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45화 (45/62)

#045

신은 가장 잔인한 형태로 수아의 곁에 머무는 듯했다.

그의 얼굴을 한 번만 보았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게 불과 10분 전의 일이다. 마치 그 간절함의 발현처럼 그가 눈앞에 나타났다. 하지만 수아는 발목을 붙잡히기라도 한 것처럼 한 발짝도 떼지 못했다.

조금만 더 목소리를 내 주기를 바랐건만, 그와 서형은 조용히 보조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린 수아는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은이 겨우 일자리를 구했다며 소개해 준 곳이 그의 레스토랑 보조 주방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서러움, 분노, 자괴감, 처량함. 복잡한 감정이 한꺼번에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시은을 탓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일자리를 구해 준 것만으로도 마냥 고마워해야 하는 처지였다.

그렇다면 그는, 내가 이곳에서 일하는 걸 알고 있을까?

갑자기 정수리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정신이 확 들었다. 만약 모든 상황을 전해 듣고도 그저 일하도록 둔 거라면, 관계의 완전한 종료를 의미했다.

그도 저를 그리워하고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버텼다. 언젠가는 웃으며 그를 만날 수 있는 날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도 했었다.

헛꿈이었다. 모든 게 이루어질 수 없는 헛꿈이었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자. 그리고 깨끗하게 마음을 접자. 이제 저 남자는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남자다.

수아는 그리 다짐하며 비상계단 문을 열고 계단으로 나갔다.

빠끔히 문을 열어 둔 채로 30여 분을 기다렸을까.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만 슬쩍 내밀어 보았다.

“지난번에 왔을 때보다 훨씬 깔끔해졌네.”

사무적인 그의 목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것이었다. 그의 짧은 음성에 심장이 둥둥 아프게 울려 댔다.

“그렇죠? 시은 씨 동생이 일을 잘해요. 며칠 전부터 마지막 정리는 시은 씨 동생이 한다고 하더라고요.”

“누구?”

서형의 말에 그의 목소리가 살짝 튀어 올랐다.

“아, 말하지 말랬는데……. 시은 씨가 동생 취업을 셰프님 몰래 부탁해서 지금 보조 주방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는 아무런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안도의 한숨이 가늘게 흘러나왔다. 제가 그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저 기시은의 여동생이 취직했다고만 지금 전해 듣는 중이었다.

“한번 만나 보시겠어요?”

서형의 물음에 수아의 심장이 바닥으로 쑥 미끄러졌다.

“아니. 일 잘하면 됐지, 뭐. 보조 주방 사람 구하기 힘들어서 고생했는데, 잘됐네.”

그는 심상하게 내뱉고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고 나자, 복도에는 적막이 감돌았다. 수아는 한참을 비상계단에 서 있다가 겨우 복도로 발을 내디뎠다.

서글픔이 전신을 짓눌렀다. 뾰족하고도 분명한 슬픔이 가슴을 마구잡이로 찔러 댔다.

그동안에는 얼굴에서 감정을 지우는 법을 익히며 살아왔는데, 이제는 가슴으로 감정을 느끼는 것에도 무뎌져야겠다고 생각하며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서 언제까지 일할 수 있을까? 그와 마주치게 되면 완전하게 끝난 관계를 두 눈으로 확인하고 물러나야 할까?

돈 몇 푼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기가 막혔다.

먼저 돌아서야지. 미련 갖지 말고 먼저 마음을 접어야지.

악관절이 저릿하도록 이를 악물었지만, 눈시울이 젖어 드는 것은 막을 수가 없었다.

* * *

서울 시내에 자리한 다섯 개의 레스토랑 중 2년 전 성수동에 새로 오픈한 레스토랑의 규모가 가장 컸다. 한 채의 본관과 두 채의 별관, 별도의 주방 시설 건물로 이루어진 레스토랑은 가운데 중정을 둔 구조를 취했다.

중정에서 뒷마당으로 들어가면 본관과 이어져 있는 별도의 주방 시설이 나타났다. 메인 주방은 본관에 있었고, 별도의 주방 시설은 부처 키친(Butcher Kitchen)으로 매일 들어오는 육류와 가금류, 어패류의 손질이 이루어졌다.

“메인이 오후 6시 반부터 서빙될 예정이고요. 오늘 방문하는 인원은 총 150명입니다. 비승 푸드 임직원 가족 모임이니 각별한 주의 부탁합니다.”

부처 키친 수 셰프(Sous chef)의 설명이 끝나자, 모두들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늘은 보조 주방의 인원 중 일부도 성수동 레스토랑으로 업무 보조를 나와야 했다. 그중에는 수아도 끼어 있었다.

“오늘처럼 유난 떠는 건 처음 보네.”

보조 주방 수퍼바이저가 조용히 읊조린 말에 함께 닭 다리 살을 다듬던 셰프 중 하나가 비밀스러운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낮추며 대꾸했다.

“비승 푸드라잖아. 유난 떨 만하지.”

“비승 푸드가 뭐? 우리 레스토랑에서 기업체 임직원 모임 하는 게 한두 번인가?”

“아, 얘 참 답답하네. 비승 그룹 부회장이 우리 그랜드 셰프님 부친이잖아.”

수퍼바이저가 칼과 고깃덩어리를 도마 위에 올려 두고는 휘둥그레진 눈으로 마주 선 동료를 바라보았다.

“누가 어디에 뭐라고?”

두 사람 곁에 서서 보조를 맞추던 수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옆 조리대에서 해머로 고기를 두드리는 소리가 쿵쿵 울릴 때마다 심장도 쿵쿵 뛰어 댔다.

“비승 그룹 창업주, 직계 손자라고요. 우리 셰프님이. 그래서 비승 푸드에서 이번에 우리한테 업무 협약 맺자고 한 거래. 증권가 찌라시에 3세 경영 시작할 거라고 소문이 파다해.”

“그놈의 주식은 맨날 말아먹으면서, 어디서 헛소문만 듣고 와서는.”

“진짜라니까. 비승 푸드가 비승 그룹 시발 회사야. 그래서 다른 계열사는 다 다른 사람 손으로 키워도, 비승 푸드는 직계 자손이 맡게 하라는 게 지금 몸져누워 있는 회장님 뜻이었대. 셰프님이 거기 맡게 될 거라던데?”

조리용 칼로 닭 다리 살을 요령 있게 발라내며 떠드는 셰프의 말에 수퍼바이저는 고개를 갸웃거리기만 했다. 그러면 레스토랑은 어떻게 되는 거냐, 대기업 소속이 되는 거냐, 여러 말이 오가는 동안 수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 시아 씨. 어디 아파? 안색이 왜 그래?”

수아는 저를 가리키는 줄도 모르고 수퍼바이저가 건넨 손질된 닭 다리 살을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머릿속은 그의 배경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버렸다.

그의 어마어마한 배경에 주눅 들었던 것도 잠시,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가슴이 뜨끔거렸다.

아빠가 관여했던 재단을 통해 비자금을 세탁한 회사로 의심되는 목록에 비승산업개발이라는 국외 전용 개발 회사가 있었던 게 기억이 났다. 건실한 기업 이미지를 쌓아 온 비승 그룹의 골칫거리라는 뉴스도 보았다.

“시아 씨, 어이, 기시아 씨.”

급기야 수퍼바이저가 비지땀을 흘리고 있는 수아의 어깨를 툭 치고 나서야 수아는 모두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와. 이런 일은 처음이지?”

어마어마하게 쌓인 고깃덩이를 보고 질렸다고 생각했는지, 수퍼바이저는 5분만 쉬고 오라며 수아를 마당으로 내몰았다.

뒤뜰로 나선 수아는 투명한 플라스틱 마스크를 벗고는 크게 숨을 들이켰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를 밀도 높게 치고 들어와 따갑게 박혔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생각을 멈추고 싶었다.

몸이 고되고, 극한 상황에 내몰려 있는데도 여전히 그와 자신의 관계를 따져 보고 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아직도 못 잊겠니? 왜 그렇게 포기를 못 해. 비승 그룹 손자면, 쳐다보지도 못할 나무였네.

수아는 나뭇잎이 모조리 떨어진 아름드리나무의 앙상한 우듬지를 올려다보며 한숨을 몰아쉬었다.

“어머, 이게 누구야? 도수아 셰프님 아니야?”

갑작스럽게 들려온 제 이름에 수아는 흠칫 놀라서 돌아섰다.

“우리 기억나요? 왜 그때 투어에서.”

당연히 기억한다. 보르도 샤토에 세현이 나타났을 때, 투어에서 일찍 복귀해 수아를 곤경에서 구해 주었던 40대 동창 일행이었다.

“안녕하세요?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우리 그때 이후로 차한승 셰프님 팬 돼서, 여기 자주 와요. 이렇게 보니까 너무 반갑다.”

두 사람은 살가운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보며 웃었다.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그럼, 그럼. 우리 도수아 셰프님은 여기서 무슨 일 해요?”

“저는 보조 주방에 있어요. 아직 어려운 일은 못 해요.”

“아이고, 고생이 많네. 그렇게 배우면서 큰 셰프님 되고 그러는 거지.”

막내 이모뻘쯤 되는 두 사람은 수아의 어깨를 다독여 주기까지 했다.

“저, 그럼 이만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서요.”

“그래요, 얼른 들어가 봐. 반가웠어요. 우리 기회 되면 또 봐요.”

살갑게 인사하고 돌아서는 등 뒤로 두 사람이 정답게 나누는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그랬잖아. 셰프님이 수아 씨 마음에 두고 있다고. 눈을 못 떼던데, 뭐.”

“그러게. 여기서 일하는 거 보니까, 그랬나 보네.”

두 사람은 수아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며 평소처럼 수다를 떨어 댔다.

“아가씨가 참 참해. 우리 아들이 다섯 살만 많았어도, 며느리 삼겠어.”

“에이, 그 집 아들 이제 겨우 열일곱이야.”

친구와 투덕거리는 게 즐거워서 목소리가 날아갈 듯했다.

“아, 왜? 요즘 연하남이 얼마나 인긴데? 우리 아들이면 저 셰프님도 혹할걸?”

“그 집 아들이 잘생기긴 했어도, 저 셰프님한테는 우리 차 셰프님이 있는데…….”

“어떤 셰프님한테 제가 있나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두 중년 여인은 얼굴을 붉히며 돌아섰다.

“우리 셰프님, 이제야 만나네요. 바쁘시죠?”

한승은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녀 같은 손님들을 내려다보며 마주 웃었다.

“오늘 저녁에 단체 예약 건이 있어서 정신이 없네요. 식사 맛있게 하셨어요?”

“네, 맛있게 했지요. 앗, 참! 그때 그 아가씨 프랑스에서 공부 마치고 여기 취직했나 봐요?”

“아가씨요?”

어리둥절하게 묻는 말에 두 여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음흉하게 웃는다.

“우리 셰프님 부끄러우셔서 시치미 떼시는 것 좀 봐.”

“얼마나 안달이 나셨으면, 프랑스에서 여기까지 불러들이셨을까나.”

“아무리 서로 좋은 사이라도 아래부터 차근차근 배우게 하는 게 보기 좋고 예쁘지, 뭐.”

“지금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한승의 심장이 걷잡을 수 없이 빠르게 뛰어 댔다. 가슴이 뒤틀리는 듯한 통증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프랑스에서 불러들인 셰프? 아가씨?

“도수아 셰프요. 방금 여기 서 있다가, 저 문 안으로 들어갔는데?”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것처럼 얼얼했다.

“누가 어디로 들어갔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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