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48화 (48/62)

#048

보조 주방 입구에 선 한승은 센서에 손가락 지문을 인식하기 전, 길게 숨을 들이켰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녀가 있을 터였다.

짧은 전자음과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손을 깨끗이 씻은 뒤 에어 샤워기를 거쳐 주방 안으로 들어서자 조리대 앞에 서서 열심히 레몬을 저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작고 예쁜 레몬에 칼을 가져다 대는 일에만 열중했다.

레몬 같은 여자. 예쁘고 탐스러운 과일처럼 생겼는데, 사람 속을 훑어 놓을 만큼 시큼하다 못해 쓴맛이 나는 여자다.

음식에 녹아들면 기가 막힌 풍미를 선사하는 레몬처럼, 그녀는 한승의 삶에 색다른 풍미를 선사하고 있었다.

절제된 칼질로 레몬을 저미는 그녀의 얼굴은 고요했다. 시은은 가르쳐 준 번호로 전화를 걸어 수아에게 모든 상황을 다 전달했다며 문자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악한 상황 속에서도 그녀는 의연하게 칼질을 이어 가고 있었다. 처연한 그녀의 모습에 한승은 가슴 근육이 뒤틀렸다.

자립심이 강한 그녀였다. 이 상황을 어떻게든 헤쳐 나가려고 홀로 분투하는 모습이 그녀의 평온한 얼굴에 담긴 건조한 눈빛에서 느껴졌다.

사랑한다고 고백했던 남자의 레스토랑에서 몰래 일하며 돈을 벌기 위해 아등바등했을 그녀가 어떤 마음이었을지 감히 헤아릴 수조차 없었다.

정체를 들킨 와중에도 뻔뻔하게 시선을 맞추는 여자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더 아프게 비틀 수 있을까?

가만히 레몬을 저미는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데, 분노로 얼룩졌던 가슴이 서서히 희석되려고 한다.

정체를 들킨 와중에도 돈 때문에 일에 매달리고 있는 여자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녀가 눈물짓는 모습을 보고 싶은 충동과 그녀가 더는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안타까움이 첨예하게 대립했다.

작게 한숨을 내쉰 그녀는 고되었는지 잠시 칼질을 멈추고는 한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새벽부터 부처 키친에 배치되어 일했으니, 그녀는 지금 꼬박 14시간째 부엌에 서 있는 거였다. 어깨를 귀밑까지 끌어 올렸다가 툭 내려뜨린 그녀가 굳은 목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시선을 돌렸다.

마침내 한승에게 닿은 그녀의 시선이 힘없이 흔들렸다. 결연하게 입을 꾹 다무는 그녀의 건조했던 눈시울이 붉게 젖기 시작하는 것을 바라보며 물었다.

“가도 돼?”

그녀가 미안하다며 울부짖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충동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가라앉아 버렸다.

도수아, 마음 아프게 울지 말고. 자존심 있는 대로 세우면서 도도하게 굴어 봐.

속상하게 주눅 들지도 말고. 우아하게 밀어내, 제발.

조급하게 굴지 말고. 여유 있게 웃어.

나는 못 이기는 척 너를 외면한 세상 전부를 껴안아 줄 테니까.

* * *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의 입술이 슬쩍 벌어진 수아의 입술을 담뿍 베어 물었다. 입안을 거침없이 휘젓고 들어온 혀가 말랑말랑한 입안 점막을 섬세하게 적신다.

“흐음.”

수아는 신음을 섞어 흐느끼며, 그의 목에 팔을 두르고는 끌어안았다.

한 달여가 넘는 시간 동안 순간을 버티는 삶을 살아왔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에서 미래의 일을 점쳐 보는 것은 사치였다.

짧은 시간 익숙해진 삶의 방식에 충실하듯 순간의 유희와 안온함에 취해서 그를 따라왔다.

그의 성마른 손길이 수아가 입은 셰프복 상의를 거칠게 벗겨 냈다. 서늘하게 공기와 맞닿은 살갗에 소름이 끼친다. 그는 올올이 일어난 살갗이 안쓰럽다는 듯이 빈틈없이 어루만지며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하아.”

벌어진 입술 새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온다. 목 안쪽 가장 깊숙한 곳에 코를 대고 깊게 숨을 들이켠 그에게서도 낮은 신음이 울렸다.

“살 것 같다.”

욕망에 취한 목소리는 놀랍도록 안정적인 어조를 띠었다. 그는 산소가 부족한 폐쇄된 공간에 갇혀 있다가 맑고 상쾌한 공기를 한껏 들이켠 사람처럼 굴었다.

수아는 그가 입고 있는 코트를 어깨 위로 밀어 넘겼다. 그는 수아의 몸을 친친 감고 있던 팔을 잠시 풀고는 상의를 전부 벗었다. 그의 손이 닿았던 몸 곳곳이 아프게 저렸다. 몸이 바들바들 떨린다. 갑자기 추위와 공포가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현관 앞의 서늘한 실내 온도가 피부를 얼어붙게 만들고,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간 순간부터 턱 끝이 파르르 떨릴 만큼 두려워졌다.

그를 올려다보는 수아의 얼굴은 파리하게 굳어 겁에 질린 상태였다. 그가 와락 끌어안은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하아.”

두려운 거다. 이 남자의 품을 벗어나는 상황이. 이 남자에게 버려질까 봐.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 남자도 연기처럼 사라져 버릴까 봐.

자욱한 연기 속에 놓인 수아는 이 남자마저도 손에 잡히지 않는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그가 한 발짝 물러서면 매캐한 공기가 온몸을 에워싸며 숨통을 조여 올지도 모른다는 극한의 공포감마저 느껴졌다.

수아는 팔을 올려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흐윽.”

그의 입술이 앙가슴에 닿은 순간, 명치끝에 맺혀 있던 울음이 툭 하고 터져 나왔다. 그는 깊게 숨을 들이켜고는 몸을 꼿꼿이 세웠다. 엷은 어둠이 드리운 공간인데도, 그의 커다란 육체로 인한 그늘이 수아를 덮쳤다.

그는 수아를 가뿐하게 안아 들고는 유리로 된 중문 안으로 들어섰다. 매끈한 상앗빛 대리석으로 장식된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들어간 그는 곧장 집 가장 안쪽에 있는 침실로 향했다.

그의 침실 안에 들어서자 그가 풍기는 상쾌한 향기가 아찔할 정도로 폐부를 잠식했다. 가슴이 저미는 향기에 숨이 가빠 왔다. 얕은 숨을 힘겹게 내뱉자, 그가 수아의 이마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는 침대에 눕혔다.

푹신한 침구가 몸을 감싸는 감각에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대체 얼마 만에 제대로 된 침대 위에 몸을 기대는 건지 모르겠다.

눈을 감은 순간, 바지와 속옷이 한꺼번에 끌려 내려갔다. 뜨거운 손길이 뒷무릎을 잡아 올렸다. 그런 행위를 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점잖고 경건한 손길이었다.

“하아.”

수아의 입에서 또다시 더운 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숨결은 끈적끈적하게 젖은 밀부에서 느껴졌다. 달콤하게 젖은 혀가 뜨거운 애액을 애처롭게 흘리고 있는 길고 좁은 틈을 부드럽게 핥아 올렸다.

솜사탕을 처음 맛보는 어린아이처럼 떨리는 움직임에, 수아는 저도 모르게 발끝을 오므렸다. 부끄럽다는 생각조차도 황홀하게 느껴진다. 그와 함께 숨 쉬고, 그와 함께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 숨이 빠듯하게 차오른다.

수아는 베개를 꽉 움켜쥐고 있던 손을 내려 그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순간 그의 혀가 둥그스름하게 부풀어 오른 클리토리스를 사탕처럼 핥았다.

“흐으음.”

꾹 다문 잇새로 앓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달아오른 눈가를 타고 물비늘 같은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려서 귓바퀴를 간질인다.

울고 있다는 자각조차도 행복하다. 그로 인해 흐른 눈물은 짜지 않고 달콤할지도 모른다.

그의 혀가 집요하게 수아의 밀부를 탐했다. 질구 안으로 뾰족하게 헤집고 들어선 그는 질척거리는 소음을 일으키며 노골적으로 빨아 댔다.

수아는 신음을 흘리며 골반을 뒤틀고, 가슴을 들썩이며 거친 숨을 내쉬고, 예민한 손가락 사이사이로 깃털 같은 머리카락을 느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사라졌던 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화를 낼 줄 알았다. 불어닥친 상황을 감당할 수 없다고 물러설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수아는 그에게 더 뻣뻣하게 굴었고, 못되게 말했고, 저열하게 굴었다.

비겁한 행동이 창피하게 느껴질 만큼 그는 지금 수아를 부드럽게 안기 위해 노력했다. 눈물이 또다시 귓바퀴를 타고 내려갔다.

“흐윽.”

신음 섞인 울음이 흘러나오자, 그가 고개를 들고는 애액 묻은 입술을 손으로 훔치며 다가왔다.

비릿한 내음을 풍기는 그의 입술이 눈가를 타고 흐르는 달콤한 절망을 핥아 냈다.

“으으흑.”

참을 수 없는 울음이 터져 나왔다. 눈치 없는 설움이 목구멍으로 끊임없이 기어 올라왔다. 그의 팔뚝이 등허리 아래를 파고들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몸을 그는 단단하게 끌어안아 주었다.

“아앗.”

그에 대한 간절함으로 충실하게 젖은 밀부를 파고드는 묵직한 통증과 쾌감이 인 것도 동시였다.

암담한 절망 속에서도 한 가지 간절하게 빈 것이 있다면, 이 남자였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게 해 달라고. 딱 한 번이라도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수아에게 그는 그악한 삶을 버텨 낼 수 있는 경건한 기도였고, 단 하나의 염원이었다.

그리고 현실을 더욱 비통하게 만드는 희망이기도 했다.

그가 허리를 뒤로 빼며 한계까지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몸을 가득 채웠던 그의 일부가 느껴지지 않아서 마음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은 착각까지 인다.

수아는 다리를 올려 그의 허리를 감쌌다. 다리에 힘을 실으며 골반을 들어 올리려 안간힘을 쓰자 그가 부드러우면서도 세찬 동작으로 수아의 몸을 꿰뚫었다.

“으흑.”

울음을 토해 내는 입술이 그에게 먹혀 들어갔다. 아래로는 그를 빨아들이고, 위로는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서로를 깊이 탐하는 행위는 설명하지 못한 응어리를 모두 녹여 내듯 뜨거웠다.

그는 굵직한 신음을 숨기지 않고, 수아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그의 흥분은 수아를 안도하게 했다. 세상이 전부 등을 돌리고 나락으로 떨어졌어도, 이 남자만큼은 저를 바라고 원한다는 사실에 심장이 터질 듯이 뛰어 댔다.

그의 마음이 무한하기를, 그리고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욕심일까?

모든 것을 잃은 삶에서 유일한 축복 같은 이 남자만을 원한다고 하면 손가락질받게 될까?

죽음과 같았던 잠에서 눈을 뜬 건 새벽 5시경이었다. 그는 삶의 마지막 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수아를 오래도록 품었다. 밤의 흔적인 듯 골반 아래가 저릿하고, 온몸에 묵직한 나른함이 남았다.

수아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바닥에 떨어진 속옷을 집어 들었다. 팬티에 다리 하나를 끼워 넣는데, 기척도 없이 허리에 단단한 팔이 휘감겼다.

“이 새벽에 또 어디로 숨으려고?”

잠에 취한 그의 목소리에서 노기가 느껴진다.

“엄마 병원에 가 봐야 해요. 아침 첫 면회 시간 전에 아주 잠깐 볼 수 있어서.”

그가 몸을 일으켜 앉더니, 다리 사이에 수아를 가두고는 등 뒤에서 포근히 끌어안았다.

“같이 가.”

그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며 수아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앞으로는 절대 너 혼자 안 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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