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8
수아는 그를 응시하고 있던 눈에 조금 힘을 주었다. 그의 눈동자에 의문이 어리는가 싶더니, 수아가 왜 그러는지를 눈치챈 듯이 시선을 회피했다.
“권 변호사 어디 있어, 지금?”
그의 심상한 물음에 서형의 등 뒤에서 권 변호사가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여기요.”
이따 따로 그에게 따질 말을 생각하며 수아도 권 변호사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 도수아 씨도 같이 있었네요.”
권 변호사의 얼굴에 생기가 흘러넘쳤다. 마치 먹잇감을 사지에 몰아넣고 마지막 여유를 부리는 포식자처럼 그녀는 느릿하게 웃었다. 그녀는 서형에게 안내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하고는 비켜 달라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서형이 나가고 사무실 문이 닫히자, 권 변호사는 웃음을 싹 지운 얼굴로 두 사람을 마주했다.
“배성헌 씨가 긴급 체포됐고, 백화 건설에 대한 영장이 청구됐어요. 영장 나오는 대로 중앙지검에서 압수수색 들어갈 겁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수아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배성헌이 왜요?”
차갑게 식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걷잡을 수 없는 추악한 예감에 소름이 오싹 돋아났다.
“도 의원님이 15년 전쯤에 재심으로 억울한 옥살이에서 풀어 준 사람이 있어요. 반대로 그때 강간 살인죄로 잡혀 들어간 진범이 있고요. 그 작자가 모범수로 작년에 출소했는데, 배성헌이 그 작자한테 도진택 의원이 아니었으면 잡히지 않았을 거라는 말로 현혹해서.”
권 변호사는 내내 평정을 유지한 채로 수아를 응시하며 말을 하다가 한승을 흘끗 보았다. 한승은 성큼 걸음을 옮겨 수아의 곁에 바짝 다가섰다. 권 변호사가 내뱉을 말은 안 들어도 뻔한 내용이었다.
“도진택 의원 살인을 사주했어요.”
순간 목덜미를 타고 기분 나쁜 열기가 오르는가 싶더니, 심장이 떨어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수아는 깊게 숨을 한 번 고르고는 물었다.
“어떻게 알게 됐어요?”
“우리로서는 운이 좋았어요. 배성헌이 대가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는지, 엿 먹으란 식으로 범인이 자수했어요.”
맞잡은 손이 파들파들 떨렸다. 떨림을 멈추려고 주물러 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그가 수아의 어깨를 꽉 붙들어 안았다.
“모범수로 풀려났다고, 새 삶을 살게 되었으니 도 의원님한테 한 번만 만나 달라고 했대요. 범인이 가져간 음료수에는 혈액 검사로도 성분 검출이 어려운 환각제가 들어 있었고, 야산에서 스스로 목을 맨 것처럼 위장했다고. 범인이 전부 진술했어요. 환각제를 구해 준 것도, 야산에 적당한 자리를 알아봐 준 것도 배성헌이라고 하고요.”
거칠고 뜨거운 숨을 간헐적으로 뱉어 냈다. 눈물이 흐르기 시작하면서 짐승 같은 흐느낌이 흘러나왔다. 그는 수아를 단단한 품에 끌어안으며 가만히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끅끅대는 울음이 걷잡을 수 없이 터졌다.
장례식장에서 울 만큼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억울한 죽음의 실체가 밝혀지자 가슴이 생으로 뜯기는 기분이었다. 수아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는 전부 아버지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미워하기도 많이 미워했다. 가정에 소홀히 하는 가장의 모습을 원망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미워한 만큼, 원망한 만큼, 사랑하고, 존경했다. 자랑스러웠다.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청렴하고 결백한 아버지의 삶은 수아의 자존심이나 다름없었다.
그런 아버지가 신념을 지키고, 소신껏 행동하다가 돌아가셨다. 억울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도수아 씨, 크리스마스에 이런 소식 전하게 돼서 미안해요. 체포 관련한 뉴스가 곧 나올 거라, 나도 어쩔 수 없었어요. 백화 건설 압수수색 들어가면 백화 건설에서 의원님께 접근했던 이야기도 밝혀질 거고, 리조트 개발 이해관계가 얽힌 고위급 인사들까지 줄줄이 소환될 겁니다. 마음 단단히 먹어요.”
수아는 그에게 몸을 기댄 채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권 변호사는 자신의 아버지도 이 일에 신경을 쓰고 있다는 말을 끝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불과 10분 만에 심장이 난도질당한 기분이다. 나락으로 떨어진 것처럼 몸이 바르르 떨렸다. 떠나가는 줄도 모르고 눈을 감았을 아버지를 떠올리자 설움이 복받쳤다.
그는 수아를 품에 안은 채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그의 단단한 허벅지 위에 올라앉아서, 몸을 잔뜩 웅크리고 쿵쿵 뛰는 심장이 있는 뜨거운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기 시작했다.
“수아야.”
그의 나직한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왔다. 아득하게 멀게만 느껴져서 수아는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내가 옆에 있어.”
그는 제 존재를 상기하듯 또박또박 말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말을 가르치는 것처럼 자상하고 느릿한 어조였다.
“내가, 네 옆에 있어. 수아야.”
울음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워서 날것 그대로의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수아의 몸을 꼭 감싸 안았다.
지독하게 억울하고, 화가 나고, 슬픈데, 그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울음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꾹 감은 눈꺼풀에 그의 입술이 조심스럽게 닿았다가 떨어졌다. 경건하게까지 느껴지는 입맞춤에 심장이 바르르 떨렸다.
* * *
위생복을 입은 수아는 엄마가 누워 있는 환우용 침대 옆에 서서 마른 얼굴을 가만히 쓸어 넘겼다. 엄마는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빚쟁이들에게 시달리기 시작하면서 정신을 놓았다.
수아가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건강을 제대로 보살피지 않은 탓에 완치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던 암은 갑상샘까지 전이되어 있었다.
수술 날짜는 일주일 뒤로 잡혔다. 엄마는 여전히 의식이 오락가락했지만, 가끔 의식이 돌아올 때면 수아의 이름을 희미하게 울부짖는다고 했다.
“엄마, 아빠 이제 좋은 데 가실 거야. 아빠가 좋은 데 가신다고, 엄마도 따라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줘. 나 엄마한테 꼭 보여 주고 싶은 사람 생겼어. 정말 괜찮은 사람인지 엄마가 일어나서 봐 줘야지. 응?”
노랗게 변해 버린 초췌한 얼굴을 어루만지며 수아는 울음을 삼켰다. 엄마가 듣고 있을지도 모르니, 울음을 터뜨릴 수는 없었다.
“엄마, 힘내야 해. 나도 힘낼게.”
면회 시간을 빠듯이 채우고 난 뒤, 수아는 중환자실을 빠져 나왔다. 안쓰러운 눈빛을 한 그가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수아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가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수아는 새삼 고마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연애 초기, 알콩달콩한 일만 넘쳐도 모자란 마당에 울분을 터뜨려야 하는 일들만 계속되었음에도 그는 한결같은 태도로 수아의 곁을 지켰다.
어둠 속에서 빛이 분명해진다는 그의 말처럼, 그는 수아가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려고 할 때마다 굳건히 자리를 지켜 주었다.
이 남자가 없었다면…….
“만약에 말이에요.”
수아의 입에서 처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만약에 나는 셰프님을 다시 만나지 못했다면, 죽었을 것 같아.”
그가 수아의 어깨를 감싼 채로 옮기던 걸음을 멈추고 심각한 얼굴이 되어 내려다보았다.
“정말로. 이 모든 걸 나 혼자 감당할 수 없었을 거예요. 사실 시은 언니 찾아갔을 때도, 모든 걸 포기한 상태였어요. 몸을 팔아서라도 돈을 구해야 하는 처진데, 그러기는 죽기보다 싫고.”
아버지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전해 듣는 순간에도 그는 수아의 곁을 강건히 지켰다. 그런데 수아가 고통스러웠던 순간을 내뱉는 동안, 그의 얼굴이 아프게 일그러졌다.
“시은 언니가 동생 이름 빌려서 취직하라는데, 그것도 나는 그 당시로써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존심이 너무 상해서…… 정말 죽고 싶었던 것 같아요. 죽지 못해 산다는 말이 이해가 될 만큼.”
수아의 목소리에서는 눈물 한 점 묻어나지 않았다.
“처음 주급 받았던 날, 그 돈이 너무 큰 돈 같아서 한참을 고민했어요. 이걸로 도망갈까. 어디든 가 볼까. 가서 돈이 다 떨어지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다음엔 정말 죽는 길밖에 없는 거 아닌가.”
그는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한 번 쓸어내리고는 붉은 기가 가득한 눈빛으로 수아를 내려다보았다.
“그런데 꼭 살라고 말하는 것처럼, 셰프님이 나타났어요. 셰프님 레스토랑인 줄 알고 난 뒤에는, 언제쯤 마주치려나 무의식적으로 바라기도 했던 것 같아요. 나 되게 욕심 많죠? 내 처지에 셰프님을 만나서 어쩌겠다고.”
“수아야.”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아프게 울렸다.
“홀에서 나한테 무심하게 대하는데도, 눈앞에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날 다시는 안 본다고 해도, 레스토랑에서 쫓겨나고 다시 길바닥에 나앉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어요. 이렇게 봤구나, 하고. 정말 간절히 바랐어요. 멀리서라도 한 번만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수아는 애써 미소를 머금으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요. 내 앞에 다시 나타나 줘서.”
그가 깊은숨을 몰아쉬며 품 안에 수아를 당겨 안았다.
“사랑해요.”
품 안에서 속삭이는 소리에 그의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수아는 그의 품을 파고들며 꼭 끌어안았다.
지금은 제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말 한 마디뿐이었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소중히 품었다.
병원 복도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지금껏 살면서 수아는 사람들의 시선을 부단히 신경 쓰며 살았다. 경계하고 살피며 끊어 내고 자중하기를 반복했다.
속은 곪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했고, 일부러 무심해지려 노력했다.
그런데 이 남자한테만큼은. 이 남자만큼은 달랐다. 그동안 다른 이들을 피하고자 주변을 단속하고 살았다면, 이 남자에게는 열띤 관심이 향했다. 자중하는 대신 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끓어올랐다.
“나도, 사랑한다.”
잔잔히 고백하는 그의 목소리가 포근한 물결이 되어 몸을 부드럽게 감싸는 듯했다.
병원 로비로 나서자, 외래 환자 대기 공간에 틀어 놓은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백화 건설의 배성헌 씨는 도진택 의원에게 개발 제한 해제를 청탁하기 위해 접근……. 검찰은 배씨를 살인 교사 혐의로 기소했으며, 금품이 오간 정황이 포착된 국회 선임위 소속 의원 중 일부가 금일중으로 소환될……. 한편 배성헌 씨의 타깃이 되었던 도 의원의 딸, 도 모양은 현재…….』
수아에 관한 뉴스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고영석 기자가 제일 먼저 특종을 터뜨리면서 백화 건설과 배성헌의 악랄함에 이목이 쏠리도록 시간을 벌어 준 덕에,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벌 수 있었다.
그는 수아의 손을 꼭 움켜잡으며 걸음을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