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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6화 (6/422)

6화 답답해도 뛸 순 없다 (5)

퇴근 후, 바에서 다시 만난 브라이언은 무척 지쳐 보였다.

“미안. 조금 늦었지? 처리할 게 좀 있어서.”

“그 처리 말인데. 설마 크리그를 경기장 구석에 묻어버렸다는 소린 아니겠지.”

“크크. 차라리 바닷가에 던져버리는 게 낫지. 괜히 경기장에 묻으면 잔디 관리하기 힘들어져.”

농담으로라도 잔디밭에 묻겠다는 소리는 못 하는 모습을 보니, 녀석이 잔디관리인 노릇에도 꽤 성실해졌음을 알겠다.

“사실은 거의 묻어버릴 뻔하긴 했다. 말을 더럽게 안 듣더라고.”

“그래?”

의외였다.

물론 크리그는 고집이 꽤 있는 성격같긴 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성실한 선수다. 그리고 성실한 운동 선수 대부분은 규범에도 충실하다.

아무리 봐도 항명할 것 같은 타입 같진 않았는데.

“내 앞에선 순순히 짐 싸는 척 하고 나중에 슬쩍 기어들어올 생각이었던 거야. 뻔하지.”

아, 참. 크리그는 연습벌레였지.

“그래서 내 눈 앞에서 당장 시동 걸고 꺼지랬더니, 이번엔 자기 차가 아니라고 발뺌하지 뭐야.”

“그랬냐.”

“흥, 새 차 끌고 오면 내가 모를 줄 알고? 관계자용 주차장에 차 댈 사람이 지금 나하고 그놈밖에 더 있겠어?”

“그 말인즉슨, 다른 직원들은 안 나온단 소리 같다?”

“맞아. 모조리 휴직 중이거든. 그래도 구단주는 매일 사무실에 나오긴 하는데, 오늘은 웬일로 점심때쯤 나가버리더라고··· 어디 간다는 말도 없이.”

아마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 거다.

“아무튼 크리그 그 자식, 말이 되는 소릴 해야지. 지 아니면 누가 여기 애스턴 마틴을 끌고 와.”

“그거 내 차인데.”

그러자 브라이언의 얼굴이 구겨졌다.

“고오맙다. 덕분에 인스타에 올릴 사진 한 장 벌었네.”

“인스타?”

“요즘 SNS 담당도 하고 있거든.”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희주가 가볍게 치를 떨었다. 자기 경쟁자가 나타났다며.

얘는 갑자기 또 뭔 소린가 싶었다가, 희주의 1지망 보직이 소셜 네트워커였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니, 아이돌 와치맨이었던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브라이언이 표정을 고쳤다.

“브로, 다음부턴 주차구역 잘 지켜. 오늘 같은 비시즌에는 관계자용 자리에 슬쩍 대도 상관 없긴 한데··· 혹시라도 구단주가 보면 별로 안 좋아할 걸.”

“그러진 않을 거야.”

내가 구단주니까.

그나저나, 도대체 브라이언 이 녀석은 대체 구단 업무를 몇 가지나 겸직 중인 거지?

바텐더, 매점 직원, 잔디 관리인··· 그리고 주차 요원, 그냥 일반 구단 직원이라고 해도 피곤할 업무량인데, 브라이언의 본업은 전력분석관, 그러니까 코칭스태프다.

“너 그러다 언젠가 과로사한다.”

브라이언이 열없이 웃었다.

“그렇게 바쁘지도 않아. 봤잖아? 매점 한가한 거. 주차장도 그렇고···.”

“하긴, 바에도 손님이 없긴 하네.”

우리 말고 다른 손님이라고는 개미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는 상태다. 음, 위생적이라는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겠어.

“그러게나 말이야. 칵테일 레시피도 완벽하게 습득해서 내놓고 있는데, 손님들은 이상하게 불만이 많단 말이지··· 먹어볼래?”

“아니, 그냥 콜라나 한 잔···.”

브라이언의 전설적인 손재주를 아는 나는 떨떠름하게 대꾸하려 했지만, 한 발 늦었다.

“먹어볼래요!”

뜨악한 시선을 보내자, 희주가 의아한 시선으로 되받았다.

“왜? 공짜라면 양잿물도 마신다잖아?”

그러다 정말로 양잿물 마실 수도 있다니까, 요 기집애야.

하지만 말리기에는 이미 늦었다. 브라이언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스태프룸에 향했고, 잠시 후 적어도 겉보기엔 완벽한 바텐더가 되어 돌아왔다.

나비 넥타이, 멀끔한 제복, 깔끔하게 빗어 넘긴 머리··· 생각보다 너무 완벽하다.

왜냐면···.

“브로? 내 얼굴에 뭐 묻었나?”

묻었다. 그것도 엄청난게. 이마에 0이 하나 더 붙었거든.

낮에는 직원용 캡모자 때문에 몰랐는데, 이 녀석 몸값이 엄청나게 올라 있다. 선수 시절에는 삼십억 원이었는데, 지금은 삼백억 원이다.

몸값이 올랐을 거라고 생각하긴 했었다. 브라이언의 재능은 탁월한 축구 지능 위주이고, 따라서 직접 선수로 뛰는 것보다는 코치나 감독 쪽이 훨씬 적성에 맞을 테니까.

선수로서는 3류 수준이었지만, 코칭스태프를 맡으면 틀림없이 우수할 거라고 확신하기도 했다.

그래도 이 정도일줄은 몰랐다.

삼백억 원의 가치가 있는 코칭 스태프면, 일단 몸값만 놓고 보면 프리미어 리그 감독들 사이에 세워 놔도 부족함 없는 수준이거든.

정작 지금의 브라이언은 술병들 사이에 서서 쉐이커를 흔들고 있지만.

심지어 꽤 능숙하다.

설마 이 녀석, 삼백억 짜리 바텐더가 되어버린 건 아니겠지?

“우와! 두 달만에 이 정도라고요? 장난 아니다. 전 완전 프로인줄 알았어요. 혹시 재능 있으신 거 아니에요?”

호들갑떠는 희주를 잠시 원망스럽게 바라보았다.

나도 어지간하면 친구의 숨겨진 재능에 기뻐해주고 싶긴 한데, 브라이언은 팀의 핵심이 될 코칭 스태프다.

선수로선 쩌리였던 친구가 바텐더로서는 삼백억 원인 건에 대하여 - 같은 결말은 사양하고 싶다니까?

“연습 많이 했었죠. 처음에는 레시피를 외웠고, 다음에는 전임 바텐더의 동작을 영상으로 찍어서 꼼꼼하게 체크했습니다. 그런 쪽의 작업은 익숙하니까요.”

하긴, 브라이언 이 놈은 현역 시절부터 남의 버릇 캐는 게 특기였던 선수다. 칵테일 만드는 동작을 흉내내는 정도는 간단하겠지.

“그런 피나는 노력의 결과물입니다.”

“하긴, 세상에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은 없다고 하더군요. 맛있는 한잔, 기대할게요.”

아니, 보답받지 못하는 노력도 있어야 해. 그래야만 해.

잠시 후 브라이언이 내놓은 칵테일에서는, 농약 맛이 났다.

도대체 어떻게 만들면 칵테일이 이렇게 되는 건지 궁금해지는 한편, 안도감도 들었다. 적어도 이따위 칵테일을 만드는 이상, 브라이언이 삼백억원 짜리 바텐더일 가능성은 없거든.

따라서 삼백억짜리 가격은 코칭스태프로서의 가치로 확정된다.

나는 브라이언과 함께 축구팀을 재건하고 싶은 거지, 세계 최고의 바를 만들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농약맛 칵테일인데도 미소가 지어진다.

브라이언의 표정도 밝아졌다.

“맛있지? 역시 브로는 알아줄 거라 믿었어. 손님들은 이상하게 불만이긴 하지만.”

“어··· 단골들은 전통적인 맛을 선호하는 법이야. 사람들은 원래 보수적이거든.”

“하긴, 콜라 회사도 전에 레시피 한번 잘못 바꿨다가 아주 난리 났다고 했었지.”

네 칵테일을 그 빨간색 콜라에 비교하긴 너무 실례인데.

“그러니 되도록이면 원래 바텐더가 복직하는게 좋겠네. 너는··· 그냥 본업에 충실하고.”

앞으로 브라이언에게는 축구 관련 업무만 시킬 거다. 그 외의 것들은 전부 낭비다.

삼백억 원짜리 코칭 스태프에게 잡무를 시키는 건 축구계의 크나큰 낭비고, 농약맛 칵테일은 재료 낭비거든.

브라이언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게 말처럼 쉬워야 말이지. 브로, 생각해 봐. 요즘 같은 불경기에 도대체 누가 제 발로 나가겠냐. 전부 구단주가 쫓아낸 거야.”

“해고했어?”

“몇 명은. 대부분은 무급휴직 같은 식으로 처리했지만.”

“구단 재정이 그렇게 엉망이었냐?”

“그렇지. 올해도 승격 실패했으니까. 백투백 강등에 이어서, 2년 연속 승격 실패잖아? 자연히 팬심도 추락하고, 구단가치도 폭락한 거지. 재정도 그렇게 꼬인 거고.”

덕분에 나는 구단을 퍽 싸게 사들였긴 한데···.

이쯤 되면 조금 다른 걱정이 생긴다.

예를 들면, 브라이언이 앞으로 구단에 계속 남아줄지. 녀석의 재능은 3부 리그에 잡아두기엔 너무 크고, 지금의 구단 꼬라지는 너무 개판이다.

물론 나 또한 선덜랜드를 계속 3부 리그에 머무르게 할 생각은 없지만, 브라이언에게 인내심이 남아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솔직히 보통 사람 같았으면 진작에 때려 치우고도 남았을 조건이다.

“그래서 팀은 현재 고강도 구조 조정 중이지. 조만간 구단을 팔아치우려 들지 않을까?”

정확히는 이미 팔아치웠지. 나한테.

그나저나, 이미 구조 조정을 해버렸단 말이지.

입맛이 쓰다.

축구를 그만두고 투자를 업으로 삼은지 벌써 13년, 비슷한 사례를 수도 없이 봤다.

비용은 최대한 줄이고 매출은 늘려 잡으려 발버둥을 친다. 당장의 실적이 좋아 보여야 제 값에 팔아치울 가능성이 높아질 테니.

그 대가로 조직의 미래가 사라진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팔고 나면 어차피 남남이거든.

그런 식으로 망가지는 회사를, 지금까지 몇 번이나 봐 왔다.

선덜랜드는 다를까.

재정 문제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있으니까. 천하의 만수르가 상대라도, 적어도 돈으로는 꿇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지난 13년간, 그 정도로는 돈을 벌었다.

하지만 그렇게 돈을 긁어모았기에,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 있다는 것도 확신하게 되었다.

오랫동안 일했던 직원들, 그들의 충성심과 경험은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들이다.

구단을 사랑하는 열광적인 팬들 또한 돈으로는 살 수 없다.

구단 직원들을 잃었다. 그리고 쫓겨난 직원들 대부분이 이 지역 주민들임을 고려한다면, 머지 않아 팬들 또한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되돌려야 한다. 더 늦기 전에.

아니,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

브라이언은 두 달동안 바텐더 노릇을 했다고 말했다. 바꿔 말하면 전임 바텐더가 두 달 전에 떠났다는 뜻이다. 말은 휴직이라고 하지만, 사실상 쫓겨난 거나 마찬가지다. 매점 직원이나 주차 요원도 아마··· 비슷한 시기에 짐을 쌌겠지.

그리고 브라이언, 내 오랜 친구는.

무려 삼백억 원의 가치가 있는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도 못한 채 오만가지 잡무에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진작에 팀 상황에 정나미가 떨어졌어도 이상하지 않다.

문득 가슴 한 구석이 얹힌 것처럼 답답했다.

과연 나는, 이 팀을 되살릴 수 있을까?

그리고 브라이언은 계속 팀에 머물러 줄까?

구단주로서는 당연히 붙잡고 싶다. 삼백억 원의 재능이 있는 코칭 스태프, 장차 일류 감독으로 성장할 인재를 놓치고 싶지 않다는 게 본심이다.

하지만 친구로서는 차마 붙잡기 미안하다.

내가 입술을 깨무는 사이, 옆에서 희주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어, 그런데 재정 문제라면··· 그냥 매점이나 바는 아예 영업 중단하는 게 낫지 않나요? 어차피 브라이언 씨가 일하는 이상, 인건비는 계속 발생하는 거 아닌가요?”

브라이언이 담담하게 웃었다.

“인건비가 왜 들죠?”

“그야··· 지금 하시는 건 일종의 초과근무니까요. 그러니까 수당 같은 걸.”

“따로 돈 안 받아요.”

희주가 경악했다.

“말도 안 돼! 열정페이라니, 헬조선에서나 있는 건줄 알았는데··· 브라이언 씨는 어째서 그렇게까지 하는 거죠?”

브라이언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우리 팀, 내가 있어야 할 팀이니까요.”

어쩐지 목이 간질거려서, 눈앞에 놓인 칵테일 잔을 그대로 입 안에 털어넣었다.

신기하게도, 조금 전까지 농약맛이 나던 브라이언의 엉터리 칵테일이 무척 달콤하게 느껴졌다.

상황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구단의 상태는 변함없이 암울하고, 해결할 문제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그렇지만, 더 이상 가슴이 답답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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