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6
그는 미련한 생각 집어치우라는 듯이 수아를 바라보았다. 어느 정도는 책망하는 눈빛이기도 했다. 저를 못 믿느냐고 묻는 말은 망설이는 수아를 달래기 위한 말장난이 아닌 진심이었다.
“아니요. 셰프님 믿어요.”
수아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내가 지금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셰프님뿐이라는 거 알잖아요.”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수아의 두 뺨을 감쌌다. 수아는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고는 그를 마주했다.
“그럼 믿어야지, 내 선택을.”
“내가 유일하게 믿는 사람이니까, 다른 이유로 잃게 될까 봐 무서운 거라고요. 더 나은 모습으로 인사드리고 싶은 거, 모르겠어요? 나 같아도 내 아들이 나 같은 여자 데리고 오면 안 반가울 것 같으니까. 누가 보기에도 뜯어말리고 싶지 않겠어요? 앞길 창창한 셰프님 옆에 내가.”
울고 싶지 않은데 목이 콱 메고 억울해서 콧등이 매웠다.
“그 창창한 앞길에도 네가 없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
그는 엄혹하게 느껴지는 눈빛으로 수아를 바라보며 읊조렸다. 치열하게 고민했던 근심 따위 날려 버리고도 남을 만큼 매혹적인 눈빛이기도 했다. 수아는 본능적이고 충동적으로 팔을 뻗어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곁에 두고 싶은데, 욕심이라는 생각이 든다.
잃고 싶지 않은데, 두려움이 앞선다.
그가 가만가만 수아의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그의 손길에 따라 놀랍도록 빠르게 마음이 안정된다.
그에게 몸을 기대고 있노라면 금세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것만 같은 기분마저 든다.
“셰프가 온다니까,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몰라요. 한승이야 내 손맛에 익숙하지만, 수아 양은 그렇지가 않으니까.”
식탁 앞에 앉았을 때, 그의 어머니 임 여사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많이 들어요. 연말이라 레스토랑 바쁠 텐데, 먹는 거라도 잘 챙겨 먹어야지.”
조금은 긴장한 듯한 수아를 바라보는 임 여사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엄마, 그만해. 먹기도 전에 체하겠어.”
투덜거리며 입을 연 사람은 그의 여동생 한유였다. 그와 닮은 듯하지만, 선이 곱고 섬세한 인상이었다.
“그래요. 일단 식사부터 합시다.”
그의 아버지 차용훈 부회장은 수아의 인사를 받아 주기만 했을 뿐 따로 말을 보태지는 않았다. 수아를 고깝게 여기는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기꺼이 대하는 것도 아니었다.
우려했던 대로 그의 가족은 수아의 처지를 비관하고 있는 듯 보였다. 완전무결한 앞날을 지닌 아들의 곁에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여자가 자리한다고 생각하면 저라도 싫을 것이다.
수아는 침착하게 식사를 시작했다. 입안에 음식물을 천천히 밀어 넣고, 꼭꼭 씹어서 삼키는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원래 식사 분위기가 조용한 것인지, 아니면 수아에 대한 묵언의 비난인 것인지 모를 고요가 마른 어깨를 짓눌러 댔다.
우물우물 밥을 씹어 삼키는 동안 괜히 억울해졌다. 질서가 깨진 삶은 수아가 자초한 게 아니었다. 그저 묵묵히, 열심히 살아왔을 뿐인데 견디기 버거운 고난이 찾아들었다.
내가 저지른 잘못도 아닌데, 왜 내가 주눅 들어야 하지?
잘못한 사람들은 숨어서 잘 지내고 있는데, 왜 내가 죄인처럼 고개를 숙여야 하지?
부모를 잃고도, 왜 나는 슬퍼할 겨를도 없이 벼랑 끝에 내몰린 거지?
음산해진 삶에서 유일하게 손을 잡아 준 사람이 옆에 앉은 남자다. 간절하게 지키고 싶어서 이 자리를 피하고 싶었는데,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는 저를 위해 전부를 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저는 이제껏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애를 쓰고 있는 그에게 웃으며 식사하는 모습을 보여 줄 마음조차 먹지 못했다는 사실에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웃어, 도수아. 웃자, 이 남자를 봐. 웃어야지.
어깨에 저절로 힘이 들어갔다. 수아는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짓누르듯 무거운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귀국하고 제대로 된 집밥은 처음 먹어 봐요. 정말 맛있어요.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떨림 없는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굴종하는 어조도 아니었고, 진심을 담으려 애쓰는 담대함마저 묻어나는 음성이었다.
그의 부모님은 뜻밖이라는 시선으로 수아를 바라보았고, 수아의 말에 대꾸해 준 것은 그의 남동생이라는 한도였다.
“어머니 솜씨가 워낙 좋아요. 좋으시겠어요, 어머니. 유능한 셰프라는 예비 큰며느리한테 음식 칭찬도 받으시고.”
한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애써 빚어 낸 용기가 쏙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동생들이 직설적인 성격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한도가 내뱉은 말은 그의 부모님이 그어 놓은 마지노선을 무참히 무너뜨리는 듯했다.
“얘는 정말.”
임 여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식사에 열중하는 한도를 나무라며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역시 속도위반한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라. 사람이 리밋이 없어.”
한유가 키들거리며 한도를 놀려 댔다. 한도는 여동생의 애교 섞인 질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저질만 열심히 해 댔다.
“의원님 일에 백화 건설이 연루되어 있다고 들었다. 사실이냐?”
내내 조용하던 차 부회장이 입을 열었다. 한승은 수아의 얼굴을 한 번 살피고는 심상한 어조로 대꾸했다.
“네, 국회 선임위하고도 연관이 있어 보입니다.”
가만히 아들을 응시하던 차 부회장이 결단을 내린 듯한 얼굴로 읊조렸다.
“같이 고민해야겠구나.”
그의 얼굴에 미미한 미소가 떠올랐다가 이내 자취를 감추었다. 임 여사는 여전히 못마땅한 눈치였지만, 분위기상 부정적인 말을 보탤 수는 없겠다고 판단했는지 가느다란 한숨만 내쉬었다.
“섣불리 나서지 말고, 확실해지면 움직이거라.”
아들을 향해 있던 차 부회장의 시선이 수아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곧 멀어졌다. 차 부회장은 억울한 죽음에 관한 진실을 밝히는 것뿐 아니라, 수아와의 관계에서도 신중을 기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성탄절 아침 식사는 조용히 끝을 맺었다. 다들 바쁘게 살거니와 그가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나서부터 가족 모임은 대체로 아침 식사 시간에 이뤄진다고 했다.
식사를 마치고 그의 본가에서 나오는 길, 수아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원래 식사 분위기가 이렇게 살벌한 건 아니죠? 나 때문에.”
그는 미간을 슬쩍 찌푸린 채로 대꾸했다.
“원래는.”
“원래는?”
초조하게 되묻자 그가 진한 미소를 머금는다.
“이것보다 더하지. 밥 먹을 땐 아무 말도 안 해, 다들. 오늘은 그래도 말 많이 했는데.”
수아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어머님은 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았어요. 동생분들이랑 아버님은 잘 모르겠고.”
차 앞에 선 그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얼른 타라고 턱짓했다. 수아는 새삼 그가 문을 열어 주는 차에 오르는 데 심장이 두근두근하는 걸 느꼈다. 식탁 앞에서 그의 남동생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올라서였다.
프러포즈도 못 받았는데, 큰며느리라니.
그저 연인으로서 부모님께 인사드리는 예도 있는 건데, 장난이 심했지 싶다.
“어머니는 말씀하신 대로 긴장을 좀 하신 것 같아. 어릴 때부터 나한테 좀 유난이셨어. 밖에서 낳아 온 아들이라고 박대한다는 말 들으실까 봐 더 그러셨던 것 같아. 그게 좀 부담스럽기도 했고, 동생들한테 미안한 적도 있었고.”
운전석에 오른 그는 허심탄회하게 속을 털어놓으며 엔진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한도는 장난 같은 거 칠 줄 모르는 성격이야. 워낙 말이 없는 녀석인데, 걔가 떠드는 말은 그래서 다 진심이고.”
예비 큰며느리라는 단어가 또다시 머릿속에 부유한다. 곁에 있으라고는 했지만, 이 남자가 프러포즈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가 이 남자에게 결혼하자고 말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한유가 좀 심통이 난 것처럼 보이던데?”
생글생글 웃고 있던 그의 여동생은 오히려 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았다.
“심통이 나요?”
“어, 걘 원래 자기보다 예쁜 여자 보면 못 견디거든.”
이걸 지금 농담이라고 하는 건지.
수아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그를 노려보았다.
“진짜야. 아까 한유가 너 스캔하는 거 못 느꼈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던데? 걔가 또 사람을 그렇게 꼼꼼히 보는 건 처음 봤네.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유는 좀 걱정스럽긴 해. 유난스러운 시누이 될까 봐. 거기 앞에 콘솔 좀 열어 줄래?”
시누이라는 말이 귓전을 예민하게 스쳤지만, 그가 콘솔을 가리키며 어서 열어 달라고 채근하는 바람에 수아는 얼른 손을 뻗었다.
조수석 앞에 자리한 콘솔 박스가 열리는 순간, 수아는 저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켰다. 오렌지빛 조명이 들어온 작은 공간에는 빨간색 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것 좀 꺼내 줘.”
수아는 제 주먹만 한 상자를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그는 상자를 가뿐히 들어서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수아는 의문 어린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그가 시치미를 뚝 떼며 물었다.
“아뇨. 아니에요.”
짧게 대꾸하는 목소리에 저도 모르게 실망한 기색이 묻어났다. 수아는 그가 은은한 미소를 드리우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얼른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차가 레스토랑이 있는 곳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어디 가요?”
“땡땡이나 칠까?”
“미쳤어요?”
손님이 가장 많은 시즌이었다. 그는 레스토랑 다섯 개를 아우르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면서도 수아와 관련한 일을 챙기는 것을 게을리하지도 않았다. 그런 그가 어울리지 않는 말을 해 대서 수아는 하마터면 실소할 뻔했다.
“다 왔어.”
그의 차가 멈춰 선 곳은 서울 시청 앞 광장이었다. 대형 LED 크리스마스트리가 반짝반짝 빛나는 곳이기도 했다. 그는 비상등을 켜고, 운전석에서 내리고는 유유히 보닛을 돌아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수아는 얼결에 그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어릴 때 크리스마스트리를 보고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고 들었거든. 그런데 나는 한 번도 트리를 보고 소원을 빌어 본 적이 없어. 그래서 올해는 한번 빌어 보려고.”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수아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슨 소원인지 모르겠지만, 어서 빌고 출근하자는 의미였다.
“내년 5월쯤에 도수아랑 결혼하게 해 주세요. 결혼식장에 장모님이 건강한 모습으로 앉아 계실 수 있게 해 주세요. 신혼여행은 라벤더가 활짝 피는 엑상프로방스로 가고 싶고요. 그 후년 5월에는 배가 예쁘게 부른 도수아랑 바다가 멋진 곳으로 태교 여행 갈 수 있게 해 주시고, 그 후년 5월에는 아이 손 잡고 에즈로 휴가 갈 수 있게 해 주세요.”
그의 소원에 숨이 턱 막혀 왔다.
“어때, 내 소원 이루어질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