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6
“어머나, 우리 셰프님 시치미 떼시는 것 좀 봐.”
두 사람은 한승이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며 놀리듯 말을 얹고 있었다. 그들의 어지러운 대화가 더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심장이 끝없이 팽창에서 귓구멍까지 부풀어 오른 듯 멍해졌다.
한승은 두 사람에게 흐트러짐 없이 인사를 건네고는 부처 키친 쪽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서 경련이 일 것만 같았다.
잘못 봤겠지. 여기 있을 리가 없잖아?
한승은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한 번 내젓고는 문 앞에 섰다.
“셰프님, 여기서 뭐 하세요?”
저녁 단체 예약객을 위한 일정 확인을 하고 돌아다니는지 태블릿 PC를 손에 든 서형이 다가오며 한승의 안색을 살폈다.
“어디 안 좋으세요?”
서형을 마주하자, 불현듯 기시은의 여동생이 보조 주방에 들어왔다는 사실이 머릿속을 스쳤다.
“기시은 여동생, 이력서 있어?”
“지금요?”
한승은 아주 살짝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평소 보기 힘든 한승의 냉랭한 태도에 서형은 바짝 긴장한 얼굴로 태블릿 PC를 내밀었다.
이력서에 적힌 이력은 기시은의 여동생 기시아의 것일지 모르지만, 파일 상단에 자리한 얼굴은 도수아였다.
한승은 어금니를 꽉 사리문 채로 깊게 숨을 내쉬었다. 한 달 넘게 연락이 두절되어 속을 다 문드러지게 했던 여자가 버젓이 제 주방에 들어와 있었다.
태블릿 PC를 서형에게 넘겨준 한승은 부처 키친 문을 활짝 밀고 들어갔다. 기세등등한 등장에 재료를 손질하던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한승을 향했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도수아가 서 있었다. 머리카락 한 올 드러나지 않게 하얀 모자를 눌러쓰고, 투명한 플라스틱 마스크를 입가에 드리운 수아가 놀라지도 않은 눈으로 한승을 바라보았다.
꿈인가 싶어 제 뺨을 후려갈겨 봐야 하나,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녀는 이내 시선을 내리며 수퍼바이저가 건네는 닭 다리 살을 정리하는 데 열중했다.
한승은 일의 진척 상황을 확인해 볼 요량으로 방문했다는 듯이 부처 키친을 한 바퀴 돌아본 후에 유유히 밖으로 걸어 나왔다. 직원들 눈에는 단체객 때문에 다소 예민해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하지만 뒤따르는 서형만큼은 지금 상황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을 직감했다.
“셰프님. 기시은 씨 동생한테…… 무슨 일이라도.”
“서형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부탁 하나만 하자.”
이제껏 비겁한 방법을 쓰지 않은 것은 그녀를 믿었기 때문이다. 맑은 웃음과 애정을 담뿍 담은 눈빛을 가진 그녀를 존중하고, 자존심 강한 그녀의 치부를 지켜 주고 싶었기에 하지 않았던 짓이었다.
그녀가 언젠가는 웃으며 제 품으로 돌아올 거라 믿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굶주린 쥐새끼처럼 주방에 숨어들어 있는 꼴을 보니 가슴이 뒤틀렸다. 믿을 수 없는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사람 하나 좀 알아봐.”
“누구, 요?”
서형이 한승의 곁으로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한승은 서형에게 수아의 간략한 정보를 건넸다.
“오늘 저녁 단체 받기 전까지. 알아낼 수 있는 건 다 알아내.”
레스토랑을 운영하다 보면 별의별 일을 다 겪게 된다. 그 덕에 서형이 긴밀하게 연락하는 흥신소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녀를 향해 부정한 방법을 쓰고 싶지 않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정의를 내세울 필요는 없어 보였다.
저녁 5시 50분, 단체 예약객 중 성미 급한 일부가 이미 도착해서 홀로 안내를 받고 있을 시각이었다. 서형이 어두운 얼굴로 메인 키친 그릴 앞에 서 있는 한승에게 다가왔다.
“셰프님. 잠시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입에 담을 수 없는 말인지 바쁜 와중인데도 서형이 한승을 불러냈다. 두 사람은 메인 키친 바로 오른편에 있는 한승의 사무실로 들어갔다.
“기시아 씨가 도수아 씨인 거죠?”
둔탁한 소음과 함께 문이 닫히자마자 내뱉은 서형의 말에 한승은 대꾸하지 않았다.
“그냥 제 느낌이 그래서 물어본 거예요. 그렇게 되면 상황이 좀 심각할 것 같아서요. 혹시 형도 도진택 의원이랑 관계된 건 아니죠?”
“도진택 의원?”
한승의 되물음에 그건 아니라는 대답이 되었는지, 서형은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얼마 전에 자살한 국회의원인데요. 재소자 자녀 생활 자립을 위해 건립한 재단 기금을 횡령하고, 재단을 통해서 기업 비자금 세탁을 도왔다는 의혹을 받다가 자살했어요. 그 기업 목록에는 비승산업개발도 있고요. 도진택 의원이 죽고 나서, 부인은 지병으로 쓰러져 병원 중환자실에 있고. 딸인 도수아 씨는, 행방이 불분명하대요. 새벽에 엄마 병원에 나타나기는 한다는데, 어디서 뭘 하고 지내는지는 알 수 없대요. 채무자들이 도수아 씨한테 책임을 물려고 혈안이 되어 있나 봐요.”
“수고했어.”
한승은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대꾸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가슴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렸다.
아마도 도수아는 엄마 병원비라도 마련하기 위해 혼자서 동분서주했을 것이다. 그러다 한국에 왔다는 시은에게 취업을 부탁했을 거고, 시은은 수아를 돕겠다고 동생 신분을 빌려주면서 이곳에 취직시켰을지도.
생각이 거기에 닿자,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레스토랑을 제집 드나들 듯이 드나들며 한승의 얼굴을 살피던 시은의 눈빛이 떠오르자 신물이 올라왔다.
여기에 도수아를 넣어 놓고, 기시은은 대체 무슨 생각을 했을까?
하지만 뒤통수를 함께 올려친 시은에 대한 분노는 미미하다 싶을 만큼, 도수아를 향한 차디찬 감정이 치솟았다.
이대로 끝이 난 건가 싶으면서도, 그녀가 홀로 분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밤을 꼬박 지새운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그러면서 자존심 강한 그녀가 한승의 곁에 스스로 모습을 나타낼 날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이야.
한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그릴 앞에 섰다. 냉랭한 격노 속에서 놀랍도록 기이한 안도감이 스멀스멀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래도 도수아가 여기 있다.
울분으로 얼어붙었던 가슴이 뜨끈한 소유욕으로 뒤덮이기 시작했다.
“기시아 씨, 우리랑 같이 나가야겠는데?”
부처 키친 셰프들이 테이블마다 배정되었고, 그들은 테이블에 오를 스테이크 위에 직접 소스를 붓고 설명을 곁들여야 했다.
그런데 셰프 중 한 명이 탈이 나는 바람에 인원이 한 명 비게 되었고, 절대 대체자로는 그 자리에 설 수 없는 수아가 불려 나가게 생겼다.
“제가요?”
“어, 셰프님이 그렇게 하라시는데?”
아까 그가 부처 키친에 등장했을 때, 수아는 하마터면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그는 마치 생판 모르는 남을 바라보는 것처럼 수아에게서 시선을 거두고는 지나쳐 갔다.
설마 못 알아본 걸까? 잘못 봤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와 마주치면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고민도 많았었다. 고민이 무색해질 만큼 서늘한 반응이라고 여겼는데, 그가 수아를 홀로 불러냈다는 말에 가슴이 저릿했다.
“하필 차 셰프님 담당 테이블 보조네. 뭐 어려울 건 없는데, 그 테이블이 셰프님 부모님 계시는 테이블이거든. 셰프님이 직접 서빙하실 거니까 스테이크 접시 들어서 드리고, 그리고 소스 볼 차례로 집어서 드리면 돼. 스테이크 접시 뜨겁고 무거우니까 조심하고. 알지?”
수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거리고는 부처 키친 수 셰프의 뒤를 따랐다. 입안이 버석하게 마르고,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앞에 서는 것도 민망한 마당에 그의 가족이라고 하니, 숨통이 콱 막히는 것만 같았다.
메인 주방에서 홀로 이어지는 복도에 셰프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기시아 씨, 이쪽으로.”
서형이 수아를 맨 앞으로 불러들였다. 수아는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한승의 곁에 섰다.
그의 레스토랑 부엌에서 셰프복을 입고 나란히 서 있는 상황. 심장이 물색없이 뛰기 시작했다. 상쾌한 그의 체취가 느껴져서 가슴이 뒤틀리듯 아파 왔다.
“기시아.”
그가 비소 섞인 목소리로 읊조렸다. 수아는 고개를 빳빳이 든 채로 정면을 응시했다. 수아의 옆으로 스테이크 접시가 올라 있는 은제 트롤리가 줄지어 등장했다.
“나갑시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홀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은제 트롤리를 미는 웨이터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마치 잘 훈련된 군인들의 도열처럼 셰프들은 자로 잰 듯 움직였다.
수아는 그들의 노련함에 누가 되지 않기 위해 부지런히 한승의 뒤를 따랐다. 그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테이블 앞에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인 뒤, 수아를 돌아보았다. 수아는 스테이크 접시를 하나 들어서 그에게 건넸다.
무거운 접시 아래를 받치고 있는 손끝에 그의 손이 가볍게 스쳤다. 찰나의 접촉에 손끝을 타고 올라온 전율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소스를 부으며 스테이크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사모님, 좋으시겠어요. 이런 듬직한 아드님이 계시니.”
그가 처음으로 스테이크 접시를 내려둔 곳에 앉아 있는 중년의 여인은 그의 어머니 연배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고 젊었다.
“그렇죠? 이 녀석이 저를 얼마나 챙기는지 모른답니다.”
그녀는 아들을 바라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덧붙였다.
“제 사람 들이고 나면, 저한테도 시들해지겠지요.”
아들의 팔뚝을 부드럽게 쓸어내린 그녀의 시선이 마주 앉아 있는 젊은 여자에게 닿았다. 진회색 원피스를 입고, 진주 귀고리를 한 여자는 그를 흘끗 보고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누군가 말해 주지 않아도, 이 자리가 그의 혼사를 위한 포석 같은 것임을 수아는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심장에 돌 하나를 얹은 것처럼 갑갑해졌다.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생각을 했으면서도, 직접 눈으로 마주한 광경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아프다.
“저는 아직 어머니 챙기기에도 바쁩니다. 워낙 손이 많이 가는 분이시라서요.”
너스레를 떨며 가볍게 선을 긋는 그의 태도에 그의 어머니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겼다.
“이 녀석이 이렇답니다. 이러니 제 안사람한테는 오죽 잘할까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스테이크가 서빙되었다. 마침내 진주 귀고리를 한 여자 옆에 섰을 때, 그녀는 유리알처럼 맑은 목소리를 냈다.
“오랜만이에요, 오빠.”
그는 대꾸 없이 미소를 머금은 채로 다정하게 고개만 끄덕거렸다. 눈가가 따가워지는 것 같아서 수아는 빠르게 눈꺼풀을 움직거렸다.
그 후로는 어떻게 서빙을 했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수아가 잠시 넋을 놓아서 그가 ‘소스 볼.’ 하고 작게 읊조렸던 것밖에는.
“도 의원 일은…… 되었으니……에 대해선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테이블 서빙을 모두 마치고 돌아서는데, 나직하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아버지를 향해 읊조리는 남자의 어조는 자신이 그 일에 혁혁한 공을 세우지 않았느냐고 으스대는 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