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43화 (43/62)

#043

자욱한 미세먼지 탓에 매캐해진 대기에서 습윤한 냄새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길, 드문드문 서 있는 가로등은 그마저도 고장이 났는지 불이 들어오지 않는 것도 있었다.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자, 목덜미를 타고 소름이 훅 끼쳤다.

“얘는 뭐 이런 데서 만나자고 해.”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휴대전화를 꼭 틀어쥔 시은은 약속 장소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수아가 만나자고 한 곳은 으슥한 골목길에 자리한 선술집이었다.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시은을 묘하게 쳐다보며 지나갔다. 파리에서 안전한 장소만 골라 다니던 수아답지 않게 치안이 좋지 않은 약속 장소였다.

헤매느라 10분이나 늦게 도착했는데도, 수아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질 않는다. 시은은 적당히 빈 테이블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제게 연락을 해 온 상황도 썩 달갑지 않은 마당인데, 약속 장소도 거지 같을뿐더러 늦기까지 한다.

주인으로 보이는 험상궂게 생긴 아저씨가 메뉴판을 턱 던지듯 놓고 가는 것을 바라보며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을 때였다.

“언니.”

구석에 앉아 있었던 사람이 다가오며 귀에 익은 목소리를 낸다. 시은은 놀라서 휘둥그레진 눈으로 검은색 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가오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몸에 잘 맞지 않는 커다란 검은색 점퍼와 검은색 야구모자만 눈에 설 뿐, 수아가 분명했다. 수아가 잘 입고 다니던 스웨터와 색이 약간 바랜 듯한 청바지, 하얀색 컨버스 운동화까지.

“어떻게 된 거야?”

수아는 어깨를 잔뜩 웅크리고 있었는데, 마치 그 상태로 몸이 굳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몸을 옹송그리는 데 익숙해진 것처럼 느껴졌다.

“언니 잘 지내셨어요?”

“너, 내가 한국에 온 건 어떻게 알았어? 내 한국 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모자 아래로 수아가 엷게 웃었다. 수척해진 뺨, 피곤한 듯 보이는 눈동자를 바라보며 시은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엄마 많이 아프셔?”

수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언니, 제가 하는 말…… 아무한테도 하시면 안 돼요.”

스러져 가는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절박함에 시은은 저절로 숙연해졌다.

“아빠가 돌아가셔서 한국에 급히 오게 됐어요.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에 빚을 좀 지셨는데, 그게 좀 문제가 생겼어요. 아빠 장례 치르고, 엄마가 쓰러지셔서……. 언니, 제가 지금 돈이 좀 급해요.”

어떤 대답을 내놓아야 할지 몰라서 시은은 재빨리 말을 잇는 수아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제가 정식으로 월급을 받거나 하면 다 압류될 상황인데, 엄마 병원비 때문에 돈이 급하게 필요해요. 혹시 언니, 현금으로 선금 받고 일할 수 있는 곳 있을까요? 부엌일이면 어떤 일이든 다 할 수 있어요.”

수아는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떠들어 댔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자면, 아버지가 남기고 간 빚을 수아가 떠안은 상황에서 엄마 병원비를 위해 급히 돈이 필요하다는 거였다.

빚쟁이들이 수아의 월급까지 노리고 있으니, 정상적으로 월급을 받는 것도 불가능하고 당장에 목돈도 구해야 하나 보다.

“얼마나 필요한데?”

“당장은 몇십만 원이라도 좋아요.”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파리 시내를 거닐며 웃고 떠들었던 게 불과 두 달 전의 일이다. 한승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기 전까지, 시은은 수아를 특별히 아꼈었다.

수아와 보낸 세월을 떠올리자 마음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시은은 지갑에 있는 현금을 몽땅 꺼내서 수아에게 건넸다. 몽땅이라고 해 봤자, 1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돈이었다.

“이거라도 일단 받아. 그런 일자리 구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야. 알지?”

“고마워요, 언니. 염치없지만 이거 정말 고맙게 받을게요. 저 이 돈 못 갚을지도 몰라요.”

“안 갚아도 돼. 한번 알아보기는 할게.”

“언니, 꼭 좀 알아봐 주세요. 저 안 그러면…… 정말 몸이라도 팔아야 할 것 같아요.”

건조한 목소리로 읊조린 말에 시은은 펄쩍 뛰며 수아를 나무랐다.

“얘는 못 하는 소리가 없어. 팔긴 뭘 팔아. 네가 왜!”

“지금 상황이 그래요.”

입꼬리는 올라가 있었지만, 수아의 눈은 눈물 없이 울고 있었다.

“암튼 알아볼게. 너한테 연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해?”

“제가 전화할게요, 언니.”

답답해서 한숨이 훅 흘러나왔다.

“너 근데 내 연락처는 어떻게 알았어?”

“아빠랑 같이 일하던 분이 알아봐 주셨어요.”

“그 사람은 지금 너 도울 수 있는 상황 아니고?”

“네.”

무슨 사고라도 치고 도망 다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언니 혹시 요즘 뉴스 본 적 있으세요?”

“뉴스는 왜?”

“혹시 죽은 국회의원 얘기 나오는 뉴스 보셨어요?”

“본 적 있는 것 같아.”

국회의원의 이름이 생각날 듯 생각나지 않았다. 시사에는 관심이 없을뿐더러, 정치와 관련한 이야기라면 질색이었다.

“죽은 국회의원이…… 저희 아빠예요.”

수아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것 같은데, 그걸 파헤칠 방법이 없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엄마가 쓰러지셨고, 빚쟁이들이 몰려와 수아는 쫓기듯 집을 나와 비서관의 도움을 받다가, 이제는 그마저도 어려워진 상황이라고 했다.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없이 사는 것처럼 초라하게 굴더니, 아빠가 국회의원이었다는 말에 묘한 색안경이 씌워졌다.

“휴대폰도 없는 거야?”

수아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시은은 가슴이 답답해지며 묘한 신경질이 나는 것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수아가 야속했고, 그런 수아를 또 돕지 못하겠다는 말은 꺼낼 수가 없어서 난감했다.

어설프게 착하고, 어설프게 못된 성격. 시은은 자조하며 입을 뗐다.

“어떻게든 살 방법이 있겠지.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며칠 뒤에 연락 줘. 나도 알아볼 만큼 알아볼게.”

사실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떤 상황에서든,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라는 시은은 복잡한 심경에 휩싸인 사람처럼 덧붙였다.

“그때, 세현이 일은 미안해. 사과할 기회가 없었네. 걔가 그럴 줄은 몰랐어.”

시치미를 뚝 떼자, 수아가 아니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니에요, 언니.”

착한 도수아는 제 일을 덜기 위해 보내 준 거 아니냐며 시은의 역성을 들었다. 마음이 묘하게 불편해진다. 시은은 밥이나 먹자며, 안주밖에 없는 메뉴에서 치킨과 홍합탕을 하나 주문했다.

음식을 먹을 때에도 우아하기만 했던 수아는 며칠 굶은 사람처럼 허겁지겁 음식물을 씹어 삼켰다. 안쓰러운 모습을 바라보는데, 연민과 함께 깊은 안도감이 동시에 일었다.

수아의 처지를 헤아려 볼 때, 앞으로 절대 차한승의 곁으로는 돌아가지 못할 듯싶다.

며칠 뒤, 시은은 일부러 고등학교 동창들과의 약속 장소를 한승의 레스토랑으로 잡았다. 그가 서울 시내에 운영 중인 레스토랑은 총 다섯 개였고, 요일에 따라 어느 레스토랑에 머무는지를 시은은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야, 기시은. 여기 비싸지 않아?”

“비싸도 이 정도는 살 수 있어.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

친구들에게 한턱내겠다며, 으스대는 시은을 향해 누군가 성큼 다가왔다.

“올 거면 나한테 미리 연락하지.”

셰프 가운이 아닌, 검은색 슈트를 입은 한승이 눈앞에 서 있었다. 등 뒤에선 친구 둘이 웅성거리는 게 느껴져서 우쭐한 기분이 들기까지 했다.

“어? 선배. 아니, 그냥 친구들하고 밥 먹으러 온 건데요, 뭐.”

“그래. 맛있게 먹고 가.”

당연히 그가 오늘 레스토랑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는 시은에게 심심한 인사를 건네고는 어디론가 바삐 걸음을 옮겼다.

“왔어요?”

시은에게 알은체를 하는 사람은 레스토랑 경영 전반을 맡고 있다는 서형이었다.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레스토랑을 오가며 서형과 시은은 제법 안면을 튼 사이였다.

서형은 누구하고나 잘 융화되는 성격이었고, 한승이 아끼는 후배라고 소개한 순간부터 시은에게 친근하게 굴었다.

“네, 선배 어디 가는 거예요?”

“아, 셰프님 부모님이 별채 쪽에서 식사 중이시거든요. 거기 가는 거예요.”

서형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는 비밀이라도 말해 주는 것처럼 굴었다. 그의 부모님이란 말에 시은의 시선이 마당을 가로지르는 그의 시원시원한 걸음걸이를 좇았다.

“창가 자리 괜찮죠?”

서형은 자신이 하는 일은 아니지만, 시은이니까 특별히 안내해 주겠다며 수선을 떨어 댔다. 이제껏 찾아왔던 여자 후배 중에 한승이 아끼는 후배라고 소개했던 사람은 시은이 처음이라며, 호감 가득한 시선으로 시은을 대해 주었다.

아마도 둘 사이에 무언가 끈끈한 감정적 공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눈치였다. 시은은 저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입가에 담았다.

서형이 안내해 준 테이블은 그의 부모님이 식사 중이라는 별채가 아주 잘 보이는 자리였다.

시은은 식사하면서 내내 별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이 뭐라고 떠드는 소리도 건성으로 들었다.

“어?”

마침내 별채 문이 열리고, 그가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부모님으로 보이는 두 사람이 나타났다.

시은의 시선이 향해 있는 곳을 바라보던 친구 하나가 다소 놀랍다는 듯이 읊조렸다.

“저 사람 비승 그룹 차용훈 부회장이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시은이 놀라서 되묻자, 친구가 어이없다는 듯이 대꾸했다.

“뉴스에 맨날 나와. 그 정도 상식은 갖자, 친구야.”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았다. 있는 집 아들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거대 기업 부회장의 자제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부모님과 함께 레스토랑 정문을 나선 이후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승이 절대 돈을 받지 말라고 했다며, 서형은 해사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시은과 친구들을 레스토랑 입구까지 배웅했다.

레스토랑을 나선 시은은 친구들에게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는, 도로 안으로 향했다. 마당을 가로지르는 서형을 붙들려고 하는데, 그는 전화 통화 중이다.

“어, 보조 주방 인원 충원 건으로 부탁했던 거. 어. 그래? 사람 구하기 정말 힘드네. 셰프면 다 칼 잡고, 불 앞에 서서 웍 흔드는 줄 아나. 그래. 알겠어요.”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기척을 느꼈는지, 통화를 마친 서형이 시은을 돌아보았다.

“저, 보조 주방에 사람 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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