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4
서형은 다소 놀란 눈빛으로 시은을 내려다보았다. 시은은 제멋대로 뻗어 가는 생각만큼이나 겁 없이 뛰어오르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한숨을 집어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일부러 엿들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죄송합니다. 오늘 살뜰히 챙겨 주셨는데, 제가 친구들 때문에 감사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아서, 다시 들어왔다가 우연히 들었어요.”
시은은 제가 가장 잘하는 장기를 빼 들었다. 모든 사람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는 것, 그것만큼 익숙한 것은 없었다.
“그래요? 뭘 따로 인사를 해. 안 그래도 되는데.”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머금은 서형은 시은을 기특하게 여기는 눈빛을 보였다.
“아까 우연히 통화 내용을 들었는데요. 제 동생이 지금 일자리를 구하고 있거든요.”
시은을 따라 셰프가 되겠다며 조리학을 전공으로 택했던 여동생은 지금 가수가 되겠다며 여기저기 오디션을 보고 다니느라 일할 생각이 없었다.
“동생이?”
“네, 전문대에서 조리학 전공했고요. 손이 야무져서 일도 잘해요. 요즘 일자리 구하기가 쉽지 않아서.”
“셰프님한테 부탁하죠, 왜…….”
그 얘기를 왜 자신에slakpw게 하는 거냐고 묻는 투였다.
“선배한테 부탁하는 건 특혜를 받을 소지가 있어서요.”
마치 특별한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줍게 대꾸하자, 서형은 알 만하다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서 나한테 몰래 부탁하는 거예요?”
“전반적인 경영 관리도 맡고 계시고, 보조 주방 사람 구하기 힘들다고 하시고, 제 동생은 일자리 구하고 있으니까요.”
시은은 선한 미소를 머금으며 서형을 올려다보았다. 서형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명함 지갑을 꺼내고는, 그 안에서 명함 한 장을 빼서 내밀었다.
“거기 이메일 주소로, 이력서 보내 줘요. 형식적으로라도 면접은 봐야 하니까.”
“아……. 혹시 면접을 한승 선배가 직접 보나요?”
“아뇨. 보조 주방까지는 셰프님이 관여 안 해요. 왜요? 셰프님이 봤kjmdm으면 좋겠어요?”
“아뇨, 아뇨!”
시은은 손사래를 치며 제 동생이 여기에서 일하게 되더라도, 비밀로 해 줬으면 좋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동생인 줄 알면 더 잘 챙겨 줄 텐데요?”
“그런 특혜는 받고 싶지 않아서요. 동생이 좀 오냐오냐 자라서, 바닥부터 배웠으면 싶거든요. 그리고 여기 셰프님이 누군지도, 동생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보조 주방은 따로 있다고 들었는데…….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만, 제 선배라는 걸 알면 또 애먼 생각 할까 봐서요.”
서형은 동생을 대하는 마음이 기특하다는 듯이 웃었다. 시은은 잘 부탁한다는 말을 한 번 더 하고는 레스토랑을 나섰다.
뜻밖의 수확이었다. 시은이 아는 한, 두 사람의 상황은 현재 극과 극을 달리고 있다. 재단 기금 횡령과 재벌 비자금 비리로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고 죽은 국회의원의 딸 도수아, 국내 최대 재벌 기업의 아들 차한승. 두 사람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나 다름없었다.
시은은 두 사람의 관계가 완전히 끝나는 과정을 조용히 지켜볼 생각이었다. 동생의 신분을 빌려 수아를 취직시킬 것이다.
수아는 자신이 취직한 레스토랑이 누구의 소유인지 수일 내로 알게 될 것이다. 아니, 일을 시작한 날부터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그만두지 못할 것이다. 당장에 먹고 죽으려고 해도 없는 돈을 벌려면 뾰족한 수가 없으니 말이다.
또 그도 언젠가는 자신의 보조 주방에 숨어든 수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가 운영하는 레스토랑인 줄 알면서도 숨죽인 채로 돈을 벌고 있는 수아의 상황을 모조리 알게 되는 날은 꽤 충격적일지도 모른다.
두 사람이 잘될 리는 만무했다. 시은은 두 사람의 이별은 지켜본 후에, 한승에게 천천히 다가갈 계획을 세웠다.
수아를 돕고 싶었는데, 방법이 이것뿐이었다고.
수아가 신분을 숨겨야 하는 상황이어서, 나는 내 동생의 신분까지 빌려서 그 아이를 도왔다고.
시은의 입가에 찬웃음이 번져 갔다.
* * *
수아는 시은이 전해 준 이력서를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나이가 같은 시은의 동생 이름은 기시아였다. 수아와 묘하게 이름까지 비슷하다며 시은은 선하게 웃었다.
시은에게 고맙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는지 모른다. 당장에 선금을 받을 수는 없지만, 월급이 아닌 주급이어서 일주일을 일했더니 적지 않은 돈이 입금되었다.
시은은 돈을 바로 뽑아 쓸 수 있도록 체크카드까지 마련해 주었다. 언젠가 시은에게 진 빚을 꼭 갚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수아는 보조 주방 조리대 앞에 섰다.
수서역 근처 새로 지은 고층 빌딩의 16층에 보조 주방이 자리하고 있었다. 서울 모처의 레스토랑 콜드 키친에 들어갈 재료를 담당하는 곳에 배치된 수아는 선임이 시키는 일에만 집중했다.
이곳에서 다듬어진 식재료가 정확히 어느 레스토랑으로 들어가는지 알아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말을 섞어서 좋을 게 없었다. 신분을 빌린 탓에 거짓말을 들키지 않으려면 말을 줄여야 했다.
언제까지 빌린 신분으로 일할 수 있을까?
당장 오늘을 살아가는 것도 버거운 마당에 내일을 생각하기란 어려웠다.
보조 주방의 일은 크게 어려울 게 없었다. 직원 복지가 좋은 편이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도 수더분했다. 말수가 적은 수아에게 일부러 말을 붙여서 곤란하게 하는 사람도 없었다.
묵묵히 식재료에만 집중하는 시간이 수아에게는 숨 쉴 틈이 되어 주었다.
수아는 보조 주방 일을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부터 가장 마지막에 퇴근했다. 마지막 정리까지 끝낸 뒤에는, 주방에 딸린 직원용 욕실에서 몸을 씻어 냈다. 엄마가 있는 병원의 보호자 대기실에서 쪽잠을 자야 하기에 샤워는 병원 보호자용 세면실과 주방을 오가며 번갈아 했다.
일주일 치의 주급을 받고 나니, 막막했던 상황이 조금씩 정리되어 가는 기분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나아질 거란 생각이 들자,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콧등이 따가울 만큼 서러움과 그리움이 단번에 치솟았다. 그와 한국에서 만나기로 했던 날짜에서 벌써 2주일이 지나 있었다.
한 번만 보고 싶다. 딱 한 번만.
보고 싶고, 안고 싶고, 안기고 싶고. 그를 향한 그리움이 온몸을 휘감았다.
수아는 작은 수건으로 몸을 닦아 내다 말고 웅크려 앉았다. 전신을 뒤덮은 서글픔에 심장이 휘청거려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버텨 낼 수 있을 거라고 마음을 굳게 먹었었다. 엄마라도 살려야 한다고 이를 악물었었다. 그런데 수중에 돈이 조금 생기고, 세 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고 나니, 허허로웠던 마음이 단숨에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를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믿을 수 없는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평생의 행복을 끌어다 그를 만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삽시간에 빠져들었고, 서로가 하나인 것처럼 사랑했다.
꿈결 같았던 나날들이 야속하게 되살아났다. 그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들자, 아빠가 죽었을 때보다, 엄마가 쓰러졌을 때보다 더 절망스러웠다.
수아는 따갑게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 내고, 무릎을 폈다. 물기가 가시지 않은 허벅지에 소름이 돋아났다.
그깟 마음 접자, 수아야. 겨우 한 달이었어. 잊자. 잊어버리자. 잊을 수 있어.
떠올리지 마. 생각하지 마.
한숨을 몰아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러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에게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을 안 해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덮쳐 온 상황은 수아에게 그러지 말라고 다그치고 있었다.
그에게 짐이 되거나, 그가 자신을 불편해하는 시선을 받거나.
상황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모두 견딜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저 좋았던 기억을 간직하고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도, 그 사람도.
보조 주방 보안 시설을 작동시키고 문을 닫은 뒤, 엘리베이터 앞에 섰는데 가방 속에 넣어 둔 휴대전화가 진동하기 시작했다. 비서관과 변호사만 알고 있는 번호였기에, 전화를 걸어올 사람은 뻔했다.
“여보세요?”
― 도수아 씨, 잠깐 통화 괜찮아요?
“네, 말씀하세요.”
수아는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한참 떨어진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굳게 닫힌 비상계단 문 앞 모퉁이에 선 수아는 휴대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 재산 상속에 대한 한정 승인을 진행하려고 합니다.
아빠가 남기고 간 얼마 되지 않는 재산 안에서만 빚을 탕감하겠다는 법적 절차가 한정 승인이라고 했다.
재산이라고 해 봐야 빚쟁이가 들어앉아서 갈 수 없는 작은 아파트와 엄마가 몰고 다니던 아빠 명의의 차 한 대, 지급이 정지된 통장에 있는 푼돈이 전부였다.
그래도 한정 승인을 하면 모든 채무를 지지 않아도 되기에 생활이 수월해질 거란 설명이었다.
비서관이 소개해 준 변호사는 그동안 아버지와 관련한 다른 일을 처리하느라 연락이 늦었다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 한정 승인과 상속 포기 절차를 거치면, 의원님이 진 빚은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문제는 엄마 앞으로 진 빚이었다.
― 일단 이 건부터 해결하고, 어머님 문제 살펴보는 거로 하죠.
수아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통화를 마쳤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빠가 남기고 간 빚은 대략 30억이 넘었다. 여기저기서 빚쟁이들이 속출했고, 차용증을 쓴 적 없어서 억울하다며 수아의 머리채를 잡는 사람도 있었다. 억울한 것은 수아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끝내 엄마 앞으로 돈을 끌어다 쓴 것은 죽기 직전의 일이었다고 한다. 이번 일이 잘 풀리면 좋겠다며 희망차게 웃었다는 아빠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게, 수아는 아직도 믿기질 않는다.
엄마 몫의 빚은 아빠가 남기고 간 액수에 비하면 적었지만, 마이너스 통장 1억 5천만 원을 갚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병원비를 대고, 월세로라도 집을 구하고, 돈을 갚아 나간다고 해도 10년은 족히 걸릴 것 같았다.
한숨을 몰아쉬는데, 저 멀리 멈춰 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두 사람이 보조 주방이 있는 쪽으로 향하는 게 눈에 들어왔다. 수아는 우뚝 선 채로 두 남자를 바라보았다.
센서 등이 꺼진 어두운 복도 끝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아마 다들 퇴근했을 거예요. 셰프님 이렇게 암행하는 거 알면 다들 기겁할 텐데.”
재미있다는 듯이 웃는 사람은 자신의 면접을 봤던 서형이었다.
“잔말 말고 문이나 열어.”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속삭이는 사람에게서 그리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