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55화 (55/62)

#055

한승은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프랑스에 있을 때, 잠깐 저와.”

저와 관계된 인물이라는 말을 하려는데, 그녀가 한승의 손을 꾹 움켜잡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백화 건설 사장 아들 배성헌하고 잠깐 만났었어요. 깊은 사이는 아니었는데.”

영석은 팔짱을 끼며 골똘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도수아 씨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잇새로 안도의 한숨이 가느다랗게 흘러나왔다.

“치정 싸움에 자존심이 상해서 터뜨렸다고 보기엔, 서사가 빈약하고.”

영석은 허공을 응시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시선을 돌릴 만한 이유가 있었나 보네요. 두 사람 사연으로 시선을 돌리고, 백화 건설이 시간을 벌어야 하는 이유라……. 이 바닥에서 흥행하는 소설을 써 보자면요. 도진택 의원이 완강하게 나온 이상, 그 윗선이나…….”

고심하듯 영석의 미간이 좁아진다.

“도진택 의원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과 접촉하려고 했을 겁니다.”

한승은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도진택 의원의 윗선, 도진택 의원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 백화 건설이 도진택 의원의 죽음과 맞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럼, 돌아가신 아버지하고…….”

그녀도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지만, 갑자기 들려온 풍경 소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침묵이 흘렀다.

“또 누굴 부른 거여. 어서 오슈.”

찻집 사장의 인사 뒤로 쾌활한 음성이 이어졌다.

“여기 정말 찾기 힘드네요. 비포장 진입로에 가로등도 없어서 얼마나 무서웠는지.”

혜림은 몸을 부르르 떨며 찻집 사장이 안내하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얼굴은 뻔뻔하게 미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남자, 차한승이었다.

제아무리 비승 그룹 담당 변호인단 중 한 명이라 할지라도, 그가 저를 불러낸 이유는 정말이지 기가 막혔다.

“안녕하세요, 권혜림입니다.”

산뜻한 인사를 건넨 혜림은 한승이 목숨처럼 붙들고 있는 여자에게 시선을 옮겨 갔다. 선이 가느다래서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여자의 모습에 혜림은 하마터면 실소할 뻔했다. 차한승이 미쳐 있다기에 대단한 미인이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그저 예쁘장하고 분위기가 묘한 매력 정도였다.

“누구……?”

랩톱을 앞에 둔 남자는 혜림을 의문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어설프게 물었다.

“법무법인 S 소속 변호사고요. 얼마 전에 차한승 씨한테 차였는데, 차한승 씨가 갑질하는 바람에 불려 나왔네요.”

너무 직설적이었는지, 여자가 놀란 눈을 했다. 한승은 놀란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팔푼이 짓을 해 댔다.

한승이 믿고 맡길 만한 사람이 없다며 혜림에게 연락을 해 왔을 때, 단칼에 거절하지 못한 이유는 이 여자에 대한 호기심 반, 그리고 사건을 맡고 싶은 변호사적 욕심 반이었다.

비승 그룹에서는 적통이라고 볼 수 없는 차한승 앞에 하찮은 장애물조차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법무법인 S의 대표 딸인 저를 혼처로 골랐다. 그런데 그는 혼사를 물린 것으로 모자라, 제 여자를 지켜 달라며 혜림에게 도움을 청해 왔다.

계산이 지나치게 빠른 남자여서 소름이 돋아날 정도였다. 도진택 의원의 죽음과 비승산업개발의 관계성을 짚어 가며 혜림에게 적절한 떡밥을 던지는 솜씨도 훌륭했다.

그 결과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떡밥을 덥석 문 혜림은 기가 막힌 자리에 합석하게 되었다.

“의원님께서 도수아 씨 두고 어떻게 눈을 감으셨는지 모르겠네요.”

혜림은 복잡한 얼굴을 한 여자에게 먼저 조의를 표했다. 여자는 가볍게 고개를 한 번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받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요히 고개를 끄덕였을 뿐인데 시선이 머무는 여자다.

“고영석입니다. 기자고요.”

여자를 향해 있던 혜림의 시선을 앗아 간 것은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남자의 자기소개였다. 턱 끝에만 수염을 기른 모양새가 가관이다. 혜림은 고개를 한 번 까닥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상속 문제를 해결해 줬던 변호사가 있었다고 들었는데요. 그 변호사하고는 이야기가 잘 안 됐나 보죠?”

“도진택 의원 사법연수원 동기인데, 지방에 개인 사무실을 하나 갖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한승의 대답에 혜림은 알아들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겠죠.”

법무법인 S는 비승 그룹뿐 아니라 정·재계 곳곳에 깊이 연이 닿아 있는 국내 최대 로펌이었다. 혜림의 아버지인 법무법인 S의 대표를 비롯하여 고위 전관 변호사가 대거 포진해 있거니와 압도적인 수임 능력을 가진 곳이었다.

혜림은 법무법인 S의 차기 대표를 꿈꾸는 야심가였지만, 그와 동시에 법의 정의 실현을 추구하는 곧은 가치관을 따르고 있었다. 이 일을 맡고 싶은 변호사적 욕심은 혜림의 야심과 가치관에 기인했다.

지방 소도시의 변호사가 맡기에는 상대가 지나치게 비열했다. 하지만 법무법인 S 소속 파트너 변호사인 혜림이 맡는다면 해 볼 만한 싸움이다.

혜림은 도진택 의원의 업적을 높이 샀다. 그가 살아생전에 행한 일들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들이었고, 대형 로펌에서도 쉽게 덤빌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이었다.

존경해 마지않는 선배 변호사의 억울한 죽음을 떠올리자, 정의에 대한 욕구가 삿된 호기심을 금세 불식시켰다.

혜림은 선선한 눈빛을 머금기 위해 노력하며, 여자를 바라보았다.

“의원님께서 살아 계실 때 옳은 일을 많이 하셨죠. 제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아까보다 흘러나온 음성이 훨씬 부드러웠던 덕분인지, 여자의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가 이내 사라졌다.

“일단 백화 건설이 줄을 대려고 했던 곳을 찾아봐야겠네요. 혹시 생전에 의원님하고 사이가 안 좋았던 인사라든지.”

영석이 수아를 향해 시선을 보냈지만, 수아는 안타깝게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수아는 저를 위해 모인 사람들의 면면을 살폈다.

기자 정신이 투철한 영석, 그와 혼담이 오고 갔는데도 서늘한 얼굴로 앉아 있는 변호사 혜림, 그리고 이 자리를 만들어 준 한승에 이르기까지.

수아는 이들의 도움을 제가 기꺼이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 면구스럽기까지 했다.

“저희 아버지 일인데,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없어서 죄송합니다.”

건조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영석이 고개를 내저으며 대꾸했다.

“도수아 씨, 나는 내 할 일을 하는 겁니다. 나까지 빚쟁이 보듯 하지 맙시다.”

영석은 허튼소리 말라는 듯이 강한 어조로 말하고는 탁 소리가 나도록 랩톱을 덮었다.

“일단 나는 국회 상임위 국토교통위원회 소속 인사들부터 알아볼게요. 그중에서 도진택 의원과 과거에 충돌이 있었던 의원들 쪽으로 가닥을 잡으면 될 것 같네요.”

“얼마 전 국교부 고위 인사 중에 제1야당에 입당한 인사가 있어요. 저는 그쪽으로 알아볼게요.”

혜림이 세 사람을 둘러보며 조용한 목소리를 냈다.

“비승산업개발 관계자는 제가 만나 보겠습니다. 다시 뵙죠.”

한승은 고맙다는 듯이 선선한 미소를 머금으며 대꾸했다.

수아는 결연한 눈빛을 빛내는 세 사람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직업적 소명의식을 가지고 움직인다고는 하지만, 뜻이 깊은 그들을 마주하자 제 아버지 일인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감이 밀려들었다.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억울한 사연을 밝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깃든 마음이 무겁다. 수아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선한 눈빛으로 수아를 응시했다.

깊은 산중 칠흑 같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다정함. 감히 그것을 가져도 되는지 모를 두려움.

당신에게 받은 사랑을 나는 어떻게 돌려주어야 할까?

그를 향한 심장이 뜨겁고도 버겁게 뛰어 댔다.

* * *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이른 아침, 하늘은 어둡고 거리는 스산했다.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이라고 하기엔 울적한 느낌마저 드는 날씨였다.

“잘 모르겠어요.”

수아는 복잡한 심경을 숨기지 않았다. 그 역시 걱정스럽기는 하지만 단호한 눈빛으로 수아를 응시했다.

“셰프님 가족이 모이는 자리에 내가 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절대 혼자 두지 않겠다던 그는 성탄절 아침부터 가족 식사 자리에 수아를 데리고 가겠다며 고집을 피웠다. 아버지의 죽음과 관련한 의혹이라도 풀린 상태라면 마음이 조금 편했을까.

조건이 기우는 것도 모자라 제 형편을 헤아리니 한숨만 나왔다.

“내가 혼자 있는 게 걱정이라면, 엄마 병원에 가 있다가 레스토랑으로 출근할게요. 그럼 되잖아요.”

“벌써 너도 같이 갈 거라고 다 이야기해 뒀어.”

그는 꽤 고집이 센 성격이었다. 특히 저와 관계된 일에서는 물러나는 법이 결코 없었다. 속전속결로 일을 처리하는 그의 의사 결정 능력에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비승 그룹 부회장의 아들, 그는 중요한 일을 스스로 결정하고 깨우치는 데 특훈이라도 받은 것처럼 보였다.

지금까지는 하고 싶은 공부를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왔다고 했다. 책임질 수 있는 삶의 범위와 결정 권한을 자연스레 깨우치고 학습한 남자는 이제 더 큰물로 나아가면서 수아를 곁에 두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모처럼 가족이 전부 모이는 날에 내가…… 분위기를 망칠 수도 있어요.”

그가 눈을 가늘게 뜨며 수아를 노려보듯 했다.

“도수아. 너는 지금 내가 의심스러워?”

“아니요! 셰프님이 의심스럽다는 게 아니라, 내 상황이 지금…….”

“네 상황이 좋지 않다는 거 알아. 그런데도 너를 택한 건 나야. 내 선택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내가 내린 결정이 의심스럽다고 말하고 싶어?”

“셰프님 부모님이 보시기엔, 저보다 권 변호사님 같은 분이 훨씬 마음에 드실 거예요. 객관적으로 봤을 때, 셰프님 앞길에 도움 줄 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럼 주관적으로 봤을 땐?”

그는 수아의 말을 탁 끊어 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객관적인 거 말고, 내 의견은? 내가 사랑하는 여자랑 함께하겠다는데, 내 생각이 가장 중요한 거 아닌가? 그리고 모르겠어, 도수아? 권 변호사는 나랑 혼사로 엮이지 않아도, 내가 혼담을 거절했어도 우리 일을 돕고 있어. 다시 물을게.”

그의 목소리에 서늘한 냉기마저 감돌았다.

“내가 못 미더워서 이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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