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4
갑자기 지금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에 대한 수치심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그동안 사고를 멈추고 인형처럼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짊어져야 할 부담이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감 능력이 떨어진 사람처럼 그의 곁에 머물며 웃었다.
미쳤지, 내가. 이 남자한테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야.
성헌과 마주쳤던 날, 똥물 튄 곳을 피해 가게 해 주겠다며 웃던 그의 얼굴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쩌면 그에게 존재하는 유일한 똥물이 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견딜 수가 없어졌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혀 오고 초조해진다. 수아는 조수석 문고리를 잡아당기며 다급하게 말했다.
“내려 줘요. 부탁이에요. 제발.”
울부짖는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그가 미간을 구기며 끝 차로에 차를 세웠다. 숨이 가빠 와서 거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가 물러나면 되는 거였잖아. 나만 물러나면 되는 거였는데.
그는 자신의 배경 때문에 추문이 짙어졌다고 말했지만, 원인은 제게 있었다. 눈가가 따가워지기 시작했다. 울 자격이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모든 상황이 억울해졌다.
“왜 이래, 갑자기.”
그가 안전벨트를 풀며 커다란 손으로 수아의 두 뺨을 감쌌다.
“수아야.”
그가 호흡이 잔뜩 흐트러진 수아의 이마에 제 이마를 기댔다. 눈물이 후드득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릴래요. 내려 줘요.”
한승은 그녀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녀는 혼란에 빠진 것처럼 허둥지둥했다. 그에게 내려 달라고 애원했다가, 문고리를 잡아당겼다가, 숨이 막히는지 가슴을 쿵쿵 쳐 댔다.
작게 쥔 주먹을 얼른 낚아채 잡았다. 숨이 가쁜지 헉헉 들이쉬는 소리가 거칠다.
“왜 이러는데.”
“나, 못 하겠어요. 기자고, 변호사고 못 만나겠어요. 내가 그만두면 되잖아요. 내가 셰프님 옆에 없으면 되는 거잖아요. 욕심 부려서 미안해요. 혼자서도 어떻게든 살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셰프님이 있으니까 너무 편해서. 세현 선배고, 배성헌 그 쓰레기고 셰프님이 다 막아 주니까. 그게 너무 좋아서. 나한테는 십수 년을 벌어야 할 돈인데. 그걸. 셰프님이. 그러니까.”
횡설수설 울부짖는 입술을 집어삼켰다. 입가에도 눈물이 고여 짠맛이 났다. 그녀의 모든 번민이 제 것이 되기를 바랐지만, 그녀는 또다시 치열한 번뇌에 빠지고 말았다.
멍하니 벌어진 입안을 파고 들어가 혀를 휘감았다. 가쁜 숨결이 한승의 뺨 위로 다급하게 흩어졌다.
문고리를 정신없이 잡아당기던 동작이 멈췄고, 그녀의 작은 손이 한승의 팔뚝을 절박하게 붙들었다. 한승은 뺨을 감싸고 있던 손을 내려 그녀의 등허리를 당겨 안았다.
마른 등이 파르르 떨렸다. 감당할 수 없는 문제를 앞에 두고 괜찮다고 여기던 그녀가 끝내 폭발했다. 언젠가는 터질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로 인해 그녀가 저를 몰래 떠나기라도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래서 고마웠다. 한승이 지켜보는 앞에서 감정을 모조리 터뜨려 버린 그녀가 고마울 정도다.
한승은 달래듯 그녀의 등허리를 가만가만 쓸어내려 주었다. 욕망에 눈이 멀어 몰아붙이는 키스가 아닌, 부드럽고 온화한 키스로 그녀를 다독였다.
마주한 입술 새로 울컥 울음이 넘어왔다. 한승은 그녀의 울음마저도 깊게 빨아들였다. 팔뚝에 매달리던 손이 한승의 어깨를 잡고 천천히 밀어냈다.
욕정 때문에 그녀의 입술을 탐한 게 아니었기에, 한승은 순순히 입술을 떼어 냈다. 예민해진 그녀에게 상처 주는 일은 없어야 했다.
그녀는 눈물이 뒤범벅된 얼굴로 한승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불어닥친 그악한 상황 속에서 허우적대던 그녀의 눈빛이 이제는 다른 의미로 혼란스러워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한승을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에 괴로운 듯했다.
그거면 됐다. 절망 속에서 그녀가 원하는 오직 하나가 저라면 된 거다.
한승은 가만히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눈꺼풀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눈물이 여러 갈래로 흘러내렸다. 엄지로 그녀의 얼굴을 쓸어내며 입을 열었다.
“바람이 쐬고 싶으면 창문을 열면 되지. 내릴 필요까지 없잖아.”
다정하고 선선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녀의 얼굴이 낭패감으로 얼룩졌다. 하지만 물기에 젖은 눈동자만큼은 마주한 한승을 간절히 소망했다.
그거면 됐다고, 수아야.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자, 그녀의 두 손이 한승의 오른손을 꽉 붙잡았다. 손끝이 파들파들 떨렸다. 어떤 말을 꺼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녀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한승은 그녀의 손을 꼭 잡은 채 한 손으로 운전대를 잡았다. 매달리는 그녀의 손길이 좋다. 제가 아니면 절대 안 될 것 같은 눈빛을 하는 그녀로 인해 묵직한 소유욕이 흡족하게 차오른다는 것을 그녀는 죽었다 깨나도 모를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일이 전부 해결될 때까지 그녀를 침실 안에 가둬 두slakpwkjmdm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의 성향과 기질을 존중하기에, 그녀가 자신을 갑자기 떠나 또 숨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일을 감행했다.
그녀의 소신을 지켜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것 역시도 그녀는 모를 것이다.
죽을 때까지 몰라도 상관없다. 옆에만 있어 준다면, 그거면 되는 거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계절, 산속 허름한 찻집에서도 캐럴이 울려 퍼졌다. 하나뿐인 창가에 드리워진 알록달록한 전구가 반짝반짝 빛을 냈다.
가정집을 개조해서 만든 찻집. 원래 안방이었던 공간에 놓인 단 하나의 테이블 앞에 영석이 앉아 있었다. 영석은 그동안 도진택 의원을 쫓으며 모은 자료를 정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뭐 좀 마시고 해. 아무것도 안 시키고 뭐 하는 거야?”
“이모, 나 그럼 대추차요.”
주인을 친근하게 일컫는 호칭이 아닌, 엄마의 혈육을 부르는 말이었다.
“멀쩡한 신문사는 왜 때려치우고 나와서 애들 장난감 갖고 노는 영상이나 올리는 데다가 뉴스를 올리겠다고 지럴을 허는지.”
허름한 가게는 해가 떠 있을 때만 손님이 더러 있을 뿐 어둠이 내려앉은 후에는 적막하기만 했다. 긴밀한 약속을 잡기에는 적합한 장소였다.
딸랑거리는 풍경 소리와 함께 밖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달큼한 대추차 냄새가 풍기는가 싶더니 이모가 투덜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별일이네. 이 시간에 손님이 다 오고. 들어오슈.”
손님이 이모에게 뭐라고 묻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이, 고영석이. 너 여기서 누구 만나기로 혔냐?”
질문과 동시에 이모가 문지방을 넘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커다란 인영이 이모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잘 찾아오셨네요, 셰프님.”
영석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손바닥을 재킷에 슥 문지르고는 악수를 청했다. 검은색 슈트에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는 한승의 모습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오랜만입니다, 기자님.”
한승은 선선히 웃으며 악수에 응하고는 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어? 도수아 셰프님?”
놀란 목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프랑스에서 봤을 때보다 훨씬 야윈 모습의 수아가 한승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한승이 그녀의 등을 감싸며 따뜻한 눈빛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소문의 일부는 사실이었나 보네요? 투어 때문에 나온 가십인 줄 알았는데. 일단 앉으세요.”
두 사람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로 영석과 마주 앉았다. 그녀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한 것으로 보아 저를 만나러 오는 거라고는 예상치 못한 눈치다.
한승이 왜 그렇게 도진택 의원의 죽음을 두고 신경을 쓰나 했다.
비승 푸드를 맡게 될 거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그에게 흠집을 내기 위한 악의적인 기사가 터졌을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래서 소문을 근본부터 잠재울 요량으로 저를 만나자고 했을 거라고 여겼다. 진짜로 도수아 셰프와 관계를 맺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와, 언제부터였어요?”
영석이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투어 직전?”
동의를 구하듯 한승이 비스듬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어색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내가 도수아 씨 괜찮게 봤었는데, 아쉽네. 내가 먼저 꼬실걸. 그럼 이런 험한 꼴 당하기 전에 내가 기사 빵빵 터뜨려 줬을 텐데.”
분위기를 풀어 보려고 건넨 농담에 한승의 눈빛이 뾰족해진다.
“아이고, 셰프님. 농담이에요, 농담. 사람 잡겠네.”
한승은 안다며 미소를 머금으면서도 눈빛에 깃든 경계는 풀지 않았다. 지금 기자인 자신에게 도움을 청하러 온 양반이 태도가 영 불량하다. 사랑에 눈이 멀어 물불 가리지 못하는 한승의 모습이 꽤 볼만했다.
영석은 안타까운 미소를 머금으며 수아를 바라보았다.
“고생 많았겠어요. 도진택 의원님 좋은 데 가셨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분명 건조한 목소리인데 물기가 느껴진다.
“돌아가신 도진택 의원님 관련해서 기획 보도를 준비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그녀가 흠칫 놀란 얼굴로 영석과 한승을 번갈아 보았다. 한승은 그녀를 안심시키려 등에 커다란 손을 부드럽게 얹고 가만히 다독였다. 그녀의 입가에서 가느다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일종의 탐사 보도라고 볼 수 있죠. 중심에는 도진택 의원이 있지만, 그를 둘러싼 사건들의 실마리를 밝힐 수 있는 기회가 될 겁니다. 30분 분량, 5부작으로 제작될 예정인데, 도수아 씨가 도움을 줄 수 있다면 분량이 더 늘어날 수도 있고요.”
“제가 어떤 도움을 드리면 될까요?”
그녀의 목소리에서는 떨림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혹시 백화 건설이라고 들어 본 적 있습니까?”
백화 건설은 성헌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건설사였다.
“네. 있어요.”
“백화 건설이 의원님 지역구 개발 제한 구역에 유흥 시설을 짓겠다고 나섰었죠? 그 사연이 마치 비승산업개발의 이야기인 것처럼 와전됐어요. 당시 시청 직원이 진술한 내용도 있고요.”
“그럼 이번에 기사를 뿌린 쪽도 백화 건설 쪽일까요?”
“가능성이 없지 않죠. 두 분이 연인 관계라는 사실이 그쪽에는 위협이 될 만한 요소인가 본데. 이유가 있습니까? 굳이 두 사람의 스캔들을 빌미로 기사를 터뜨린 게 악의적이라서요.”
성헌의 존재감이 명확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