드 식품개발팀에서 제안이 왔어요. HMR(Home Meal Replacement: 가정간편식) 소비가 급증하면서 글로벌 제품 개발 중이라고요. 프랑스 가정식을 HMR 형태도 개발 가능할지 묻더라고요. 일단 셰프님이 한국에 계시지 않아서 나중에 답변하겠다고 해 놓았어요. 손질한 재료를 한 패키지로 파는 밀 키트(Meal Kit) 형태도 좋다고. 다각적인 검토 부탁한다고 하더라고요.”

“개발은 그 팀에서 하면 되는 거 아닌가?”

남 일처럼 되묻는 한승이 답답하다는 듯이 서형은 한숨을 꾹 누르며 대꾸했다.

“우리가 개발에 참여하면요, 우리 레스토랑 이름으로 판매가 되는 거죠. 형 이거요,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것 같아요. 비승 푸드에서 만든 한국식 HMR은 외국에서도 반응이 좋아요. 기존 HMR로 확보된 시장에 새로운 상품을 내놓는 거니까 성공 가능성도 비교적 높고요. 우리 레스토랑 이름으로 나간다고 하면, 글로벌 시장에 그 상품이 팔리는 거잖아요?”

경제적 논리를 따져 봤을 때, 마땅히 해야 할 일인지도 모른다.

“결정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서형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한승의 본가 앞에 도착할 때까지 입을 꾹 다물었다. 본가 앞에 차를 세운 서형은 한숨을 훅 몰아쉬며 조심스럽게 다시 말을 뗐다.

“오늘 부회장님이 이번 일 말씀하실 것 같아서요. 제가 형 얼굴 먼저 보고 말씀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공항으로 갔던 거예요. 그럼, 들어가세요.”

“그래, 고맙다.”

차에서 내린 한승은 굳게 닫힌 문 앞에 서서 크게 숨을 한 번 들이켰다. 아버지는 한승에게 본가로 오라는 말을 직접 하는 대신, 서형을 통해 전해 왔다. 아마도 한승에게 미리 귀띔을 해 주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서형은 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착실하게 업무를 수행한 거였다. 아버지의 움직임이 이제까지와는 결이 달랐다.

한승이 초인종을 누르자, 엷은 전자음과 함께 대문이 열렸다.

“어? 오빠 왔네.”

한승보다 열 살은 어린 여동생 한유가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한유는 대학에서 원예학을 공부하는 중이었고, 귀농이 꿈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어디 가?”

“아니. 오빠 올 시간 돼서 마당에 있다가 달려온 건데?”

배다른 오빠인 줄 알면서도 한유는 한승을 대하는 데 있어 스스럼없었다. 오히려 동복인 둘째 한도보다 한승을 더 잘 따랐다.

“한도는?”

“말도 마. 이번에 제대로 사고 쳐서 집이 아주 발칵 뒤집혔었어.”

한유는 한승에게 팔짱을 끼며 말을 이었다.

“작은오빠 결혼한대.”

“뭐?”

한도는 이제 스물일곱 살이었다. 요즘 세태로 보면 이른 결혼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사고 제대로 쳤다고. 오빠 조카 생긴다더라?”

한승의 입가에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미소가 자리했다. 어릴 때부터 공부만 했던 녀석이 꿈꾸던 직업은 사회학 교수였다. 갑자기 애가 생겨서 결혼한다는 말에 한승은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리고 또.”

“또 뭐? 이제 무서워지려고 한다?”

한승이 얼굴을 비스듬히 기울이며 한유를 내려다보았다.

“아빠가 오빠 회사로 불러들이려고 하시는 것 같아. 미리 각오는 하라고.”

이제껏 한승은 그룹 일에 관심이 없었다.

“오빠가 너무 잘난 게 문제야. 레스토랑 하나 정도 말아먹었어야지. 그렇게 전부 대박을 내 놓으니까, 아빠도 욕심이 생기지 않겠어? 오빠, 그냥 하나 말아먹어 버려. 그럼 아빠가 쉽게 포기하지 않을까?”

“한유야, 아빠가 뭘 포기해야 할까?”

정원 손질을 하고 계셨는지, 아버지가 목장갑에 묻은 흙을 탈탈 털어 내며 다가오셨다.

“우리 아빠가 잡초를 한 포기, 두 포기 정성스레 뽑으신다고.”

한유는 애교스럽게 내뱉고는 딴청을 피우며 먼저 집 안으로 내빼 버렸다.

“잘 다녀왔니?”

아버지의 물음에는 특유의 다정함이 배어났다.

“네.”

주름진 얼굴을 마주하자, 친모의 얼굴이 묘하게 겹쳤다. 친모를 만났던 일은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며 한승은 헤설픈 미소를 머금었다.

“뒷마당에 한유가 심어 놓은 채소가 꽤 실하게 자라더니, 이제는 애물단지가 되어 버렸어. 뒷수습도 제대로 못 할 거면서 무슨 일을 저리 많이 벌여 놨는지, 한유가 나를 닮았나 보다.”

아버지가 약한 소리를 할 때는 요구 사항이 있다는 의미였다.

“비승 푸드 이야기 듣고 오는 길이니?”

한승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식품 개발부터 시작하자꾸나.”

비승 푸드는 비승 그룹 계열 회사 60개, 지주회사체제 편입 회사 48개 중에 자산 총액이나 매출 이익 규모로 봤을 때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곳이었다. 조부께서 정미소를 시작으로 일궈 낸 사업체이므로 비승 푸드가 그룹의 모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가 해도 되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한 발짝 물러서 있는 게 마음이 편했다. 그런데 아버지는 한승을 중심에 세우려고 하셨다.

“고민 좀 해 보자.”

강요하는 법은 없었지만, 부담되는 것은 사실이다. 한승은 아무 말 없이 아버지와 마당을 거닐었다. 오후에 비가 왔는지 잔디가 축축이 젖어 있었다.

젖은 돌길을 거닐다 그녀를 처음 만났던 날이 문득 떠올랐다. 아직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늦잠이라도 자는 걸까. 그녀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한승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그려졌다.

* * *

“되도록 외부와의 연락은 피해야 합니다. 곧 도수아 씨와 어머님의 금융 거래 내역에 대한 수사가 시작될지도 모릅니다.”

“수사요?”

수아는 하얗게 마른 입술을 겨우 떼며 물었다. 그를 공항에서 배웅하자마자 비보를 접했다. 짐을 제대로 챙길 여유도 없이 서울로 날아왔다. 공항에 수아를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은 아버지의 비서관으로 일했던 이재윤이었다.

보좌관들은 지금 차례로 검찰 조사에 소환될 예정이라고 했다.

“아빠가 정말 그 일에 가담하신 건가요?”

장례식장으로 향하는 길, 비서관은 수아가 물은 말에 잠시 뜸을 들였다.

“지금으로썬 그 무엇도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럼, 아빠가.”

수아는 목이 메어서 잠시 숨을 골랐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믿으세요?”

이번에는 묵묵부답이다. 어찌 된 영문인지 엄마는 아버지의 부검조차 하지 않고 장례 절차를 진행했다.

“엄마한테 찾아왔던 사람은요?”

누군가 아버지를 죽이고, 자살처럼 위장되도록 엄마를 겁박했을지도 모른다는 무시무시한 생각에까지 이르렀다.

“제가 알기론 없습니다.”

수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이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장례식장에 가시면, 소란할 겁니다. 가족장이라고 해도 당내 인사와 당원들이 다녀갈 겁니다. 물론 재단 사람들도 올 거고요.”

억지로 두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면 그의 품에 안겨 있던 시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왈칵 눈물이 치솟았다.

“그리고 휴대전화 사용은 삼가시길 바랍니다. 저와의 연락은 이 전화를 통해서만 부탁드립니다.”

그는 수아에게 전화 통화와 문자 메시지만 주고받을 수 있는 2G 휴대전화를 건넸다.

“프랑스에서 쓰시던 휴대전화 갖고 계십니까?”

“네.”

“잠시 볼 수 있을까요?”

수아는 전원이 나간 휴대전화를 재현에게 건넸다.

“이건 제가 보관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님과의 통화 내역이나, 메시지를 추적한다는 핑계로 사생활 노출 우려가 있습니다. 혹시 수사를 받으시게 되면 휴대전화는 프랑스에 두고 왔다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말문이 턱 막혔다. 아버지는 죽어서도 수아와 엄마를 편히 두지 않으려나 보다.

장례식장에 도착한 시각은 밤 10시가 넘은 늦은 밤이었다. 엄마는 수아의 얼굴을 보자마자,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부검하자, 엄마.”

엄마가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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