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답답해도 뛸 순 없다 (4)
“오빠, 지금 웃을 때가 아닌 거 같은데··· 저 사람, 엄청 화난 것처럼 보여.”
“그렇겠네.”
눌러쓴 모자와 꽤 떨어진 거리 탓에 표정까지는 알아보기 어렵지만, 그래도 화났다는 정도는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거친 발걸음, 멀리서도 알아들을 수 있는 F 워드의 향연.
덕분에 희주는 완전히 기가 죽어버렸고, 한결같이 내 등 뒤에 매달린 껌딱지 포지션을 유지 중이다.
그라운드에 오는 길에 몇 번이고 연습했던 마법 주문, [새 구단주와 그 비서입니다] 를 써먹을 생각이 조금도 없어 보인다.
하긴, 구단 직원의 기세가 워낙 흉악하긴 하다. 보아하니 소싯적엔 운동깨나 했을 몸이다.
활달하지만 딱히 드세지는 않은 희주가, 위압감을 느끼고 움츠러들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별수 없다. 내가 대응해야지.
“아니, 그라운드에는 아무나 들어오면 안 되는 거 모르나? 가뜩이나 짜증 나는데, 개나 소나 사람 신경줄로 기타 치려고 드네? 내가 그렇게 만만해?”
“저기, 나는 수상한 사람이 아니라···. “.
당장에라도 내 멱살을 움켜잡을 것처럼 움직이던 구단 직원의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썬?”
당혹감이 느껴지는 구단 직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연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브라이언? 네가 왜 여기서 나와?”
“오빠 아는 사람이야?”
비록 얼굴은 보이지 않지만, 아마 등 뒤의 희주도 아연한 표정을 하고 있겠지. 그런 희주를 위해 짧게 설명했다.
“유스 시절 동료야.”
어쩌면 동료라는 표현보다 조금 더 어울리는 단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브라이언과는 꽤 친하게 지냈었다.
우선 나이가 같았고, 포지션은 달라서 서로 경쟁할 일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가까워졌고, 유스 마지막 해에는 룸메이트로 지내기도 했었다.
그러니까, 나와 브라이언의 관계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요, 브로! 진짜 오랜만이네!”
급격히 누그러진 브라이언의 태도를 보고 마음이 놓였는지, 희주 녀석이 간신히 내 옆으로 기어 나왔다.
“오빠보고 브로라고? 그럼 나하고는 족보가 어떻게 되는 거야?”
“대충 매우 친했다는 정도로 넘겨라. 그냥.”
나와 희주를 번갈아 바라보던 브라이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 친구는 윙 포워드고 저는 풀백이었으니까, 그야말로 피를 나눈 형제 못지않은 사이였죠, 레이디.”
레이디, 한국에서는 평생 들을 일 없는 종류의 호칭이 신선했는지 희주가 키득거렸다.
그래서일까. 브라이언의 목소리에 점점 힘이 실렸다.
“조금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잠깐, 대체 뭘 축하한다는 거지? 설마, 내가 구단을 산 걸 벌써 알아차린 건가?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브라이언이 내게 저렇게 깍듯한 말씨를 쓸 리 없으니, 아마 축하의 대상은 희주일 것이다.
··· 구단주 비서가 된 걸 축하한다는 소리는 아닐 텐데.
“썬, 그 친구는 제가 아는 최고의 남자입니다. 룸메이트로 지내봐서 아는데, 코도 안 골고 잠버릇도 얌전하죠. 이갈이도 안 합니다.”
“네, 같이 살아보니 그렇더라고요.”
무심코 맞장구치는 희주 녀석은 아직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그만 소름이 쫙 돋고 말았다.
“유일한 결점이라고는 멀쩡한 풀백더러 오버래핑 늦게 한다고 생트집을 잡는 것뿐인데, 결혼 생활에서는 딱히 문제없겠죠.”
“무슨 생활이요?”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희주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결혼, 의혹을 확신으로 바꾸는 단어.
얼굴 근육이 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마 표정이 썩었겠지. 굳이 거울까지 볼 필요도 없이 확신할 수 있다.
남매니까 이럴 때 짓는 표정은 닮았을 것이다. 그러니 희주 얼굴을 확인하면 충분하다.
음, 농약 한 사발쯤 원샷한 듯한 표정이네. 저게 내 표정이란 말이지?
약 먹은 놈은 따로 있는데.
“미친놈.”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모처럼 와이프 앞에서 칭찬해줬구만!”
뭘 어쩌긴, 선전포고했지. 방금 그 대사, 현실 남매에게는 패드립급 파괴력이라니까.
“얘는 내 여동생이야.”
그러자 곧바로 브라이언이 내 손을 움켜쥐었다.
“형님!”
진짜로 농약 먹었나 본데. 그리고 희주 너도 좋다고 웃지 마라. 이놈은 스윗한 갓양남 같은 게 아니거든.
물론 브라이언 이놈이 정말로 희주에게 집적거릴 리는 없다. 친구 여동생을 건드릴 만큼 막돼먹은 인간은 아니니까.
하지만 만에 하나, 혹시라도 희주한테 손대면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다. 확 잔디밭에다···.
“오빠, 괜찮아? 눈빛이 좀··· 배우 같던데.”
뒷말은 안 들어도 안다. 장르는 스릴러고, 배역은 연쇄살인마겠지.
“시체를 어디에 묻을지 고민하는 장면 같아.”
“고민 안 해. 이놈은 풀백이었거든.”
따라서 사이드라인 근처에 묻어 주면 만족하겠지. 마침 여기네.
희주와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는 사이, 브라이언이 손뼉을 쳤다.
“자, 자, 아무튼 그라운드는 놀이터가 아니야. 선수들만 들어올 수 있는 곳이지. 오랜만에 본 건 좋지만 이야기는 나가서 하자.”
“그러자.”
그라운드를 마지막으로,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서 보고 싶었던 건 전부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이야기를 듣는 것뿐이다. 내부 인원의 눈으로 살펴본 구단의 속사정을.
“어디서 볼까?”
“음, 브로. 금방 정리하고 갈 테니까 저녁에 바에서 만날래? 블랙캣츠 알지?”
“어··· 거기 문 닫은 거 아니었냐?”
“이따 열 거야. 요새 내가 관리하고 있거든.”
“네가 바텐더가 될 줄은 몰랐는데.”
브라이언의 손재주는 궤멸적이고, 식성은 영국적이다. 그러니까 장어 젤리나 생선 대가리 파이 같은 걸 맛있게 먹는 입맛의 소유자라는 뜻이다.
아무리 봐도 바텐더와 어울릴 인재상은 아니다.
“바텐더는 임시직. 덤으로 매점 캐셔도 겸하고 있지.”
아, 그래서 구단 로고 들어간 티셔츠 입었구만.
“본업은 잔디 관리인이고?”
“아니.”
브라이언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전력분석관인데.”
대답을 들은 순간, 관자놀이가 욱신거렸다.
아, 내 친정팀은 전력분석관에게 바 관리나 매점 캐셔 노릇, 잔디 관리까지 맡겨야 할 정도까지 가버린 거구나.
말 그대로 막장 오브 막장이다.
하지만, 구단 꼬라지를 잠시 제쳐두고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부터 브라이언은 축구 보는 눈이 좋았으니까.
문득, 13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
“피터 톰슨은 급한 상황에서 공을 왼발로 처리하려는 습관이 있다?”
“맞아, 브로. 비디오를 수십 번 돌려보고 찾아낸 거야.”
“혹시 착각한 거 아니야? 피터는 오른발잡이인데?”
오른쪽과 왼쪽을 착각했다는 결말은 사양하고 싶었던 내가 심드렁하게 되묻자, 브라이언이 가슴을 폈다.
“브로, 그게 포인트야. 톰슨이 오른발잡이라는 건 누구나 알거든. 나도 알고, 헨도도 알고, 우리 브로도 알고, 아마 유소년 리그의 선수들 모두가 알겠지.”
“그렇기 때문에 궁지에 몰리면 오히려 허를 찔러 왼발을 쓴다고? 일리가 있어. 하지만 이 습관을 어떻게 써먹지?”
피터 톰슨은 당시의 첼시 유스가 자랑하던 천재 미드필더였다. 이름값만 높고 실속은 없던 맨유 유스의 리오 수네스와 달리, 톰슨의 재능은 진짜배기였다.
센터백을 봐도 될 정도의 체격과 공격수로 뛰어도 될 발재간을 갖춘 홀딩 미드필더.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를 가진 괴물 중의 괴물이다.
그렇기에 [궁지에 몰리면 무조건 왼발]이라는 뻔한 습관을 지금까지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톰슨을 몰아넣는 상황 자체가 극히 드물었을 테니.
그런 천재를 몰아넣는 상황은 보통 상대의 방심에서 비롯하지만, 아쉽게도 톰슨은 성격마저 신중하다.
그런데도 브라이언은, 그 신중함이 오히려 톰슨의 약점이라고 단언했다.
“톰슨은 피지컬로 압도할 수 있는 선수 상대로는 절대 발재간을 부리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거든.”
“그 말은?”
“헨도가 마크하면, 톰슨은 헨도를 등지고 공을 지켜낼 거라는 뜻이지. 그런데 놈의 포지션은 3선 미드필더야.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알겠지, 브로?”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헨도가 톰슨을 마크하는 것보다 한 템포 늦게 내려가면, 톰슨을 앞뒤로 포위할 수 있다는 뜻이군. 그 상황에서 톰슨은 무조건 왼발을 쓸 거고.”
“맞아. 브로라면 그 상태의 톰슨에게 공을 빼앗아 역습하는 것도, 수비 넷을 제치고 득점하는 것도 간단하겠지.”
“공이야 뺏겠지만, 득점은 말처럼 쉽진 않을 텐데.”
“쉬워.”
브라이언은 확신에 찬 어투로 선언했다.
“파이널 써드에서의 숏 카운터. 그 조건에서 우리 브로를 막을 수 있는 선수가 아예 없진 않겠지만, 유소년 리그에선 찾기 힘들 거야. 브로는 반드시 프로가 될 수 있는 재능이거든.”
당시의 나는 자신의 선수로서의 가치가 제로임을, 스스로가 프로가 될 수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브라이언의 그 말에는 가슴이 살짝 뛰었었다.
실제로 브라이언의 말은, 축구 관련해서는 거의 예언이나 마찬가지였다.
톰슨은 너무나 허무하게 함정에 빠졌고, 나는 첼시 유스 상대로 두 골을 뽑아내며 유소년 리그 득점왕 후보에 올라섰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놈은 자신의 축구 지능을 무기 삼아, 우리 중 누구보다도 먼저 프로가 되었다.
선수 시절 브라이언의 가치는 삼십억 원.
결코 프리미어 리그에서 활약할 정도의 재능은 아니었다. 실제로 놈은 1군 경기에선 한 번도 뛰어보지 못한 채 벤치 생활을 전전하다 은퇴를 선택해야 했다.
선수로서는 지나치게 투박한 발재간, 그리고 부족한 피지컬이 발목을 잡은 것이다.
하지만, 부족한 기술과 피지컬은 어디까지나 본인이 직접 선수로 뛸 때나 결점이 될 항목으로, 코칭스태프 노릇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전력분석관은 브라이언에게는 천직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
브라이언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되돌렸다.
“그럼 오늘은 좀 빨리 정리해야겠다. 크리그, 그만 공 챙겨.”
그러자 여태 묵묵히 연습에 매진하던 크리그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저분들은 선수가 아니니 그라운드에 들어오면 안 된다고 하셨지만, 저는 선수니까 괜찮지 않습니까, 코치님?”
“오늘은 문 일찍 닫을 거야. 보다시피 친구 만났거든.”
“그럼 아카데미 쪽 훈련장을 써야겠군요. 1군 훈련장은 잠겼더라고요.”
“너는 쉰다는 발상은 없는 거냐? 이제 시즌오프고, 어제부터 선수단은 전체 휴가잖아!”
“휴가라는 건 쉬어도 된단 뜻이지, 무조건 쉬라는 뜻이 아니잖습니까.”
“쉴 때는 쉬는 것도 프로의 업무야.”
“제 업무는 골 넣는 건데요. 그걸 못해서 지금 연습 중인 거고요.”
가볍게 티격태격하는 크리그와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나는 먼저 몸을 돌렸다.
축구 보는 눈이 뛰어난 코칭스태프 브라이언.
3부 리그에서는 첫 손에 꼽힐 재능과 성실함을 겸비한 스트라이커, 크리그.
앞으로 이 두 사람이 구단 재건의 핵심이 될 거라는 걸.
나는 구단 인수 첫날부터 민감하게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