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1
수아는 감정을 비워 낸 텅 빈 얼굴로 성헌에게 고개를 한 번 까딱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더러운 입에서 저열한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걸음을 재촉하는데, 성헌이 수아의 팔을 붙잡아 세웠다.
“이렇게 보니까 반갑네. 잘 지냈어?”
수아는 본능적으로 팔을 홱 뿌리쳤다. 팔뚝에 오물이라도 묻은 것 같은 기분이다.
“의원님 돌아가셨던데.”
걱정 어린 말투였지만, 성헌의 눈가에는 조소가 자리했다. 수아는 네 알 바 아니라는 듯이 쏘아보았다.
“그러게 내가 하자는 대로 했으면, 험한 일 당하시지는 않았을 거 아냐?”
누가 들을까 한껏 목소리를 낮춘 성헌이 빙글거렸다. 당시 성헌의 집안에서 운영하는 건설사는 시행사로부터 발주를 받아 아파트를 짓는 지방 소규모 시공사였다.
비약적 도약을 꿈꾸던 그들은 아버지가 의원 활동을 했던 지역구에 리조트와 골프장을 짓기 위해 개발 제한 규제를 푸는 것을 도와 달라며 수아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였다.
물론 수아는 단번에 그 일을 거절했다. 해당 건설사에서 클럽 등의 유흥업소가 포함된 고급 리조트를 지으려는 곳의 반대편에는 종교 단체에서 가지고 있는 규모가 제법 큰 봉안당과 공원묘지가 자리하고 있었다.
「풍광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을 죽은 사람들만 즐기라는 법 있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슬픔을 달래려 방문하는 곳과 마주한 장소에 있는 자들의 유흥 시설을 짓는다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게다가 법적으로 리조트 건설이 불가능한 부지였는데도, 성헌의 집안은 욕심을 부렸다. 다음 총선에서 선거 자금을 대 주겠다며 아버지를 회유하고, 급기야는 수아와 성헌이 연인 관계라는 말까지 아버지 귀에 흘러 들어가게 만들어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내가 너를 참 몰랐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성헌의 아버지로부터 연락을 받았다며 수아에게 전화를 걸어온 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영감이 고집을 적잖이 부렸어야지. 여기저기 적만 많아서, 누가 해코지했는지 밝힐 수나 있겠어?”
성헌은 비겁하게 그때 일을 들먹이며 아버지의 죽음을 모독했다. 수아의 입술 끝이 파르르 떨렸다. 똥 밟았다고 생각하고 지나쳐야 하는데, 그게 쉽지가 않다.
“그러게, 너도 그냥 나한테 앵겼으면 좋았잖아? 빚쟁이들이 난리라며, 어디서 빌붙어 지낼 데는 있고?”
피할 새도 없이 성헌이 성큼 수아의 앞으로 다가왔다. 뒷걸음질 친 수아의 발꿈치에 정원석이 부딪혔다. 수아가 옴짝달싹 못 하도록 발을 넓게 벌리고 선 성헌은 고개를 비스듬히 들이밀며 탐욕에 젖은 눈빛을 빛냈다.
“내가 울 아버지 좋은 일만 시키자고 그랬던 거는 아니라는 거 알잖아. 원하면 내가 얼마든지 도와줄 수 있는데…….”
귀밑으로 흘러나온 머리카락에 성헌의 손이 닿으려는 순간, 수아는 그의 손을 탁 쳐 내며 눈을 부릅떴다. 그의 레스토랑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기에 목소리를 한껏 낮췄다.
“정신 차려, 배성헌. 아직도 그러고 살아? 안사람 보기 부끄럽지 않아?”
“정신은 네가 차려야지, 도수아. 네 꼴은 어떤 것 같아? 아직도 그런 마인드로 사니까 그 모양 그 꼴이지.”
이가 아득 갈렸다.
“너처럼 비겁하게…….”
“손님.”
독기 어린 말을 읊조리는데 반듯하고 나직한 목소리가 수아를 일깨웠다. 성헌이 고개를 비스듬히 돌리며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한승이 특유의 상냥한 미소를 머금으며 두 사람이 서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손님, 제가 도와 드려야 할 일이 있을까요?”
그는 레스토랑 오너로서 묻는 말이라는 듯이 예의를 갖췄다. 성헌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그를 마주했다. 그가 자연스레 성헌과 수아의 사이를 가로막으며 자리를 잡았다.
그는 성헌보다 키가 한 뼘은 더 컸고, 어깨가 굽은 성헌에 비해 딱 벌어진 두꺼운 몸집은 위압적이었다.
성헌은 삐딱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뭡니까?”
“그랜드 셰프 차한승입니다. 제 직원이 손님께 결례를 범했습니까?”
그의 목소리는 흔들림 없이 부드러웠다. 수아는 불안한 심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그의 레스토랑만 아니었어도 성헌에게 소리라도 질렀을 텐데, 조용히 대응하려고 했더니 뜻하지 않게 그가 등장했다.
“글쎄요. 손님의 사려 깊은 제안을 무시하는 것도 결례라면요.”
성헌은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한승의 등 뒤를 살폈다.
“제 직원이 손님의 어떤 제안을 무시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그의 태도는 빈틈없이 정교한 친절함을 담고 있었다. 성헌은 예의를 갖춘 그의 행동을 얕잡아보듯 했다.
성헌은 언제나 저열하게 허세를 부려야 직성이 풀리는 인간이었다. 가진 것을 부풀려 위세를 떨고, 피상적인 것을 추구하며, 자신보다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적어 보이는 이들은 제 발아래에 두려고 했다.
성헌은 지금 한승을 발아래 두고 싶어 하는 눈빛이다.
“사적인 겁니다.”
한쪽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들어 올리며 성헌이 덧붙였다.
“그렇지, 수아야?”
소름 끼칠 정도로 태연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등 뒤에서 그를 올려다보는데, 그의 목 근육이 긴장하며 바짝 올라붙는 게 느껴졌다.
“근무 시간입니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시죠. 예약된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약자 성함 부탁드립니다.”
그는 성헌의 접근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듯이 걸음을 한 발짝 옮겼다. 성헌이 수아를 흘끗거리는 사이, 그가 무선 이어 마이크에 대고 직원을 한 명 호출했다.
성헌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그의 얼굴을 찬찬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얼굴에서부터 시작된 노골적인 시선은 그의 몸을 따라 발끝까지 내려갔다가 이내 다시 얼굴로 올라왔다. 무시하고 조롱하는 느낌이 다분했다.
감히 네까짓 게 내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느냐는 듯 성헌은 비뚜름하게 웃었다. 그의 등 뒤에 서 있는 터라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상냥하고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을 것이다.
아마도 성헌은 그가 손님인 제게 꼼짝 못 하는 거라고 착각할 테지만, 그는 부모의 원수에게도 미소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도무지 속을 알 수 없게 만들어서 상대를 교란하고 관계의 우위를 점하는 데 탁월했다.
죽었다 깨나도 그의 발끝도 못 따라올 성헌이 으스대며 묻는다.
“이 레스토랑은 뭐가 괜찮나? 나도 프랑스에 좀 있어 봐서 아는데, 우리나라 프렌치 레스토랑은 영.”
“만족하실 수 있도록 특별히 신경 쓰겠습니다.”
한승이 고개를 가볍게 숙이며 인사를 건네는 사이, 홀 직원이 다가왔다. 한승이 턱짓하자, 직원은 성헌에게 예의를 갖추며 안내했다.
“나중에 보자, 도수아.”
성헌은 발걸음을 떼는 순간까지 수아에게 빈정거렸다. 성헌의 모습이 레스토랑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나자, 한승이 하얀 입김을 내뿜으며 읊조렸다.
“중세 유럽 정원에는 여기저기 똥 덩어리들이 널려 있었어. 화장실이라는 개념이 없어서 아무 데서나 용변을 봤으니까 그럴 만도 하지. 에스코트라는 말이 거기서 나왔거든? 남자가 여자에게 똥물이 튀지 않은 길을 안내하는 거야.”
그가 심상하게 내뱉은 말이 의미하는 바를 대충 알 것 같아서 수아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가자, 도수아. 똥물 안 튄 쪽으로.”
돌아본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이 산뜻해서 방금까지 성헌이 치댄 것도 빠르게 잊혔다. 수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와 나란히 걸었다.
수아에게 원하는 바가 있어서 다가왔다가 시비를 걸어오는 인간들을 그동안 대체로 무시하며 살아왔다.
그들이 뭐라고 한들 아무렇지 않은 척 차가운 얼굴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늘 괜찮다고 생각했지만, 속이 문드러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그중에서도 성헌은 악질 중의 악질이었다.
수아는 가만히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왜, 새삼 멋있어?”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해진 얼굴로 물었다. 수아는 대꾸 없이 시선을 돌리고는 그를 앞서 나갔다.
푸른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앞으로도 계속 맑은 날이 이어지기를 바랐다.
* * *
“이게 설마 우리 셰프님 얘기라고?”
휴게실에 삼삼오오 모여 앉은 직원들은 손에 든 휴대전화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숨진 국회의원 딸 A 씨의 타깃이 된 재벌 3세 셰프 B 씨는 여러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왕성한 사업 활동을 벌이고 있다. 집안 내력을 그대로 물려받은 탁월한 경영 능력으로…….]
가십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인터넷 신문사에서 처음 기사가 터져 나왔고, 기사는 우후죽순처럼 늘어갔다.
[프랑스 유학 시절 A 씨의 선배였다던 C 씨는 두 사람이 D 여행사의 프로젝트를 통해 처음 만났다고 밝혔다. 과거 A 씨가 자신을 비롯한 재력가의 자제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한 이력이 있다며 B 씨를 향해 우려를 표했다.]
자극적인 기사가 쏟아지자 국회의원 딸이 실시간 검색어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 주로 자극적인 뉴스를 취급하는 채널을 통해 국회의원 딸의 친구였다던 사람들의 인터뷰까지 등장했다.
“얼마 전에 죽은 국회의원 이름이 도진택 아냐?”
“도수아……. 도씨 성이 흔하지는 않잖아.”
“좀 말이 안 되기는 했어. 뭘 믿고 어린 여자애한테 레스토랑을 넘겨?”
한승보다 나이가 훨씬 많지만, 그의 밑에서 콜드 키친 수 셰프로 일하고 있는 직원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리 셰프님이 단단히 홀리셨나 보네.”
“빚도 엄청 많대요.”
“이러다 레스토랑 통째로 날려 먹는 거 아냐?”
비뚤어진 분위기가 점점 고조되었다.
“뭔 개소리들을 하는 거야? 도수아 씨 어떤 사람인지 안 겪어 봐서 이래? 누구 홀릴 재주나 있어 보여?”
“셰프님이 그렇게 못 미더운데, 여기서 어떻게들 일하는 건지 모르겠네.”
역성을 들고 나선 이는 보조 주방 수퍼바이저와 부처 키친 수 셰프였다.
“우리가 뭐 못할 말 했나? 솔직히 셰프님도 남잔데, 그년이 어떻게 홀렸을지 알 게 뭐야. 반반하게 생겨서 몸 굴리는 재주는 좋은가 보지.”
“누가 뭘 굴려요?”
서형이 머그잔에 담긴 커피를 홀짝이며 직원들 사이를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