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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4화 (4/422)

4화 답답해도 뛸 순 없다 (3)

감회에 젖어 경기장을 바라보는 내 곁에서, 희주가 명랑하게 말했다.

“모처럼이니까 들어가 봐도 괜찮은데?”

“괜찮겠냐?”

여동생은 부려먹는 게 제맛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축구 경기장 구경에 끌고 다니기는 조금 미안하다.

역지사지라는 말도 있잖아? 희주에게 축구 경기장 구경은, 나에게는 백화점 쇼핑에 해당할 정도의 참혹한 이벤트일 테니까.

그런데도 어째 희주의 태도가 퍽 관대하다. 요 녀석에게 다른 꿍꿍이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혹시 그 신상 백이라는 게 내 생각보다 훨씬 비싼 건 아니지?”

“나 같은 대학생에겐 엄청 비싼 거긴 하지만, 오빠한테는 돈도 아닐걸.”

“아예 회사를 통째로 사 달라는 요구라던가···.”

“어, 그것도 가능했구나! 오빤 돈 많으니까!”

불가능해. 일단 돈은 있지만, 아무튼 그건 좀 아니야.

“농담이야. 오빠 표정이 꼭 안에 못 들어가서 안달 난 사람처럼 보여서 그런 거라구.”

“백화점 명품관 앞을 지날 때의 네 표정 같은 거 말이지?”

“그럴지도? 결국 남매니까 표정 같은 건 닮았을 테니까.”

“내가? 너랑?”

나는 하마터면 그만 표정 관리에 실패할 뻔했고, 희주는 완벽하게 실패했다. 얼마간 떫은 표정을 지어 보인 희주가 슬쩍 덧붙였다.

“구단 시설을 시찰하는 정도는 당연한 거잖아. 오빠는 오늘부터 구단주니까. 그리고 나는 구단주 비서고.”

뭐, 정식 비서라기보다는, 일일 코스프레지만.

아무튼 희주 녀석이 모처럼 기특한 소리를 해주는 이상, 굳이 사양할 생각은 없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그야말로 구석구석 뜯어볼 생각이다.

“혹시나 해서 말이지만, 별로 기대하진 마라. 희주 너는 별로 볼 거 없을 거야.”

일단 경기장 안에는 스포츠 바가 두 개쯤 있기는 하다. 레스토랑과 매점도 있고. 하지만 기본적으로 축구장은 축구를 보기 위한 공간이지, 술이나 식사, 쇼핑을 즐기는 공간은 아니다.

스타디움 투어는 축구 팬 이외의 사람에게는 퍽 지루한 이벤트이며, 특히 백화점 아이쇼핑이 취미인 희주를 만족시킬 가능성은 전혀 없다.

“걱정 마. 어린애도 아니고··· 신상 백을 생각하며 힘내겠습니다! 에헤헷.”

“후회 안 하지?”

“안 한다니까.”

희주의 기특한 결심은, 채 30분을 버티지 못했다.

“후회하고 싶어졌어. 맹렬하게.”

사실은 나도 그렇다.

일단 바는 문 닫은 상태였다. 사실 처음부터 당연한 일이었던 게, 오늘은 경기도 없는 날이고 시간상으로는 백주 대낮이다.

모든 면에서 바를 운영하기에 적당한 조건이 아닌 탓에, 스포츠 바 운영 상태가 어떤지는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그리고 매점은···.

“직원들 다 휴가 중이라는 말, 의외로 사실이었나 보네.”

··· [잠시 자리 비웁니다. 전화 주세요] 라는 팻말이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이었다.

하긴, 딱 봐도 장사 안되게 생기기는 했다. 유리창 너머로 봐서 확실하진 않지만, 일단 굿즈들이 영 꾀죄죄하다.

영 못생긴 인형, 유니폼, 그리고 사인볼. 얼마나 안 팔리는지 아주 재고가 산처럼 쌓였다.

“오빠, 이거 정말로 매점 맞아? 혹시 창고 아냐? 악성 재고 쌓아두는 창고.”

나도 방금 맹렬한 의심이 들기 시작하던 참인데.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라면 관리 자체는 정성껏 했다는 점일까.

매점 유리창은 먼지 하나 안 보였고, 착착 접힌 유니폼 더미는 밖에서 봐도 칼각이 잡혔다. 살짝 빛이 바랜 사인볼에서 세월의 흔적이 느껴지긴 했지만, 사인이 잘 보이는 각도로 질서정연하게 늘어놓는 성의는 보였다.

물론 축구 매니아가 아닌 희주 눈에는 그런 디테일까지는 들어올 리가 없다.

“여기 진짜 별로다. 오빠, 있잖아. 투자의 신한테 이런 소리 하는 게 우습긴 한데··· 그래도 가족이니까 화내지 말고 들어줘.”

“말해.”

“선덜랜드가 친정팀이라서 고른 거지? 어차피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 거지?”

“뭐, 그렇지.”

선덜랜드 이외의 다른 팀 구단주가 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그냥 구단주 안 하고 말지.

“솔직히 말하면 여기, 금방 망하게 생겼어. 싹수가 안 보여. 그래도 오빠 눈에는 뭔가 다른 게 보이는 거 맞지?”

확답할 수 없는 스스로가 조금 슬펐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내가 유스에서 뛰던 무렵에는 동네 곳곳에서 선덜랜드 유니폼 사 입은 사람들을 어렵잖게 볼 수 있을 정도였고, 선수들 사인볼은 들여놓는 족족 동이 났다. 마스코트 인형만은 그때도 별로 잘 나간 것 같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때는 선덜랜드의 리즈 시절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 리즈도 이번에 프리미어 리그에 복귀한다는데, 우리 팀은 어쩌다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걸까?

짧은 한숨을 내쉰 다음, 희주에게 물었다.

“한 군데만 더 가봐도 괜찮겠냐?”

“스무 군데도 괜찮아. 오늘은 오빠 비서니까! 솔직히 더 볼 게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가장 중요한 게 남아 있지.”

스포츠 바, 레스토랑, 매점 같은 건 일종의 부가 요소, 사람으로 비유하면 화장이나 옷 같은 정도에 불과하다. 축구장의 심장, 가장 중요한 장소는 따로 있다.

“그라운드 말이지? 나는 괜찮지만, 거기 신발 신고 들어가도 되는 거야?”

“저기 동생님, 그라운드는 원래 축구화 신고 들어가는 장소인데.”

관상용 잔디밭이라면야 들어가지 말라는 팻말이라도 붙었겠지만, 지금 가려는 곳은 축구 그라운드의 잔디다.

“하이힐인데?”

“괜찮아. 축구화 스터드는 훨씬 날카롭거든.”

“혹시라도 누가 막 쫓아내면···.”

나는 대답 대신 피식 웃어버렸다. 다른 팀 경기장이라면 몰라도, 선덜랜드 경기장에서 희주나 내가 쫓겨날 일은 이제 없다.

구단주니까.

조금 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희주가 뒤따라 웃었다.

“아, 오빠가 여기 통째로 샀지?”

희주는 다소 안심한 것처럼 보였지만, 대신 다른 습관이 생겼다. 주문을 외우는 습관이.

“새 구단주와 그 비서입니다. 수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쉽게도 희주가 새로 익힌 마법 주문을 써먹을 기회는 없었다. 경기장에 향하는 동안, 딱히 우릴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도착한 이래, 우리는 아직 로널드 이외의 구단 관계자를 만나지 못한 상태였다.

돌이켜보면 무척 이상한 일이었지만, 당시의 나는 큰 위화감을 느끼지는 못했다.

아마, 그라운드에 향하는 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

걸음마다 뛰던 가슴은, 통로에 진입했을 때쯤에는 마치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세차게 날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줄곧 꿈에 그리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혹시라도, 축구선수로서의 내 가치가 0이 아니었다면, 혹은, 무모한 연습으로 무릎을 망가뜨리지 않았다면··· 아마도 내가 매주 바라보았을 풍경.

영국에선 보기 드문 파란 하늘, 그 아래에는 살짝 물기를 머금은 푸른 잔디가 오후의 햇살 아래 반짝인다.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면, 관중석에 걸린 현수막이 마주 보인다. 선덜랜드의 상징과도 같은 문구가.

[Be the light]

순간 오른쪽 무릎에 꿈틀, 힘이 들어갔다. 이제는 뛸 수 없는 몸인데, 그런데도 심장이 뛴다.

터치라인 밖에서 바라보기만 하려던 당초의 생각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는 마치 선수라도 된 것처럼 천천히 사이드라인을 넘었다.

어째서인지 귓가에 함성이 울리는 것 같다. 관중석은 물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경기장인데도.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Sunderland `til I die.

“··· 빠, 오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희주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돌려놓았다.

“사람이 있어.”

“사람?”

희주는 대답 대신 손을 뻗어 경기장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사이드라인 바깥, 주로 볼 보이가 머무르고, 교체를 앞둔 선수들이 몸을 푸는 구역 쪽을.

그곳에서 누군가가 묵묵히 공을 차고 있었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우리의 존재를 알아차리지도 못한 것처럼.

멀리서 보기에도 폼이 꽤 근사해 보인다.

“누굴까?”

“글쎄, 아마 선수겠지.”

비록 프로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몇 년간 이곳에서 유소년 선수로 뛰었기에 확신할 수 있다.

선수, 혹은 전직 선수나 유소년 출신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튼 축구 관계자일 것이다. 일반인이라면 결코 저렇게 공을 찰 수 없다.

그러자 갑자기 희주가 가까이 달라붙었다.

“오빠, 어제는 분명히 원정 경기였지?”

“그랬지.”

“그리고 시즌 마지막 경기였고?”

“그랬지.”

무심히 대답하자, 희주의 목소리가 점점 심각하게 변했다.

“그럼 선수일 리 없는 거··· 아니야? 경기 다음 날, 특히 원정 경기 다음 날은 휴식이 상식이고.”

“라임 맞추냐.”

“그리고 시즌 끝나면 곧바로 휴가잖아.”

“잘 아네.”

“이래 봬도 유소년 선수 가족이었으니까?”

“그런데 넌 갑자기 뭐 하냐?”

“응, 오빠 등에 먼지가 붙은 것 같아서.”

마침 갑자기 등에 껌딱지가 하나 달라붙은 것 같긴 하다. 꽤 묵직하고, 당분간 떨어질 생각도 없어 보인다.

저 멀리서 공차는 남자의 정체가 밝혀지기 전까지는 절대로 안 떨어지겠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안심해. 우리 선수 맞으니까.”

가까이 다가가니 얼굴이 낯이 익었다.

빌 크리그. 선덜랜드 최고액 주급 수령자이자, 리그 원 사상 최고 이적료 기록을 세우며 합류한 공격수.

두 시즌 연속으로 극도의 부진에 빠져, 바가지 썼다는 평가가 지배적인 선수이기도 하다.

선덜랜드 팬이라면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선수겠지만, 내 눈에는 조금 다르게 보였다.

이마에 선명하게 쓰인 숫자 60. 몸값 육십억.

3부리그에서는 최고 수준의 선수라는 사실은 명백하며, 챔피언십에서도 문제없이 활약할 수준이다.

기술적으로도 훌륭하다.

발재간이 화려하거나, 개인기가 특출나지는 않지만 대신 동작 하나하나가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다. 아마 전형적인 골 사냥꾼 타입 같다.

비록 몸놀림은 살짝, 아주 살짝 둔한 것 같지만··· 원정 경기 다음 날임을 고려하면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다.

크리그는 체력적으로도 훌륭한 수준이라고 봐야겠지.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감명을 받은 건 그의 태도였다.

시즌이 끝났는데도 경기장까지 나와서, 자발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성실함은 물론, 나와 희주의 접근을 눈치조차 못 챈 것처럼 오로지 공에만 모든 신경을 쏟는 집중력도 훌륭하다.

세상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좋은 선수라는 생각과 함께, 마음속 한구석에서는 의문이 싹튼다.

도대체 왜 이런 선수가 두 시즌이나 부진했던 건지.

크리그의 진짜 가치를 몰랐다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것이다. 축구를 잘 모르는 아마추어 구단주가 바가지 쓴 셈 쳤겠지.

하지만 크리그의 잠재 가치는 육십억 원, 지불한 이적료보다도 오히려 훨씬 가치 있는 선수다.

챔피언십에서도 통할 만한, 충분히 좋은 선수.

바꿔 말하면, 지금의 선덜랜드는 이런 선수조차 제 기량을 펼쳐 보이지 못할 정도로 망가졌다는 뜻이 된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딱 봐도 구단 꼬라지가 개판이 났으니까. 매점은 개점 휴업 상태이고, 스포츠 바며 레스토랑은 전부 문을 닫아버렸다.

주차관리 요원은 보이지 않고, 심지어 나와 희주가 그라운드에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올 때까지 제지하는 이 하나 없었다.

“잠깐! 거기 당신들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니,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네.

저 멀리서 손사래를 치며 달려오는 구단 직원을 보면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엉망이긴 해도, 아직 완전히 끝장나지는 않은 것 같다고.

그래서일까.

무심코 웃음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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