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42화 (42/62)

#042

“수아야, 엄마는.”

엄마는 영혼이 모조리 빠져나간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제 아빠 일로 더는 시달리기 싫어.”

지긋지긋하다는 듯이 엄마는 치를 떨었다. 늘 아버지가 하는 일을 사랑하고, 존경한다고 했던 엄마였는데, 지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부검한다고 치자. 자살이 아니면? 엄마랑 네가 뭘 할 수 있는데? 네 아빠도 이 꼴을 당했는데, 너나 내가 똑같이 되지 않으란 법 있니?”

엄마는 극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핏발 선 눈은 형형했고, 부검 이야기를 꺼낸 수아를 경멸하듯 쏘아보았다.

“조용히 살자, 이제는. 우리 정말 조용히 살자. 아무것도 하지 말고.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울분 섞인 목소리로 말하는 엄마를 바라보는데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너무 매워서 눈물이 빨리 씻겨 내려가길 바랄 정도였다.

엄마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답답한 상황을, 아버지를 그냥 보내 드려야 하는 원통한 현실을, 남은 사람이라도 지키고 싶은 처절함을 저렇게 표현하고 있는 거였다.

수아는 곧 까무러칠 것만 같은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의 말이 다 맞기도 했다. 부검 결과가 타살이라고 한들, 수아와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두 모녀의 삶을 더 고달프게 만들고도 남았다.

“미안해, 엄마.”

수아는 엄마의 마른 등을 쓸어내리며 울음을 삼켰다. 이런 식으로 귀국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많은 걸 바라지도 않았다. 공항에 마중 나온 그와 애틋하게 재회하길 꿈꿨다. 엄마가 차려 준 저녁밥을 먹으며 그리웠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온기와 다정한 미소가 간절했지만, 이제는 애정이 담긴 그의 고요한 시선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목구멍이 꽉 막혀 오는 듯했다.

당장 한 치 앞의 삶도 가늠할 수 없는 마당에 남자를 떠올리고 있다니.

한심해서 화가 나고, 억울해서 눈물이 났다.

철없던 시절 우리 아버지는 왜 평범할 삶을 살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을 한 적 있었다. 지금은 왜 아버지는 죽음조차도 평범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을 조용히 덮고 싶어 하는 엄마의 심정이 십분 이해가 갔다. 엄마도 이제는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바라는 것이다. 세상이 두 모녀를 가만두지 않을 거라는 것을 엄마는 알아차렸고, 두려운 것이다.

“수아야.”

“응.”

“누구 연락하고 그러지 마. 친구들한테도 좀 나중에 연락하고. 응?”

“응.”

“프랑스에 있는 한국인들도 안 돼. 알지?”

“응.”

짧은 대꾸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누구도 믿지 말라는 말을 엄마는 힘겹게 이어 갔다. 엄마는 하다못해 외갓집 식구들조차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으로 당선되고 나서, 외가에서 엄마에게 이런저런 요구와 부탁을 했었다고 들었다.

그 과정에서 엄마는 친정을 잃었다. 아버지가 가슴에 금배지를 달고 활보하는 동안, 엄마와 수아는 가슴에 멍울이 졌다.

“잘될 거야. 엄마.”

수아는 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한스럽게 올려다보았다. 절망이 수아의 목덜미를 잡아채서는 진창으로 집어 던졌다. 부모를 잃은 상황인데, 마냥 슬퍼할 수가 없다.

앞으로의 삶이 준열한 눈빛으로 수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 * *

급기야 그녀의 휴대전화 전원이 꺼져 버렸다. 혹시나 그녀의 휴대전화에 문제가 있나 싶어서 태민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 어, 한승아.

“수아 이사 잘했어?”

아무 일 없을 거라 믿으며 심상한 어조로 물었다.

― 너 비행기에 있어서, 수아가 너한테 연락 못 했나 보다. 수아 한국 갔어. 집에 무슨 일 생긴 것 같던데?

그녀가 어시스턴트 일을 통해 얻은 수입으로 어머니 병원비를 부쳐야 한다고 했던 세현의 말이 뇌리를 스친다.

“무슨 일이라고는 말 안 하고?”

― 어, 표정이 안 좋아서 자세히는 못 물어봤지. 연락 안 돼?

태민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

― 좀 기다려 봐. 일 좀 정리되면 연락하겠지. 급하게 간 거 보니까, 걔도 정신없을 거야.

신경 써 줘서 고맙다는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쳤다. 대체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 한 통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 되는 걸까. 가슴이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비통한 순간을 외롭게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걱정돼서 아무것도 손에 잡히질 않는다.

정확히 3주가 지났다. 그녀의 휴대전화는 여전히 꺼져 있고,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보냈던 시간이 꿈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녀가 저를 저버렸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한승은 차분히 기다리기로 했다. 3주가 되도록 연락이 되지 않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겼다. 레스토랑은 차질 없이 운영되었고, 비승 푸드와의 일은 잠정적 보류 상태였다.

오픈 전, 레스토랑 창가를 내다보고 있는데 낯익은 얼굴이 레스토랑 안쪽으로 들어오는 게 눈에 들어온다.

“기시은?”

“선배!”

시은이 반갑게 웃으며 한승의 곁으로 다가왔다.

“언제 들어왔어?”

“어제요.”

추위 탓인지 시은의 콧잔등이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아예 들어온 거야?”

“아뇨. 잠깐 들어왔어요. 지나가다가 선배 있나 해서, 인사라도 하려고 들렀어요.”

혹시 제게는 없던 연락이 시은에게는 닿았을까?

“뭐 마실래?”

“따뜻한 거요. 감사합니다.”

시은은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직원에게 따뜻한 밀크티 두 잔을 가져오라고 한 뒤, 한승은 가만히 시은을 바라보았다.

“왜요, 선배?”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을 이상하다고 여겼는지, 시은이 눈썹을 슬쩍 올리며 묻는다.

“너 혹시.”

한승은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수아랑 연락돼?”

그의 안색이 좋지 않은 이유가 도수아 때문이었나 보다고 시은은 생각했다. 집에 일이 있다며 갑자기 한국으로 사라졌다는 수아와는 시은도 연락이 닿질 않았다.

“아니요.”

시은은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눈빛이 무겁게 가라앉는 게 느껴졌다. 감정을 알아차릴 수 없는 눈빛이었다. 수아를 체념한 것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수아 한국 연락처 같은 건 모르고?”

“네.”

“어머니가 아프시다고 들었는데.”

“유방암 수술하셨다고 들었어요. 올해 5년 차인데, 이번 검사에서 깨끗하게 나오면 완치라고 그랬었고.”

“그랬구나.”

어머니의 병환이 갑자기 깊어져서 한국으로 급히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연락하지 못하는 상황일 수도 있는 거다.

시은은 서빙된 밀크티 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쥐며 초조한 마음을 달랬다. 천천히 세현이 이야기를 꺼내야겠다.

“세현이가 사고 쳤다고 들었어요.”

자신과는 무관한 일이라는 듯이 시은은 무구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세현을 그곳에 보낸 거였지만, 일이 심각해질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세현에 관한 무지막지한 이야기는 마리옹에게서 전해 들었다.

어찌 되었건 그에게 오해를 사는 것은 싫었다. 수아가 연락 두절인 마당에 제게 기회가 오지 않으리란 법은 없었다.

“죄송해요. 그런 짓까지 저지를 앤 줄은 몰랐어요.”

시은이 고개를 떨구며 읊조렸다. 미안한 마음이 아닌, 그에게 미움 받을까 저어되는 마음에서 울음기가 배어났다.

“그 일은 잊자. 네가 세현이 놈한테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잖아.”

그는 가슴이 콕 찔릴 만큼 스산한 어조로 말했다.

“죄송합니다.”

“시은아. 부탁 하나만 하자.”

미안해하는 마음을 볼모로 삼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부탁이 무엇인지 대충 짐작이 가서 가슴이 찌릿찌릿했다.

“수아한테 연락 오면 알려 달라고요?”

그가 말을 꺼내기 전에, 시은이 먼저 물었다.

“어.”

시은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지금은 마냥 마음이 선하고 고운 후배의 모습이어야만 한다. 앞으로 프랑스로 돌아가기 전까지 수시로 그의 레스토랑에 들를 작정이다. 사랑에 배신당한 순간의 허허로움은 다른 사랑으로 채우면 그만이다.

오히려 그가 만인에게 친절한 보통의 상태일 때보다 다가가는 게 더 쉬울지도 모른다. 도수아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시은이었다. 그걸 빌미로 더 가까워질 수도 있는 거다.

아버지가 무슨 공직에 있다고도 들었는데, 그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수아는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사람은 시은이 유일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지만, 사실 제대로 아는 것은 별로 없었다. 그저 수아가 마음을 연 상대가 시은이어서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 짐작할 뿐이다.

수아가 좋은 후배임에는 틀림없었다. 성실함과 묵묵한 성질이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차한승을 가운데 놓고 나면 다르다. 오랜 시간을 마음에 품어 두었던 남자와 그저 단순히 기특하게 여기는 후배는 결이 다른 존재다.

시은은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분명히 정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 차한승이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들렀다는 핑계로 온 거여서 시은은 금방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빠듯하게 차올랐다. 시은은 그에게 줄 크리스마스 선물로 뭐가 좋을지 생각하며 경쾌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백화점을 코앞에 두고 횡단보도 앞에 다다랐을 때, 코트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울려 댔다. 모르는 서울 시내 전화 번호인데, 혹시나 그의 레스토랑인가 싶어서 얼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휴대전화 너머에서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여보세요?”

― 언니, 저 수아예요.

시은은 잠시 멍해져서 신호가 파란색으로 바뀐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수아에게 연락이 오면 꼭 알려 달라고 말했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른다.

“수아? 도수아? 너 어떻게 된 거야?”

물음에서 신경질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아마도 착한 도수아는 시은이 저를 걱정하는 마음에 날카로운 목소리를 냈을 거라고 여길 것이다.

“너 근데 내 한국 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 누가 알려 줬어요. 언니, 잠깐 저 좀 만나 주실 수 있어요?

시은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생겨서 그렇게 사라져 버린 건지 궁금한 마음 반,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반이었다.

“언제? 너 지금 어딘데?”

― 오늘 저녁 7시쯤에요. 여의도 쪽에서 봤으면 하는데, 언니 괜찮으세요?

수아는 늘 괜찮으냐고 묻는 습관이 있었다. 그렇게 묻는 수아의 목소리는 괜찮지 않은 것처럼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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