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답답해도 뛸 순 없다 (1)
<축구는 인생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 중에 가장 중요하다 - 카를로 안첼로티>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날의 여름, 나는 맹렬히 후회하고 있었다.
사건의 발단은 티켓팅이었다.
잉글리시 풋볼 리그 원, 다시 말해 영국 축구 3부 리그 경기를 꼭 봐야 할 이유가 갑자기 생겼는데, 막상 표를 구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매진 상태였다.
하긴 당일치기 예매는 원래 쉽지 않다. 유럽 사람들 대부분은 축구에 미쳤고, 영국은 특히 더 그렇기 때문이다.
미리미리 예매했으면 좋았겠지만, 믿음이 부족했다.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권을, 단 1점 차로 따라붙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이렇게 된 거 직접 보고 싶었다. 지금은 몰락해버린 옛 소속팀이 화려하게 부활하는 모습을.
물론 작년처럼 승격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극장골을 맞고 침몰할지도 모르지만, 그건 나중에 고민할 문제다.
보고 싶다. 그런데 티켓은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일단 시즌권을 사둘 걸 그랬지.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머리를 쥐어뜯는 내게, 여동생 희주가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오빠, 내가 도와줄까?”
“네가 무슨 재주로?”
일개 여대생에게, 이미 매진되어버린 축구 경기 티켓을 구하는 재주가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런데도 희주는 자신만만했다.
“아이돌 콘서트 티켓팅에 비하면 축구 표 끊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거든? 그래서 해줘, 말아?”
“바라는 게 뭐냐?”
“샤넬 백, 올해 신상으로.”
“콜.”
곧바로 희주가 움직였다.
마우스를 클릭하는 희주의 손길은 민첩했고 일정을 검색하는 눈은 사냥감을 바라보는 맹수 같았다.
당일 밤비행기 예약까지 15분, 호텔 확보까지는 25분. 그야말로 용맹무쌍한 티켓팅이었다. 요즘은 이 정도는 되어야 아이돌 콘서트 보러 다니는 걸까?
“그런데 동생아, 비행기표가 퍼스트 클래스이고, 호텔 객실이 스위트룸인 이유는?”
“음, 오빠도 이제 사회적 지위가 있으니까?”
“사심이 섞인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는 자기도 따라오려는 종류의 사심이.
“그 정도 보너스는 있어야지.”
그런 셈 치자.
경기장 티켓은 조금 시간이 걸렸지만, 그래봤자 3시간. 녀석이 전화기를 붙잡고 한참을 떠들어댄 성과였다. 아, 물론 영어로.
그러니 지금, 내가 영국까지 날아와서 경기를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희주의 공이다.
문제는 희주가 구한 ‘경기장 좌석’이 익스클루시브 박스라는 점이었지만.
익스클루시브 박스는 이름 그대로 독립된 별실이었다. 보통 시즌 단위의 장기 계약으로 빌려주곤 한다.
경기 한번 보기에는 낭비가 너무 심하다.
이러려고 티켓팅 맡겼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 돈으로 때울 줄 알았으면 그냥 내가 직접 했을 거다.
정작 이 사달을 일으킨 장본인 희주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내 옆에서 히죽거리는 중이다.
“아늑하지? 좋지? 자리 잘 골랐지? 경기장도 잘 보이고, 일단 별실이니까 옆사람들하고 부대낄 일도 없고.”
대신 너와 부대끼는 중이니 오십보백보 같은데.
“익스클루시브 박스는 일종의 VIP석이니까, 사회적 지위와 품격에 딱 맞잖아?”
나는 시무룩하게 대답했다.
“고오맙다. 덕분에 내 사회적 지위에 대해 다시 성찰해볼 기회가 생겼어.”
VIP석치고는 너무 휑하고, 좌석이 편안하지도 않았다. 의자는 대충 두개쯤 가져다둔 게 전부이고, 벽면은 콘크리트가 훤히 드러났다.
다과는커녕, 웰컴 드링크조차 안 나온다.
“영국 요리는 맛이 없더라고. 그래서 케이터링은 안 불렀어.”
아, 그러세요?
“솔직히 말하면, 내부 인테리어까지 처리하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거든. 음식도 그렇고.”
“시간이야 당연히 부족했겠지만··· 그걸 왜 네가 하는데? 경기장에서 해주는 거 아니야?”
“장기 계약이니까.”
대충 이해했다. 계약 기간에는 마음대로 꾸미고, 나갈 때는 원상복구 하라는 뜻이겠지.
그놈의 장기 계약.
“얼마나 들었냐?”
“별로 안 비쌌어. 대충···.”
선수 시절 주급의 600배 정도의 금액.
“생각보다 싸네?”
“그렇지?”
13년 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금액이겠지만, 지금의 내게는 그야말로 돈도 아닌 금액이다.
내게는 사람의 가치가 보이니까. 그리고 유소년 시절의 경험 덕분에, 개인의 노력으로는 몸값이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확신할 수 있었다.
단언할 수 있다. 나는 무릎이 박살날 정도로 뛰었으니까.
다음부터는 쉬웠다. 투자자로 진로를 바꾼 나는, 그야말로 돈을 갈퀴로 쓸어 담았다. 페이스북, 테슬라, 넷플릭스, 우버 같은 회사에 두루 투자해서 큰 성공을 거뒀다.
투자는 무척 간단한 방식으로 했다. 내 눈에 비친 창업자의 몸값과 현재 가진 재산을 비교하는 식이었다.
몸값과 재산이 비슷해지면 고점, 차이가 크면 저점으로 보는 식이었다.
유일하게 판단하기 어려운 회사는 아마존이었다··· 베조스 이마에 0이 하도 많이 붙어서 세기 힘들었거든.
베조스가 대머리라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아무튼, 덕분에 돈은 엄청나게 벌었고, 내 이마에도 0이 무진장 많이 붙어버렸다.
몇천만 원 정도는 돈도 아니지, 암.
그렇게 생각하니 익스클루시브 박스가 엄청 아늑하게 느껴진다. 콘크리트 회벽이 인더스트리얼 감성으로, 썰렁한 내부 인테리어가 미니멀리즘으로 보일 만큼.
덤으로 희주 얼굴이 미인으로··· 이따 경기 끝나고 안과에 가봐야겠다.
그래도 칭찬은 해줘야겠지.
“잘했어. 아주 잘했어.”
“에헤헷. 역시 현질이 최고라니까?”
희주 얼굴에 그야말로 만족한 고양이 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배경음으로 갸르릉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피식 웃어준 다음, 나는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슬슬 선수들이 입장하는 중이었다.
빨갛고 하얀 세로 스트라이프. FC 선덜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배합이다.
13년 전까지 내가 입던 유니폼이기도 하다.
내로라하는 강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을 프리미어 리그에 머물렀고, 아주 가끔 챔피언쉽에 강등되는 게 고작이었던 팀.
내 십 대 시절을 모조리 바쳤던 그 팀은 지금 리그 원, 그러니까 영국 3부 리그에 머무르는 중이다.
옆에서 희주가 물색없는 소리를 했다.
“연속 강등이었지?”
“잘 아네.”
“그야, 다큐멘터리 봤으니까.”
하긴, 최근에 절찬 상영했다고 들었다. 선덜랜드의 다큐멘터리를.
기획 당시에는 우연히 1부리그에서 미끄러진 팀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내용이었다는 모양이다.
선덜랜드 정도 되는 팀이 2부 리그에 오래 남아있을 리 없다고. 챔피언쉽에서 뛰는 건 한 해뿐이라던 기획 의도는, 절반만 들어맞았다.
선덜랜드는 한 해 만에 챔피언쉽을 떠났다. 그저 방향이 아래쪽이었을 뿐이다. 홈 20경기 무승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은 덤이었다.
“나는 그거 안 봤는데.”
“다행이네. 봤으면 큰일 났을 거야. 시시해서 죽고 싶어졌을지도 몰라.”
분통 터져서 죽는 게 아니라?
“그거, 시즌 2도 나왔더라.”
알고 있다. 몰락한 구단의 부흥기로 기획되었지만, 찍다 보니 엔딩이 바뀌었겠지.
아무리 훌륭한 PD라도, 플레이오프 최종전에서 후반 종료를 6초 남기고 역전골을 얻어맞고 침몰할 줄은 예상 못 했을 테니까.
안 봐도 내용이 훤해서, 차마 다큐멘터리는 아직도 못 보고 있다.
내 표정을 살피던 희주가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그래도, 오늘은 다를 거야.”
오늘은 리그 원의 시즌 마지막 경기였다.
선덜랜드는 현재 8위에 머무르고 있지만, 상위권과의 승점 차이는 고작 1점.
비기기만 해도 일단 희망이 생기고, 혹시라도 이긴다면 다른 팀의 결과에 따라 최대 3위까지 바라볼 수 있는 상태였다.
승격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하겠지만, 그래도 희망의 불씨는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그러게, 오늘은 꼭 이겼으면 좋겠다.”
“틀림없다니까? 내기해도 좋을 정도야.”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 같다?”
그러자 희주가 내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나는 오빠가 옛날에 얼마나 노력했었는지 아니까. 그런데도 데뷔하지 못했다는 걸 아니까. 그러니까.”
희주의 얼굴에서, 평소의 웃음기는 사라져 있었다. 녀석이 꽤 진지한 표정으로 덧붙였다.
“프로로 데뷔한 저 사람들은, 틀림없이 엄청난 선수들이라는 뜻이잖아?”
그때, 희주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그 조건은 상대 팀 선수들에게도 전부 똑같이 적용된다는 사실을.
***
시작부터 조짐이 영 별로기는 했다. 킥오프부터 패스 미스를 범했거든.
범인은 스트라이커, 빌 크리그.
작년 겨울, 리그 원 역사에 길이 남을 몸값으로 이적해온 윌 그리그는, 이적 초반부터 극심한 부진에 빠졌다.
반년 동안 겨우 네 골, 주전 스트라이커로서는 도저히 쓸 수 없는 수준의 참혹한 성적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올해보다는 나았다.
이번 시즌은 지금까지 딱 한 골 넣었으니까. 20경기에 한 골. 이쯤 되면 지난 시즌의 부진이 선녀같다.
덕분에 요즘은 선덜랜드 팬들에게도 야유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마침 오늘도 변함없이 부진했다.
기복 없이 꾸준히 부진하니까, 일관성 하나는 칭찬해 주고 싶을 정도다··· 빌어먹을!
빌 크리그의 패스 미스를 시작으로,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경기가 이어졌다.
“알까기지? 알까기 맞지?”
“어, 그래.”
“저건 팬텀? 엘라스티코?”
“팬텀, 보통은 라 크로케타라고 부르겠지만.”
“방금은 빙글 돌았어!”
내 머리도 돌 것 같다.
“마르세유 룰렛이네.”
이만하면 퍽 완벽한 개인기였고, 준수한 볼 컨트롤은 덤이었다. 유일한 결점이라면 유니폼 색깔뿐이었다.
하늘색 유니폼, 브리스톨 선수다.
그리고, 3부리그 공격수를 메시처럼 보이게 만든 원인은 바로 선덜랜드의 느슨한 수비였고.
기세가 꺾이는 데 5분, 중원을 내주는데 10분. 15분을 넘긴 시점부터는 그야말로 반코트 게임으로 접어들었다.
“아, 진짜 뭐 하는 거야?”
축구를 잘 모르는 희주조차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을 정도다. 신명 나게 두들겨 맞았다는 표현이 틀리지 않는다.
그나마 전반 21분에 맞이한 결정적인 위기는 어떻게든 넘겼지만, 39분에는 마침내 실점을 허용하고 말았다.
아직 경기는 50분이나 남아 있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방금 실점으로 모든 게 끝장났음을.
시합의 행방도, 승격 플레이오프로의 길도, 모두 끝장났다. 선수들의 전의가 눈에 띄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답답하다.
13년 전의 나는, 겨우 저런 팀에서 뛰고 싶었던 건가.
고작 저런 팀을 위해, 무릎이 망가지도록 뛰었던 걸까.
혹시 첫사랑을 사창가에서 만나면 이런 기분일까.
“오빠, 괜찮아? 얼굴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사실은 별로 괜찮지 않았다.
문득, 유명한 축구 명언이 떠오른다. 답답하면 너희들이 뛰라는 명언이.
마침 선덜랜드에서도 뛴 적 있는 선수의 명언이다.
그 선수는, 나중에 철이 든 다음에는 이렇게 고쳐 말했다. 답답하면 내가 뛴다고.
그 이야기의 교훈은, 답답하면 일단 누군가는 뛰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나는 이제 뛸 수 없다. 이제 선수가 아니니까. 무릎이 망가졌으니까.
옆에서 희주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꼴 보려고 비행기 타고 유럽까지 날아온 게 아닌데··· 미안, 차라리 예매 삑사리 낼 걸 그랬네.”
“괜찮아. 네 잘못이 아니니까.”
잘못한 건 저 아래 있는 놈들이다.
축구할 생각도 없어 보이는 선수들, 아예 경기에서 손을 놓아버린 감독, 팀을 이 지경까지 밀어 넣은 보드진.
불쑥, 생각이 정리되기도 전에 입이 먼저 움직였다.
“현질이 최고라고 했었지?”
그러자 희주가 반색했고, 곧바로 명랑한 목소리를 높였다.
“맞아. 현질 좋지. 맥주 사올까? 아니면 위스키? 영국 음식은 좀 그래도, 술은 괜찮다고 들었어. 이런 날은 낮술도 좋을걸?”
“그보다는 경기 안 본 눈 사려면 돈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알아봐 주면 고맙겠는데.”
“농담할 기력은 있어서 다행이네. 오빠, 그럼 위스키 어때? 기억이 확 날아갈 정도로 독한 놈으로.”
“그리고 눈 떠보니 일행도 없어지고, 지갑도 없어지고?”
희주가 피식 웃었다.
“걱정 마. 아직 샤넬백 못 받았잖아? 그때까진 우리 물주님, 안전하게 모셔야지.”
“그러면 일단 비행기 티켓이나 취소해 줘.”
“그야 어렵지 않지만··· 대체 술을 얼마나 퍼마시려고?”
술 생각도 나기는 하지만, 기왕 현질하기에는 훨씬 좋은 대상이 있다.
예를 들면, FC 선덜랜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