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답답해도 뛸 순 없다 (2)
내가 여동생을 대하는 원칙은 다음과 같다.
여동생은 부려먹는 게 제맛이며, 원칙에 예외는 없다.
희주는 잠시 툴툴거리기는 했지만, 곧바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인천 가는 비행기는 취소하고, 영국 국내선을 새로 예매했다.
물론 전화기만 붙잡는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기에, 희주는 퍽 바쁘게 돌아다녀야 했다.
나? 나는 물론 카페에서 기다렸다. 이러려고 용돈 주는 거 아니겠어?
새로 확보한 비행기 티켓 두 장을 흔들며 돌아온 희주가, 자리에 앉자마자 불평을 늘어놓았다.
“운동화 신고 올 걸 그랬어. 하이힐은 너무 답답해. 뛰기도 불편하고.”
발 아픈 건 미안하지만, 운동화는 참아 줬으면 한다.
희주는 얼굴부터 고양이상이긴 하지만, 활동량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고양이보다는 개에 훨씬 가까웠다. 품종을 따지면 비글 정도 되겠지.
덕분에 희주가 뛰어다니기 시작하면 여러모로 피곤해진다.
내버려 두면 뽀르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따라가자니 슬슬 서른 줄을 바라보는 육체와 망가진 무릎이 비명을 지른다.
한때는 축구 유망주, 여기저기 잘 뛰어다니던 시절은 이제 없다. 나는 이제 답답해도 뛸 수 없는 몸이다.
“그냥 뛰지 마. 걸어.”
“왜? 소중한 여동생이니까?”
“그렇다기보다는, 네가 뛰어다니면 정신 사나우니까.”
“와, 진짜 너무하네!”
희주의 볼이 곧바로 부풀어 올랐다.
조금 전까지는 틀림없는 고양이였는데, 지금 보니 영락없는 복어다. 그것도 제법 독이 오른 상태처럼 보인다.
복어 독은 위험하니 적절히 처리해야겠지. 전문적인 처리가 필요하다.
때마침 카페의 바리스타가 목소리를 높였다.
“17번 손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희주가 샐쭉하게 나를 노려보았다.
“아니, 고생한 사람을 위로할 생각은 못 해줄 망정···.”
“도망 안 가. 음료 받으러 가는 거야.”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무슨무슨 프라푸치노. 당연히 프라푸치노가 희주 거다.
일단 이럴 때는 이름이 제일 긴 걸 고르면 실패가 없다. 그만큼 크림이며 시럽, 과자 같은 게 가득 뿌려졌다는 뜻이니까.
덕분에 여동생을 어류에서 포유류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심술 맞은 복어는 사라지고, 만족한 고양이만 남았다.
“그런데 영국 사람들 진짜 별나네. 무슨 축구 보는 데 드레스 코드를 따져?”
“거기만 그래. 일종의 VIP 좌석이니까. 귀빈석에 드레스코드 지정하는 건 딱히 특이하지도 않잖아?”
“공사판 같은 꼬라지를 보면, 드레스 코드는 노가다 복장이 제일 어울릴 것 같긴 한데.”
희주가 낮게 투덜거렸다. 저기 동생님, 그 방을 공사판으로 바꿔놓은 장본인 아니셨습니까?
“뭐, 정장에도 나름대로 장점은 있네. 언제든지 비즈니스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약속 잡았어?”
“응, 내일 점심으로. 아무래도 선덜랜드 구단주는 협상에 소질이 없는 모양이네.”
나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협상에 소질이 있는 친구 같았으면, 작년에 호구 딜도 안 했겠지.”
윌 그리그 영입만 봐도 그렇다. 겨울 이적시장에 몸이 잔뜩 달아올라, 역대급 이적료를 지불하고 데려왔으니까.
마치 ‘돈이라면 얼마든지 드릴 테니 제발 선수를 넘겨주세요’ 같은 태도. 협상가로서는 최악이다.
덕분에 상대 구단만 노났을 거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우리 쪽에서 구단을 인수하겠다는 의향을 통보하자마자 내일 점심에 약속을 잡았다.
따라서 구단을 팔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뜻이다.
“그나저나 뉴캐슬 가면 숙소부터 잡아야겠네? 혹시 아는 곳 있어?”
명랑하게 물어보는 희주를 향해, 일부러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희주 너, 그 동네 가서는 입조심 해라.”
“입조심? 내가 뭐 잘못했어?”
“우리 행선지는 선덜랜드잖아. 뉴캐슬이 아니라.”
“하지만 공항은 뉴캐슬 공항인데?”
“그건··· 서울 갈 때 인천공항 지나는 느낌 정도로 생각해 줘.”
선덜랜드와 뉴캐슬은 같은 타인 위어 지방에 위치한, 일종의 이웃사촌이었다. 두 도시의 번화가끼리는 차로 30분이면 갈 정도로, 무척 가까운 편이다.
그런데 원래 축구계에서는 동네가 가까울수록 라이벌리티가 심해지는 경향이 있다. 선덜랜드와 뉴캐슬 정도의 거리면 그야말로 철천지원수가 된다.
FC 선덜랜드의 숙적, 뉴캐슬 시티는 현재 1부 리그를 순항 중이다. 3부 리그에 처박힌 선덜랜드와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난다.
굳이 따지자면, 지금 뒤처진 선덜랜드 팬들의 자격지심이 더 심할 것이다.
“잘못하면 한 대 맞을지도 몰라. 영국은 훌리건의 고장이잖아?”
실은 농담이었지만, 선덜랜드에서 6년쯤 살다 온 내 말에는 남다른 무게감이 있었다.
희주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오빠, 선덜랜드 공항 근처에 아는 숙소 없어? 훌리건들은 절대 얼씬도 못 할 만큼 안전한 곳으로!”
그렇다고 굳이 공항 이름까지 바꿔 부를 필요는 없는데 말이지.
결국 희주의 희망대로, 숙소는 크고 안전한 곳을 골랐다. 구체적으로는 5성급으로.
그 반대급부로, 공항에서는 꽤 떨어진 곳을 골라야 했다.
선덜랜드 시내에는 5성급 호텔이 없다. 딱히 관광지가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아무리 현질이 좋다고는 하지만, 없는 걸 빌릴 방법은 없다.
결국, 특급호텔에서 머물기 위해서는 옆 동네 씨햄까지 가야 한다. 뉴캐슬 공항에서는 제법 거리가 있지만, 씨햄은 선덜랜드와는 바로 옆 동네다.
희주가 투덜거렸다.
“더럽게 머네.”
“괜찮아. 차로 가면 금방이니까.”
“그야 차로 가면 금방이겠지. 좋네. 여기가 영국이고, 오빠 차는 한국에 있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만 빼면 말야.”
“뭐가 문제야? 빌리면 되잖아. 아니면 그냥 사버려도 그만이고.”
구단을 무사히 인수하게 되면 영국에 머물 일도 많을 테니, 한 대 뽑아도 아깝지는 않겠다.
“그럼 운전은 누가 하는데?”
“너님이요.”
운전은 무릎의 적이거든.
희주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차를 빌려, 운전대에 오른 희주가 불쑥 물었다.
“그래서 말인데, 씨햄은 어느 팀 훌리건이 강해? 선덜랜드? 아니면 뉴캐슬? 알아야 입조심을 하지.”
“아, 그거? 농담이었는데.”
희주의 표정이 꽤 볼만해졌다. 구체적으로는 납량특집에 나올 만한 표정으로.
모르긴 해도, 아마 내 표정도 꽤 볼만해졌을 것이다.
여동생의 거친 운전과 그걸 지켜보는 나. 그건 아마도 전쟁 같은 질주.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잠깐 보였다.
***
선덜랜드 구단주, 스튜어트 로널드와는 구단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덕분에 13년 만에 선덜랜드의 홈 경기장을 찾았다.
빛의 경기장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순백의 지붕과, 붉은 벽돌을 쌓은 경기장 외벽. 검은 고양이 마스코트까지.
한때 내가 프로로 뛰고 싶었던 경기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내 추억 속의 모습과 완벽하게 동일했다.
옆에서 희주가 감탄했다.
“와! 경기장 진짜 예쁘네.”
그때 등 뒤에서 나직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떠십니까, 선덜랜드의 자랑이죠. 영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축구장이라고 자부합니다.”
혹시 엿들었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물론 한국어로 이야기하던 우리의 대화를 정말로 엿듣지야 못했겠지만, 그만큼 공교로운 타이밍이다.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돌아보자, 슬슬 이마가 벗어지기 시작한 중년 남성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마에 새겨진 가치는 사백억 원.
FC 선덜랜드의 현 구단주, 스튜어트 로널드다.
“사무실에서 뵙기로 한 줄 알았는데요.”
“하하, 마침 약속시간이 거의 다 되어가서, 마중을 나왔습니다. 마침 시즌이 끝난 상태라, 직원들도 휴가 갔거든요.”
옆에서 희주가 속삭였다. 물론 한국어로.
“진짜야?”
“여름방학에 교사들 다 쉬던?”
사범대 다니는 희주에게는 퍽 적절한 비유였던 모양이다. 녀석이 곧바로 입맛을 다셨다.
“임용 떨어지면 오빠네 구단에 취직하려고 했더니.”
여긴 아직 내 구단이 아니고, 희주에게 맡길 만한 업무도 떠오르지 않는다.
티켓팅 솜씨 하나는 엄청나지만, 그건 구단 직원에게 필요한 덕목은 아니니까.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희망하는 직무는?”
“음, 소셜 네트워커? 아니면 매스미디어 와치맨도 괜찮아.”
차라리 사장 등골 브레이커라고 해라.
잠시 후, 나와 희주는 구단 사무실에서 로널드와 마주 앉았다.
“구단을 인수하고 싶으시다고요?”
“그렇습니다.”
그러자 로널드의 눈이 번들거리기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저는 이 구단을 사천만 파운드에 구매했습니다. 딱히 숨길 것도 없지요.”
실제로는 삼천 구백 육십만 파운드. 뭐, 1% 오차 정도는 봐줄 수 있다.
“제가 인수할 당시와 비교해서 구단 가치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니 제가 인수했던 원가에···.”
나는 곧바로 로널드의 말을 잘랐다.
“그때는 강등 보조금이 붙어 있었을 텐데요? 금액이 얼마였더라?”
사무적인 태도를 취하면서, 나는 슬쩍 희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2년간 천 삼백만 파운드입니다, 사장님.”
미리 준비해 두었던 상황이기에, 희주의 대응은 완벽했다. 각 잡힌 정장에 네이티브급 영어 발음, 도수 없는 안경에 차분한 태도까지 더해지자 꽤 유능한 보좌관처럼 보인다.
코스프레지만.
“2년간이면, 지금은 강등 보조금도 끝났겠네요. 아무래도 구단가치 차이가 굉장히 커 보이는데요?”
날카로운 지적에, 로널드가 이마를 문질러 땀을 닦았다.
“대신 선수단을 보강했습니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응수했다.
“네, 빌 크리그 같은 선수 말이죠. 금액이 아마···.”
“삼백 사십만 파운드입니다, 사장님.”
역대급 패닉 바이에 꼽힐 실패 사례를 들먹이자 로널드의 얼굴이 시뻘겋게 변했지만, 딱히 반박은 돌아오지 않았다.
뭐, 어쩌겠어. 자기가 잘못한 건데.
그 외에도 로널드는 다채로운 명분을 들먹였지만, 큰 소용은 없었다.
내 눈에 보이는 로널드의 몸값은 사백억, 따라서 그는 딱 사백억 원짜리 구단주다.
바꿔 말하면, 그는 사백억쯤 벌어들이면 만족할 그릇이라는 뜻이 된다.
처음부터 결과가 정해진 협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로널드는 구단을 못 팔아 안달이 난 상태였고, 마지노선까지 정해진 상태였으니까.
30분 후, 나는 선덜랜드의 구단주가 되었다.
최종 인수 가격은 이천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삼백억 원 정도 되는 금액이었다.
***
협상을 마치고 사무실을 빠져나와, 경기장 옆 주차장에 향할 때였다.
희주가 불쑥 입을 열었다.
“와, 무슨 구단을 반나절 만에 사들이는지···. 오빠 진짜 장난 아니다. 햄버거 하나에도 벌벌 떨던 사람 맞아?”
왜, 갑자기 가슴이 웅장해지냐?
“희주 네가 잘 도와줘서 그런 거지.”
“헤헷, 바로 그 대답을 기대했어.”
실제로 희주는 이번에 꽤 맹활약을 펼쳤다. 사건의 발단이 된 티켓팅부터, 보좌관 코스프레까지.
약속했던 샤넬 핸드백에 더해, 지갑이라도 하나 얹어주기로 결심했다.
희주가 웃었다.
“그래서, 정말로 구단주가 된 거네.”
“맞아.”
“이제 뭐부터 할 거야?”
“글쎄. 할 일이야 아주 널렸지.”
선수단을 물갈이해야 하고, 스태프도 갈아치워야 한다. 경기장 설비도 점검할 필요가 있다.
이쪽에서 오래 지내게 될 테니, 숙소도 구해야 할 테고.
당분간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이 이어지겠지.
하지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바라보았다. 줄곧 동경하던 경기장, 선수로 뛰고 싶던 그 경기장을.
이대로, 계속 바라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