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7
손쓸 틈 없이 굵은 눈물방울이 그녀의 눈가에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내 소원 이루어질 것 같냐고.”
한승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그녀를 채근하듯 물었다. 그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한승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의문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가만히 기다려 줘야지. 소원을 이룰 수 있을 거라는 대답이 흘러나올 때까지, 잠자코.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벌렸다가 이내 다물기를 여러 번. 그녀가 거대한 크리스마스트리를 한 번 올려다보고는 한승에게 시선을 옮기며 물었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보드레한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내저은 그녀가 조용조용 읊조리기 시작했다.
“나랑 만난 지 3개월밖에 안 됐어요. 어떻게 그런 결심이 설 수가 있어요? 나는 당장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어두워질수록, 빛은 더 선명해지는 법이야. 네가 힘들어할수록, 나는 네 곁에 있어야겠다는 마음이 더 분명해졌어.”
한승은 의연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어린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다. 두 손으로 그녀의 양어깨를 감싸 쥐며 고개를 비스듬히 내려 시선을 맞추려 애써 보았다.
“대답해야지. 소원이 이루어질 것 같냐고.”
그녀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눈가에 그득한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한승은 재킷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상자를 꺼내어, 그 안에 담긴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주방에서는 반지를 낄 수 없으니 목걸이 줄에 반지를 걸었다.
쇄골 사이로 떨어지는 반지를 만지작거리며 그녀가 애써 미소를 머금었다.
태어나서 처음 빌어 보는 크리스마스 소원이 이뤄지길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출근하자마자 업무가 물밀 듯이 밀려들었다. 모임이 많은 연말연시에 손님은 넘쳐났고, 주방은 바삐 돌아갔다. 움직일 때마다 셰프 가운 안에서 움직이는 목걸이가 느껴졌다. 수아는 괜히 불안한 마음이 들 때마다 목걸이를 만지작거렸다.
그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소원을 빈 것처럼, 수아도 간절히 기도했다. 그가 빈 소원이 이뤄지게 해 달라고.
“도수아 씨, 이거 셰프님 방에 좀.”
수 셰프가 완성된 플레이트 하나를 수아 앞으로 내밀었다. 오늘 오찬에 서빙될 메인 요리 중 하나였다. 얇게 저민 참치 회 위에 트러플오일과 리코타 치즈를 곁들인 콥샐러드가 올려진 요리인데, 참치 회의 두께와 서빙 온도가 관건이었다.
“어서, 지금.”
“네.”
수아는 그랜드 셰프의 최종 확인을 위해 한승의 사무실로 향했다. 그는 성수동 레스토랑을 점검한 뒤, 1시간 후에는 삼성동으로 이동할 예정이었다.
“셰프님, 메인 컨펌 부탁드립니다.”
수아는 플레이트를 받친 쟁반을 들고 그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그는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다 말고 고개를 끄덕거리며 포크를 집어 들었다.
“오버 부킹 받지 말라고 분명히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 달리 서늘했다. 아무래도 다른 레스토랑에 예약 초과 문제가 생겼나 보다고 수아는 생각했다.
그는 준열한 시선으로 플레이트를 내려다보며 포크로 콥샐러드를 이리저리 휘저었다. 샐러드를 들어서 아래로 떨어뜨려 보기도 하고, 농도를 체크하듯 소스를 플레이트 여백에 그어 보기도 했다.
“식사 시간 타이트하게 잡는 걸, 좋아할 손님이 있겠어? 홀에 테이블 다시 배치해. 1시간 반 후에 갈 거니까, 그때까지 정리해 놔.”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통화를 마치고는 참치 회와 콥샐러드를 한입 크기로 들어서 입안에 밀어 넣었다. 눈썹을 슬쩍 올린 그가 고개를 천천히 끄덕거렸다.
“이대로 나가면 되겠네.”
그가 트레이 위에 포크를 내려놓고는 다시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수아는 얼른 트레이 손잡이를 잡았다.
“잠깐.”
그가 수아에게 짧게 읊조리고는 수화기 너머를 향해 지시했다.
“참치는 그대로 나가고, 프리 디저트는? 1시간 후에 가져와. 그래.”
수아는 트레이를 내려놓은 채로 통화를 마치는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일만 하고 가게?”
“그럼 뭘…….”
더 해야 하느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그의 입술이 수아의 입술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그의 입에서 향긋한 트러플오일 향이 넘어왔다. 집무용 책상 모서리를 사이에 두고 있던 그가 성큼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허리에 단단한 팔이 휘감겼다.
수아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의 가슴에 어정쩡하게 손을 얹었다.
“하아, 셰프님……. 저 주방에 가 봐야…….”
간신히 떨어진 입술 새로 불안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 아무도 안 찾아. 걱정 마.”
그의 입술이 턱 선을 타고 내려가 목덜미를 더듬었다. 스스로 걸어 준 목걸이를 확인하겠다는 듯이 그의 입술을 점점 더 아래로 향했다.
단추 하나가 툭 풀렸다. 목걸이와 쇄골 사이에 뜨거운 입술이 여러 번 닿았다가 떨어졌다. 수아는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움켜쥐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허리를 배회하던 손이 셰프 가운을 들치고 살갗을 쓸며 위로 올라왔다. 브래지어 컵 아래를 파고든 손길이 덥석 가슴을 움켜잡았다.
“셰프님, 문 안 잠갔어요.”
수아가 새된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절로 잠겨.”
말도 안 되는 소리하지 말라고 그를 밀어내야 하는데, 입술이 다시금 먹혀들어 갔다. 부드럽고 뜨거운 혓바닥이 입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익숙한 듯 음란하게 점막을 훑는 움직임에 머릿속에 있던 생각들이 전부 휘발되었다.
“으음.”
그는 낮게 신음하며 수아의 엉덩이를 받쳐 안았다. 수아는 공중에 떠오른 다리로 그의 허리를 휘감아 안았다. 아슬아슬하게 맞닿은 비부에서 딱딱하게 올라붙은 그의 남성이 느껴졌다. 무섭게 움직이는 본능 앞에서 이성은 맥을 못 추었다.
푹신한 소파에 등이 닿았다. 그의 손길이 다급하게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소파 가죽의 차가운 온도가 엉덩이에서 노골적으로 느껴지자 드러난 살갗에 소름이 끼쳤다.
그는 더운 숨을 몰아쉬며 바지 버클을 풀고는 지퍼를 끄집어 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 흉흉하게 발기한 물건이 수아를 향하고 있었다.
“솔직히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소원을 하나 더 빌었어.”
수아는 데워진 숨결 사이로 조용히 물었다.
“무슨 소원이요?”
능숙하게 콘돔을 씌우는 그를 바라보는데, 그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당장 도수아랑 한 번만 하게 해 달라고.”
그의 짓궂은 말을 탓할 새도 없이 밀부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졌다. 젖은 공간이 갈라지는 소리가 외설적으로 들려옴과 동시에 쾌감이 빈틈없이 들어찼다.
신음이 새어 나올 것만 같아서 수아는 손등으로 얼른 입을 막았다. 한껏 허리를 뒤로 물렸던 그는 단숨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흐읍.”
도리질을 치며 입을 앙다물었다. 아무리 욕정이 치솟았어도 짐승처럼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는 것은 이상했다. 보조 주방에서의 정사도 내내 마음에 걸렸었다. 다시는 침대가 아닌 곳에서 그에게 안기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무서운 본능은 그녀의 다짐을 무참히 깨 버렸다.
단단하고 굵직한 물건이 깊숙이 박혔다가 이내 뽑혀 나갈 때마다 수아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슬쩍 들썩이기까지 했다. 엉덩이를 타고 흘러내린 애액이 소파에 고여서 질척거리는 소음도 더해졌다.
밀부에서 시작된 진득한 쾌감이 금세 배 속으로 흘러들었다. 태내를 속삭이는 쾌감에 거침없는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아서 손등을 아프게 깨물었다.
억눌린 교성이 거슬렸는지, 그가 수아의 손을 잡아끌었다.
“하으읏. 제발.”
수아는 애원하듯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꼬리를 타고 눈물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가 눈물 자국을 혀끝으로 핥아 올리며 읊조렸다.
“소리 내도 안 들려.”
“거짓, 말.”
힘겹게 흘러나오는 미약한 숨결 사이로 단어가 흩어졌다. 수아는 고개를 슬쩍 들어 올려 그의 입술을 찾아 물었다. 손등을 물 수 없으면 그의 입술이라도 필요했다.
“우읍.”
뜨겁게 벌어진 입안으로 신음이 흘러 들어갔다. 가녀린 팔이 그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살이 부딪히는 소리가 빨라지고, 살갗에 오르는 열기가 더해질수록 머릿속은 아득해져만 갔다.
끝없는 절정을 경험한 이후로 그와의 관계는 언제나 이렇듯 한계를 모르고 내달렸다. 어디에 누워 있는지, 자신이 얼마나 헐떡이고 있는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려 어떻게 허리를 흔들어 대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지독한 쾌락이었다.
섹스로 망각할 수 있는 극한점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었다.
끊임없이 그의 입안으로 신음을 쏟아 내며 열심히 그의 도톰한 혀를 빨아 댔다. 그의 모든 것을 빨아들일 수 있다면 있는 힘을 다 쓸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허벅지 안쪽이 덜덜 떨려 왔다.
목울대를 연신 울려 대던 소리도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을 만큼 빠듯하게 조여드는 느낌이 나면서, 그가 더욱 거대하게 느껴졌다.
“으음.”
그가 짙게 신음하며 몸을 깊이 파묻었다. 절정을 함께 맞는 순간은, 그와 처음 마음을 확인했던 순간만큼이나 뭉클하고 짜릿했다.
질척이는 마찰음과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더운 숨이 속절없이 흘러나온 순간, 그가 쑥 빠져나갔다. 아쉬운 한숨이 새는 소리에 그가 짙은 시선으로 수아를 내려다보며 기둥뿌리부터 잡고 콘돔을 밀어냈다.
“하아.”
후희가 묻어나는 더운 숨을 내뱉는 그의 모습이 지나치게 외설적이어서 수아는 숨을 죽인 채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한 번 더?”
그가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수아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가 빠져나감과 동시에 빠르게 이성이 돌아온 수아는 얼른 고개를 내저으며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매무새를 정리했다.
옷을 다 챙겨 입고, 티슈를 뽑아 소파 위를 닦으려는데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요.”
“셰프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서형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는 잠시 할 말을 잃은 듯 멍해졌다. 사무실 안에 숨길 수 없는 짙은 기운이 감돌고 있는 것 같아서, 수아 역시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세 사람 중에 뻔뻔하게 멀쩡한 얼굴을 한 사람은 그뿐이었다.
“손님이 오셨는데요. 권혜림 변호사님이라고 하시던데.”
크리스마스에 연락도 없이 찾아온 권 변호사의 등장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불안하게 뒤엉켰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 조금 기가 막힌 깨달음이긴 하지만, 서형이 어려움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을 보면 문은 잠겨 있지 않았던 게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