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명한 비밀-59화 (59/62)

#059

연일 뉴스에서는 도진택 의원의 딸에 관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쏟아졌다. 비슷한 뉴스를 보도하는 매체의 대부분이 도 의원의 견제 세력이었던 친야당 쪽에 속하는 곳들이었다.

배성헌과 백화 건설의 수사 보도에 쏠리는 이목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한 수작이었다. 백화 건설은 국회선임위 국토위뿐 아니라 국교부 차관급 인사들에게까지 선을 대고 있었다.

그들이 불법 토지 매입으로 인한 부당이득을 취한 것도 모자라, 원주민들을 몰아내는 과정에서 폭력 행위와 외압이 존재했었다는 사실도 속속 밝혀졌다.

이제껏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 소수 약자인 원주민들의 기사가 등장했고, 그 과정에서 한 가정의 가장이 분신자살했다는 안타까운 사연이 알려지면서 사건은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이 모든 것을 막기 위해 그들이 택한 것은 배성헌이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도진택 의원의 딸 도수아였다.

그녀는 여론이 가라앉기를 기다리는 듯했지만, 한승은 그녀를 둘러싸고 일어나는 부당한 일을 더는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정말 한가한 날이 없네요.”

침대에 누운 그녀는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한승은 그녀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구정 지나면 조금 한가해질 거야. 연말 모임을 새해 모임으로 대체하는 경우도 많아서, 해가 바뀌고도 바쁘거든.”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의 눈은 이미 감겨 있었다. 한승이 그녀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나 너무 피곤해요.”

예전 같았으면 그녀를 살살 달래고 흥미를 돋운 뒤, 그녀가 눈물을 쏟으며 흐느낄 때까지 안았을 것이다. 그녀가 고단해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는 한승은 그저 단단한 품으로 그녀를 안아 줄 뿐이다.

새벽녘, 얕은 잠에 빠졌던 그녀는 이내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한승 역시 그녀의 기척을 느끼자마자 눈을 떴다. 태연한 척하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그녀는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막 잠이 들 무렵에는 피곤함에 겨워 눈을 감지만, 죽지 않을 만큼의 피로가 가시고 나면 그녀는 눈을 뜨고 앉아 밤을 지새우다가 한승의 기상 시간에 맞춰 도로 침대에 누웠다.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게 그녀의 뜻이라면 존중해 줘야 했다.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인 성격을 가진 그녀에게 섣부른 위로의 말을 건넸다가는 상처를 줄 수도 있기에.

한승이 그녀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그녀의 담담했던 고백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굽히느니 부러지고 마는 그녀의 성정에 비추어 볼 때, 그녀가 한 말이 거짓일 리 없다.

그리고 지금은, 부친에게 그대로 물려받은 그 성정 탓에 혼란스러운 것처럼 보였다. 청렴하게 살았던 도 의원만큼이나, 그녀는 지금의 상황이 견디기 버거울 것이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싶겠지.

한승은 그녀가 뒤집어쓰는 가면에 속아 줄 뿐이다.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그녀를 이대로 둘 생각은 없었다. 적당한 타이밍을 재야만 했다.

그녀를 둘러싼 세상의 소문이 극에 달하는 시점, 그때 이목을 끌어와 흐름을 반전할 계획이었다.

“성수동에 내려 줄게.”

“셰프님은요? 성수동으로 안 가요?”

레스토랑 안의 질서는 한승의 뜻에 따라 재정비되었다. 당분간은 핫 키친의 수 셰프가 한승의 역할을 대행할 것이다. 약 3년 후에는 그 자리에 그녀가 앉을 것이다.

“오전에 잠깐 들를 데가 있어서. 저녁 준비 때는 나갈 거야.”

한승은 오트밀 우유를 홀짝이는 그녀의 볼록한 볼에 입을 맞추었다. 그 바람에 오동통한 입술 새로 하얀 우유가 새어 나왔다. 그녀가 미간을 찌푸리며 노려보는 틈을 타, 한승은 그녀의 입술을 쪽 빨아 마셨다.

그녀의 입안에 있던 미지근하고 달콤한 우유가 입안으로 흘러들었다. 한승은 입맛을 다시며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새 보고 싶을까 봐 겁나?”

태연히 물은 말에 새침하게 굴 줄 알았던 그녀가 선선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가끔 그녀가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일 때면 한승은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의 작은 몸에 팔을 두르고 품 안 가득 끌어안았다.

“보고 싶어도 조금만 참아.”

이제 보기 싫어도, 너는 평생 나만 보고 살게 될 테니까.

프러포즈를 하기는 했지만,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서 빈 소원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사실 희박했다. 하지만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으란 법은 없다.

성수동 레스토랑에 그녀를 내려 준 한승은 곧장 양재대로에 자리한 비승 그룹 본사로 향했다. 사람을 보내겠다고 하는 것을 만류하고 한승은 홀로 첫 출근길에 오른 셈이다.

대회의실을 가득 매운 사람들은 오늘 언론에 공개될 임원 인사 발령과 관련한 인물들이었다. 그중에 한승이 특유의 꼿꼿하고 고아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임원 중 일부는 노골적으로 한승을 훑어보며 적대시했고, 일부는 어떻게 줄을 댈까 고민하는 눈치였고, 또 다른 일부는 관심이 없는 척했다. 어디에서나 보이는 반응과 비슷한 양상에 한승은 별다른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금 한승이 초미의 관심을 두고 있는 곳은 따로 있었다.

이윽고 차용훈 부회장이 회의실에 모습을 나타내자 모두 기립하여 예를 갖췄다.

“이렇게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다들 앉으시죠.”

차 부회장의 시선이 장남의 얼굴에 잠시 머물렀다가 이내 물러갔다. 키우기 어렵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는 아들인데, 요즘 아들은 차 부회장이 가장 다루기 어려운 상대가 되었다.

오늘 비승 푸드의 이사 자리로 취임한 아들은 취임 전에 이미 신제품 개발 기획안을 내놓았다. 실무진은 곧장 생산과 유통 과정에 돌입해도 무리가 없을 거라는 견해를 내놓을 만큼 실효성 높은 기획안이라 했다.

회의를 마친 뒤, 아들은 또 다른 무시무시한 통보를 할 것 같은 얼굴로 아비를 찾았다.

“이렇게 드나드는 거 불편하구나.”

장남의 얼굴이 내심 반가우면서도 차 부회장은 어깃장을 놓았다.

“앞으로 많이 불편하실 텐데, 익숙해지시는 게 어떨까요? 아니면, 오늘 당장 사직서 드리고요.”

비스듬히 미소를 머금은 아들의 얼굴을 차 부회장은 찬찬히 뜯어보았다. 이 녀석이 이런 농담도 할 줄 아이였나, 싶은 생각이 들 만큼 아들의 얼굴은 낯설고도 다정했다.

매사에 상냥한 태도를 보이지만, 일정 선을 넘지 않는 아이였다. 그 누구에게도 마음을 붙이지 않았던 아들이 하필 정을 붙인 곳이 숨진 도진택 의원의 딸이었다.

제 아비를 닮았는지 곧은 성정을 지닌 듯 보였다. 가족이 모두 모인 크리스마스 아침 식사 자리, 침잠된 분위기 속에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긴장감 가득한 얼굴로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가여운 아이의 안타까운 진심이.

적당히 만나다가 헤어질 인연이라고 여겼던 심술이 그 순간 녹아내렸다. 차 부회장은 오늘 아들이 저지를 일에 힘을 실어 주는 것으로 뜻을 굳혔다.

“기사는 정오 전에 나갈 게다.”

아들의 얼굴에 그 어느 때보다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제가 가고 싶었던 길을 포기했는데도, 불만은커녕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집무실에 마주 앉은 아들의 변화가 신기했다.

놀라운 변화를 이끌어 낸 사람은 당연히 수아였다. 앞으로 아들이 살아갈 삶의 전부이자, 약점이 될 수도 있는 아이.

차 부회장은 그 아이가 결코 약점이 되는 것을 지켜만 보지는 않을 것이다.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아들 내외를 보호하는 데 힘을 쏟을 것이다.

그것이 지나온 시간에 대한 참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별채에 견과류 알레르기가 있는 손님이 있으니까 조심해 주고. 그리고 홀에 10인용 테이블은 환갑 모임이라고 하는데, 예전에 과음하고 말썽 부린 적 있는 손님이니까 주류 주문 내용 신경 쓰고. 문제가 될 것 같으면 보고하고. 이상.”

점심 장사를 앞두고 짧은 회의를 마친 뒤 각 파트로 직원들이 흩어졌다.

“도수아 씨, 커피?”

잠깐이 짬이 나는 시간, 서형이 수아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친근하게 웃어 댔다.

“저 10분밖에 시간 없는데요.”

“알지, 알아요. 10분이면 충분할걸요?”

충분할걸요? 서형의 어조는 확신이 아닌 예상에 가까웠다. 먼저 커피 한잔하자고 말한 사람이 내뱉기에는 다소 어색한 말이었다.

휴게실에 들어서자 삼삼오오 모여 있던 직원들이 심상한 묵례를 건네 온다. 처음 자신이 기시아가 아닌 도수아라는 사실이 밝혀졌을 때, 직원들의 반응은 하나같이 차가웠었다. 한승이 부단히 노력해서 직원들을 설득했고, 수아는 다른 셰프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일을 꾸려 나갔다.

가끔 그가 사무실로 불러내서 얼굴이 홧홧하도록 짓궂은 짓을 하기는 했지만, 그 때문에 수아는 남모를 긴장감 속에서 일해야 했지만, 그마저도 좋았다.

여느 때처럼 커피 잔을 손에 든 수아는 서형이 이끄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서형이 좀처럼 켜지는 일이 없는 TV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홀짝이는 사이, TV에서 뉴스가 흘러나왔다.

『오늘 발표된 비승 그룹의 임원 인사를 일각에서는 3세 경영의 신호탄으로 보고 있습니다. 서연권 기자의 보도입니다. 오늘 비승 푸드의 이사로 발령된 차한승 이사는 차용훈 부회장의 장남으로…….』

뉴스에서 그에 대한 보도가 흘러나오자, 휴게실에 자리한 셰프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가 레스토랑 경영을 뒤로하고 그룹 일에 몸담을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언론보도를 보니 이제야 피부로 와닿는 느낌이랄까.

다들 수아와 같은 감상인지, 조용히 뉴스를 시청했다.

『운영하던 레스토랑은 현재 대표 대행체제에 돌입했으며, 차한승 이사의 약혼녀가 경영을 이어받을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정부는 내달 인상키로 한…….』

뉴스가 끝나자 다들 별스러울 것 없다는 듯이 흩어져 갔다. 오직 수아만이 그대로 굳은 채로 자리를 지켰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말 빨라.”

서형이 휴대전화를 테이블 위에 올리고는 수아 쪽으로 밀어 넘겼다. 수아는 휴대전화 화면에 떠 있는 기사를 확인하며 쿵쿵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비승 그룹 후계 차한승 이사와 도수아 셰프의 운명적인 로맨스』

한동안 휴대전화 인터넷 창만 봐도 불안증에 걸린 사람처럼 속이 울렁거렸었다. 수아를 둘러싼 온갖 의혹에 치가 떨렸다.

그런데 마치 누군가 손을 쓴 것처럼 부정적인 기사는 전부 자취를 감추었다. 시선을 두는 것조차 두려웠던 인터넷 창에는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한 여자와 정의 실현을 꿈꾸다 안타깝게 목숨을 잃은 그녀의 아버지에 관한 감동적인 이야기만이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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