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50화 (50/62)

#050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섰을 때, 평소와 달리 거실에서 환한 빛이 새어 나왔다. 그저 거실등이 밝혀져 있을 뿐인데, 심장이 단전으로 쑥 미끄러져 내려가는 듯 불안감이 엄습했다.

지난 며칠 동안 그녀는 늘 어두운 침실에 힘없이 누워 있는 모습으로 한승을 맞았다. 영혼마저 텅 비어 있는 사람처럼 굴었지만, 그녀가 도망치기를 단념한 것 같아 비뚤어진 안도감마저 생겨났었다.

한승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겨 거실로 들어섰다. 그녀는 한승의 티셔츠 하나를 몸에 걸친 채로 소파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혹시나 사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기우였다는 듯이 그녀는 텅 빈 눈동자로 한승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는 안 되겠어요.”

넋을 놓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녀는 길고 긴 생각을 마침내 끝낸 사람처럼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한승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무릎을 굽히고 앉았다. 검게 가라앉은 그녀의 눈동자가 한승을 향했다. 그녀의 얼굴에는 일말의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대로는 안 되지, 당연히.”

한승은 그녀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듯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녀의 눈동자가 잠시 커다랗게 뜨이는가 싶더니 이내 평정을 되찾는다.

“나 때문에 차한승 씨가 감당해야 할 문제가 너무 커요.”

그녀는 실비단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한승을 달래듯 말했다. 차가운 얼굴로 밀어내면 한승이 거부할 거라고 여겼는지, 그녀는 한승을 타이르는 쪽으로 방향을 잡은 듯했다.

“그래, 그렇지.”

한승이 동조하자 그녀의 입가에서 가는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리고 커다란 눈가에 맑은 눈물이 부풀기 시작했다. 슬픔에 잠긴 얼굴을 당장 끌어당겨 입 맞추고 싶은 충동이 인다.

그녀는 한승도 그녀가 정해 놓은 관계의 끝에 동의한다고 여기는 듯했다.

모든 것을 들킨 상황. 그녀는 레스토랑에 나가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도망칠 기회를 엿보지도 않았다. 그녀의 완전한 무기력함을 한승은 비겁하지만 다행스럽게 여겼다.

“며칠 푹 쉬게 해 줘서 고마웠어요. 덕분에 여유롭게 생각할 시간도 있었고요.”

수아는 이제 한승의 눈을 피해 허벅지 위에 오른 제 손가락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수아의 목소리에는 어쩔 수 없는 물기가 얇게 흘렀다.

며칠 동안 수아는 마치 짐승과도 같은 날들을 보냈다. 먹고, 자고, 밤이 되면 그의 품에 정신없이 안기고. 식욕, 수면욕, 성욕에만 취해 있던 날들이었다.

본능에만 충실히 따르면서 몸 곳곳에 그가 남긴 애흔이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존재감을 새겨 넣듯이 자국을 남겼다. 며칠 지난 것은 흐릿해졌고, 지난밤의 기록은 그에 비해 선명했다.

시간이 지나면 옅어지듯이, 그렇게 잊힐 것이다.

지금은 앞뒤 가리지 못하고 덤빈다 할지라도 시간이 흐르고 나면 후회로 점철될 관계가 될 것이다.

그에게 저는 약점이고 해악일 뿐, 탄탄대로를 걸어갈 그의 곁을 지킬 동반자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순백의 진주 귀고리를 하고 있었던 여자의 무구한 얼굴이 눈앞을 스치자, 무력한 죄의식마저 희미하게 일어났다.

이미 집안에서 혼담이 오고간 사이라면, 지금 수아가 저지르고 있는 짓은 불륜과 다를 게 있을까?

지나간 연인이었던 것과 결혼을 앞둔 남자의 곁을 지키는 여자는 결이 다르다. 수아는 그런 비겁한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이쯤에서 그의 곁을 떠나는 게 맞는 일이다.

점심 무렵, 전화를 걸어온 변호사는 비교적 희망적인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정치권의 공작이었을 사건들이 하나둘 무마되고 있다는 거였다. 사람 목숨이 떠나간 상황에서도 이권 다툼은 계속되었고, 이용가치가 떨어지자 아님 말고 식의 반응이 터져 나왔다.

일부 언론에서는 도진택 의원이 억울한 일을 감당하지 못하고 신변을 비관하여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하고 있었다.

아버지의 빚도 한정 승인과 상속 포기 절차를 거쳐 무난히 해결될 거라고 했다. 이제 남은 것은 어머니의 병환을 살피며 조용히 살아가는 것뿐이었다.

화제의 중심에 서고 싶지 않았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일이 더는 없었으면 했다. 거기에 그의 이야기가 곁들여지고, 그가 애먼 오해를 받는 것도 싫었다.

그는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수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수아의 뜻을 십분 존중한다는 얼굴이었다.

다행이다. 그가 고집을 피우고 물러서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수아의 상황을 돌아본 그 역시도 녹록치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나 보다.

며칠 가진 거로 충분하다. 간절한 염원이 이루어진 꿈결 같은 시간을 발판 삼아 어떻게든 살아가면 될 일이다.

“네가 하려는 말, 뭔지 알겠어.”

그는 선선히 입을 열었다. 수아는 안간힘을 다해 눈물을 참아 보려 애썼지만, 뺨을 타고 야속한 물줄기가 흘러내렸다. 한동안 바깥 생활을 하면서 따갑게 갈라졌던 살갗은 그의 집에서 지내면서 놀랍도록 빠르게 회복되었다.

부드럽게 새살이 돋아난 뺨에 그의 따스한 손길이 닿았다.

“네 뜻 존중해.”

수아는 그의 손바닥 안으로 저도 모르게 얼굴을 기울였다. 이토록 그와 닿아 있는 게 좋은데.

“하지만 거기까지.”

그의 단호한 음성이 눈꺼풀이 천천히 들렸다. 말간 물기가 한층 가신 눈으로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존중한다는 말이 동의한다는 뜻은 아냐.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줄 수 있는데, 네가 지금 나한테 바라는 건 못 들어줘.”

그의 얼굴에 얼핏 비소가 어렸다. 당황스러워서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런 약한 얼굴 안 어울리는 거 알아? 그런 눈빛으로 순진한 척하는 거, 영 별로라고 말해 줬던 것 같은데?”

수아의 얼굴에 경악이 스쳤다. 그가 지금 무슨 의도로 이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현실을 봐야지, 도수아. 아버님 일도 해결하고 어머님 병원비도 마련하려면, 너는 지금 너한테 미쳐 있는 나를 이용하는 게 맞는 거야. 무슨 고전소설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약한 정의감에 징징거릴 게 아니라.”

“뭐라고요? 징징거려?”

수아는 저도 모르게 발끈해서 되물었다. 이제 눈가를 적시던 눈물은 쏙 들어가 자취를 완전히 감추었다.

“다시 물을게. 너는 내가 지금 너와 같은 상황이면 외면할 수 있어? 당장 그 사람 눈에 닥친 상황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야, 너?”

그는 자신을 그렇게 어리석은 사람으로 만드는 거냐고 묻고 있었다. 수아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았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맞잡은 손을 틀어쥐는데, 그의 커다란 손이 수아의 손을 가만히 덮었다.

“기회는 잡으라고 있는 거야. 나 같은 놈은 잡아야지. 안 그래?”

장난기 어린 말투였지만, 애원처럼 들리는 것 같아서 기이했다. 그는 수아의 손을 끌어다 깍지를 끼며 재우쳐 물었다.

“그래서 나도 너 잡을 거야.”

수아는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며 고개를 슬쩍 내저었다.

“내가 행복할 유일한 기회가 너야.”

말랐던 눈물이 왈칵 치솟았다. 그가 상체를 들어 올리며 수아를 포근히 껴안았다.

“나도 너한테 뭐든 해 주고 싶어. 걱정 마. 서툴게 운전대 잡아서 목숨 거는 일은 없을 테니까.”

수아의 몸이 긴장감에 바짝 굳었다.

“농담에는 좀 웃고. 하긴 그렇게 실없이 웃으면 도수아가 아니지.”

그는 수아를 전부 안 다는 듯이 읊조렸다.

기대도 될까, 이 남자에게.

큰 부담을 지게 하면서 곁에 머무는 게, 행복과 사랑으로 상호 치환될 수 있을까.

“시간이 많으니까,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되지. 내일부터 나 따라서 출근해.”

뜻밖의 말을 내뱉은 그는 수아가 대답을 내놓기도 전에 벌어진 입술 새를 파고들었다. 그의 손이 티셔츠 자락을 들치고 들어와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잡았다.

순식간에 달아오른 열기에 과민한 생각은 의미를 잃고 흩어졌다.

* * *

“그러니까 보조 주방에 있던 기시아 씨가 실은 셰프님이 심어 놓은 일종의 스파이였다는 거야?”

“그렇지. 일부러 바닥부터 보게 하려고 그러신 거래.”

“야야, 들었어? 기시아, 아니 도수아 씨가 우리 레스토랑 운영권 전부 받는다며?”

“셰프님 프랑스 방문 목적이 여행사 프로젝트 때문이 아니라, 도수아 씨 모셔 오느라고 그런 거래.”

“아, 아니라니까. 그냥 단순히 레스토랑만 맡기는 게 아니라. 셰프님이랑 도수아 씨랑 그렇고 그런…….”

“야,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직원 휴게실로 들어서자, 시끌벅적하던 실내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한승은 손수 원두를 갈고 커피를 내려 수아에게 건넸다. 직원들은 보지 않는 척하면서 두 사람의 움직임을 주시했다.

보란 듯이 수아를 데리고 출근한 지 사흘째. 한승은 그녀를 향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레스토랑 안은 한승이 질서를 잡아 놓은 세계였다. 한승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에 따라 직원들은 그녀에게 우호적으로 대했다.

그녀를 지킬 수 있는 편을 많이 만들어 놓는 것. 한승이 의도한 바였다.

“어때?”

“맛있어요.”

그녀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커피를 한 모금 더 머금었다. 마음 같아서는 입을 맞추고 달콤한 타액이 뒤섞인 커피를 들이켜고 싶다. 한승은 뭉근하게 차오르는 열기를 뱉어 내듯 한숨을 몰아쉬었다.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짓을 그녀는 하지 않았다. 마음을 외면하고 서로를 힘들게 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 그녀가 무한히 사랑스러웠다. 사리 분별이 분명한 그녀는 한승의 제안을 의연히 받아들였다.

그저 정식으로 한승의 레스토랑에 취직한 것으로 여기는 듯했지만, 직원들이 떠들어 대는 말처럼 나중에는 레스토랑 운영을 그녀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비승 푸드에 들어가면 레스토랑은 어차피 다른 이에게 넘겨야 하는데, 그녀라면 믿고 맡길 만했다.

“저 이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커피를 호로록 마신 수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빙긋이 웃었다. 그는 고개를 가만히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사실 점심 장사가 막 시작되기 직전, 그가 얼굴이라도 보자며 수아를 휴게실로 불러냈었다.

직원들의 시선이 따르는 것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신경 쓰지 않는데, 수아가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욕심인 것 같다고 했더니, 그 욕심 마음껏 부리라고 하는 남자.

두렵다고 했더니, 저만 믿으라는 남자.

무모한 짓 같다고 했더니,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무모해져 보자고 하는 남자.

수아는 가슴을 빠듯하게 채우는 남자를 떠올리며 메인 키친으로 향하기 위해 레스토랑 마당을 가로질렀다.

“도수아?”

처음 듣는 듯 귀에 익은 음성에 수아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오랜만이다. 여기서 일해?”

레스토랑 건물을 한 번 돌아보며 호기심 어린 목소리를 내는 남자는 배성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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