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47화 (47/62)

#047

힘겨운 걸음을 부지런히 뗄 때마다 그들의 목소리는 멀어져 갔다. 차용훈 부회장에게 말을 거는 이가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는 알 수 없지만,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오랜 시간 쌓아 올린 그들의 견고한 관계만큼은 짐작할 수 있었다.

신의를 기초에 두고 혼담이 오갈 만큼 격이 맞고, 친밀한 사이라는 것도.

신분을 속인 채로 그의 주방에서 일하다가 들킨 수아로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세상에 속해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다.

수아는 제 일을 마치고 썰물처럼 홀을 빠져나가는 무리에 섞여 주방으로 들어섰다.

“기시아 씨.”

멍하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수아를 부른 건 보조 주방의 수퍼바이저였다.

“네, 셰프님.”

“여기 마무리되면 바로 수서로 좀 가 줬으면 하는데, 괜찮겠어? 갑자기 손질해야 할 물건이 생겼는데, 다들 시간이 안 된다고 하네. 연말이라 그런지,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서.”

수아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당장 한 푼이 아쉬운 수아는 일찍 출근하더라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마감 업무까지 한 뒤 퇴근하곤 했다. 눈치껏 수아의 사정을 알아차린 수퍼바이저는 초과 근무량이 생길 때마다 수아에게 일감을 쥐여 주었다.

“그럼, 늦더라도 좀 부탁해.”

수아는 제가 더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며 은은한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입맛은 지독히도 썼다. 그에게 들킨 이상, 이곳에서 더는 버틸 수 없을 텐데 한 푼이라도 더 챙겨 받아 보겠다고 초과 근무를 흔쾌히 수락한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질 수밖에.

어쩌겠어. 죽지 않을 거면, 이렇게라도 살아야지.

아무렇지 않다. 아무렇지 않다. 절대 아무렇지 않다.

수아는 수만 번 되뇐 말을 또다시 곱씹으며 메인 주방 안으로 들어섰다.

“몇 년 사이 이런 눈부신 성장이라니, 정말 대단하세요.”

공식 행사가 끝나고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지만, 한승은 어머니의 간곡한 청으로 어쩔 수 없이 혜림과 마주 앉았다.

혜림은 오래전부터 아버지의 일을 도왔던 법무법인 S 대표의 막내딸이다. 법무법인 S는 국내 로펌 순위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녀의 배경에 아버지가 그리는 그림이 어렴풋이 보이는 듯했다.

「비승 푸드만큼은 자손이 돌보게 하라는 게, 네 조부 뜻이다. 나는 네가 맡아 줬으면 좋겠구나.」

한승이 경영 일선에 나섰을 때 나타날 파급력을 아버지가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 자리에 한승이 우뚝 서는 모습을 꼭 보고야 말겠다는 듯 결연했다.

이국적인 외모, 혼외 자식. 정통성을 깨는 듯한 행보로 비칠 수 있지만, 아버지는 비승 푸드가 처음부터 한승의 몫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승이 걸어가야 할 길에 동반자격으로 선택된 사람이 법무법인 S 대표의 막내딸인 권혜림인가 보다.

“처음 오빠가 레스토랑 차렸다는 소식 들었을 때, 얼마나 와 보고 싶었는지 몰라요. 언제쯤 초대해 주시려나, 기다렸는데……. 끝까지 연락 없으시더라고요.”

혜림은 벌써 뭐라도 되는 양 선을 넘어왔다. 한승이 그간 상냥하고 다정한 태도를 고수해 왔기에 가능한 발칙함인지도 모른다.

“초대하지 않아도 올 수 있는 레스토랑인데요. 우리 레스토랑 예약 대기 그렇게 길지 않습니다.”

한승은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녀가 넘어온 선만큼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환하게 웃었다. 일평생 거절은 당해 본 적 없는, 있는 집 아가씨 특유의 오만한 여유가 느껴졌다.

차갑게 물러나면, 왜 나한테만 감정적이냐고 쏘아붙이며 씩씩거리던 여자의 얼굴이 떠올라 숨이 턱 막혀 온다.

“그런 뜻으로 드린 말씀 아닌 거 아시잖아요.”

혜림은 매혹적인 웃음을 얼굴에 담으며 찻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장미 향이 첨가된 블랙티를 한 모금 머금고는 대답을 원하는 깊은 눈길로 한승을 바라보았다.

“아니까 그에 적절한 대답을 한 겁니다. 내가 권혜림 씨를 따로 초대해야 할 이유가 없잖습니까?”

선선한 미소를 머금은 채였지만 내뱉은 어조는 차가웠다.

또다시, 그녀의 얼굴.

저도 왜 한승에게 그런 꼴을 당하는 건지, 왜 그러면서 한승의 곁을 맴돌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하던 여자의 얼굴이 선연해진다.

한승은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정중히 사과의 말을 꺼내 들었다.

“미안합니다. 선약이 있었는데, 어머니 부탁으로 여기 앉아 있느라 늦었네요. 무슨 일로 이런 자리를 시작하게 됐는지 알 것 같지만 저는 그럴 생각 없습니다. 권혜림 씨도 마음 쓰지 마시고, 조심히 들어가요.”

혜림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승을 올려다보았다.

“이미 어른들 사이에서는 어느 정도 논의가 끝난 이야기예요. 차한승 씨가 그럴 생각 없다고 한들, 우리한테 별다른 선택권이 있다고 생각해요?”

마치 어린아이를 다그치는 듯 거만한 말투였다. 호칭도 오빠에서 차한승 씨로 바뀌어 있었다.

“차한승 씨가 비승 푸드 대표 자리에 오르게 되면, 우리 집안에서 꽤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어요. 언론을 통제하는 일부터 해야겠죠? 비승 그룹에서 직접 나서면 티 나고 욕먹을 일이지만, 우리가 뒤에서 해 주면 쉽게 잡힐 일이죠. 나는 한승 오빠, 차한승 씨 좋아요. 사업 감각 이만하면 훌륭하고, 서로에게 폐 끼칠 위치 아니고, 어릴 적부터 봐 왔으니 적절한 로맨스 뒤섞어서 결혼했다고 보기에 딱 좋은 포지션이잖아요.”

그녀는 벌써 결혼식이라도 올린 것처럼 만족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덧붙였다.

“차한승 씨가 나를 위해서 혹은 나로 인해서 레스토랑 대표라는 작은 물을 버리고, 비승 그룹이라는 큰 산을 짊어지기로 했다. 이것도 탐나는 타이틀이네.”

한승은 아무 말도 없이 건조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모르겠어요? 이미 그런 계산을 다 끝마친 거라고요. 차한승 씨 집이나, 우리 집이나.”

그녀는 의기양양한 투로 떠들어 댔다. 별수 없을 거라는 뉘앙스가 강했다. 한승은 상체를 조금 숙여 그녀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뺨이 붉어지는 게 어렴풋이 느껴진다. 무엇을 기대하는 건지 탐욕스러운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한다.

“권혜림 씨, 그쪽은 아직도 부모님이 세워 둔 일일 계획표대로 삽니까? 스스로 인생을 학습하는 방법은 초등학교 때 깨우쳤어야죠.”

그녀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그리고 흥미롭다는 듯이 한승을 쏘아보았다.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어조는 여기까지다.

“나보다 더 좋은 물건이 시장에 나올까 봐 초조하지는 않습니까? 내가 우리 어머니 친아들이 아닌 것쯤은 알 텐데요? 혼외자에 레스토랑이나 몇 개 굴려 먹던 나를 왜 갑자기 비승 푸드로 불러들이는지 의심스럽지는 않아요?”

그녀가 결혼을 거절당하고 적이 되는 일은 없도록 해야 했다. 법무법인 S는 비승 그룹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기에 일을 완전히 틀어 버릴 수는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돌한 말을 퐁당퐁당 던지는 그녀에게 독한 말이라도 퍼붓고 싶었지만, 대신 그녀의 탐욕적 호기심을 발동하게 했다.

딱 봐도 계산이 빠른 여자였다. 계산이 끝나면 아쉬울 것 없이 돌아설 여자다.

“그리고 나는 결혼을 생각하고 있는 여자가 있습니다. 마음에 다른 여자를 두고, 조건 맞춰서 결혼하는 건 못 할 짓 같네요. 좋은 분 만나시길 바랍니다. 부모님께는 제가 따로 만나는 사람이 있더라고 말씀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군요. 비승 그룹과 법무법인 S와의 관계를 고려할 때 그 편이 낫겠죠? 앞으로도 잘 부탁합니다. 권혜림 변호사님.”

한승의 산뜻한 인사에 그녀가 입가를 기울이며 미소를 머금었다.

“거절을 너무 멋있게 하시네요. 은근히 설레게. 지켜보죠, 앞으로.”

벌써 복잡한 손익을 따지고 있는 듯 그녀는 냉큼 한 발짝 물러섰다. 수줍은 미소 뒤에 숨겨진 눈빛은 냉철했다. 사업 파트너로서는 손색이 없는 사람이다.

한승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네고는 돌아섰다. 이제 숨어들었던 가련한 쥐새끼 같은 여자를 만나러 갈 차례였다.

그래 놓고도 감히 가슴을 뒤흔들고, 숨통을 틀어쥔 듯 답답하게 만드는 여자를.

그녀는 한승의 지시에 따라 홀로 보조 주방을 지키고 있을 터였다. 그저 초과 근무의 일종이라고 여기고 수서로 향했겠지만, 다분히 한승이 계획한 일이었다.

그녀를 향한 배신감과 스스로를 향한 환멸감이 조심스럽게 일어났지만, 그녀를 이제 손바닥 안에 둘 수 있다는 흡족함이 압도적이었다.

벗어날 틈을 주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한승의 세상 안에서만 살아가게 될 것이다. 눈 밖으로 나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만 했다.

수서로 향하는 길, 한승은 시은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네, 선배.

늦은 밤 걸려 온 한승의 전화에 시은은 수줍은 음성으로 응대했다.

“도수아가 네 친여동생이야?”

― 아……. 선배……. 그게……. 저도 어쩔 수 없었어요. 사연이 너무 딱해서……. 제가 그냥 모른 척할 수가…….

“네가 알고 있는 거 다 말해 봐.”

시은이 훌쩍이며 수아는 가여운 아이라고 말했다. 어머니가 쓰러지셨고, 급전이 필요했고, 또.

― 죽은 국회의원이 수아 아버지래요. 선배 아버님 회사 곤란하게 했던……. 하아……. 저도 거기까지는 나중에 알았어요. 이 일로 선배까지 곤란해지면 어쩌죠?

무엇을 바라는 건지, 시은은 수아의 역성을 드는 것 같더니만 나중에는 은근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어설프게 착하고, 어설프게 못돼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재주가 가상하다고 해야 할까.

“도수아한테 전화해서 전해. 내가 다 알아 버렸다고.”

― 아, 저……. 수아 휴대폰 없어요. 여태 수아가 저한테 연락하는 것만 받았는데.

한승은 보조 주방의 직선 번호를 시은에게 알려 주었다. 어설프게 못된 시은은 그녀에게 전화해서 한승이 전부 알아 버려서 난리가 났다고 호들갑을 떨어 댈 것이다.

레스토랑에 연락해 겨우 통화할 방법을 찾아냈다고 안타까운 척하면서 그녀의 가슴을 그어 놓는 말들을 늘어놓을 것이다.

한승은 찬웃음을 물어 삼켰다. 입안이 지독하게 썼다.

이제 너는 어떻게 할까.

더는 도망칠 곳이 없는 상황에서 주저앉아 울게 될까, 아니면 그러고도 고개를 빳빳이 들고 뻔뻔하게 굴어서 사람을 미치게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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