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1)
<클래스는 돈으로 살 수 없다 - 아스널 서포터즈>
세상에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많다. 구단에 대한 애정, 헌신, 충성 같은 감정들도 그 중 하나다.
물론 요즘 세상은 자본주의 논리로 움직이고, 축구판도 딱히 예외는 아니게 되었다.
거액의 연봉에 넘어가, 중국행 비행기에 오르는 선수나 감독은 요즘에는 드물지도 않다.
하지만 축구판에는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는 로맨티스트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강등당한 소속팀을 떠나는 대신, [신사는 숙녀가 원할때 떠나지 않는다] 며 오히려 팀의 부흥을 도운 판타지스타 델피에로.
[내 심장이 리버풀을 원한다]며 수많은 강팀들의 이적 제의를 거부한 채, 끝내 리그 트로피 없이 선수 생활을 마무리한 제라드 같은 로맨티스트들.
그런 로맨티스트들의 명단 맨 아래쪽에, 이제 새로운 이름을 더할 수 있게 되었다.
팀의 유소년 출신. 은퇴 이후엔 코칭 스태프로 팀에 남아, 오만가지 잡일까지 도맡으며 무너져 가는 구단을 지탱한 브라이언에게는 틀림없이 명단에 오를 자격이···.
“뭐, 언제까지 우리 팀일지는 모르겠지만.”
내 감동 물어내라. 빌어먹을 놈.
“왜, 이직이라도 하려고?”
“내가 미쳤냐? 흐흐, 내 발로는 죽어도 안 나가지.”
잠시 눈을 희번뜩거리던 브라이언이 한숨을 쉰다.
“머지않아 잘릴 거 같아. 뻔한 거 아니야, 브로?”
옆에서 희주도 재빨리 거들었다.
“하긴, 저도 이상하다 싶긴 했어요. 주차 요원이나 매점 직원, 잔디 관리인보다는 코칭스태프 월급이 훨씬 비쌀 테니까요.”
더 몸값이 싼 매점 직원이나 주차 요원을 먼저 자르고, 월급 비싼 코칭스태프가 땜빵하는 운영은 분명히 비정상적이고, 얼핏 보면 합리적이지도 않다.
하지만, 스포츠 구단의 운영에는 또 다른 요소를 고려해야 한다.
바로 팀의 성적이다.
당장 팀을 팔아치우기로 결심한 구단주조차 성적을 무시할 수는 없다. 구단의 성적은 구단가치에 직결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특히 승격을 앞둔 상황이라면 더욱 그렇다. 혹시 선덜랜드가 이번에 챔피언쉽에 승격했다면, 절대로 삼백억 원에 사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 승격했다면 애초에 구단을 인수하려고 마음먹지도 않았겠구나.
아무튼, 선덜랜드는 승격 플레이오프 진출까지 단 1점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그만큼 아슬아슬한 차이였으니, 시즌 중에는 도저히 코칭스태프를 자를 수 있을 리 없다.
하지만 시즌은 어제 끝났다. 코칭스태프를 물갈이하기엔 딱 좋은 시기다. 최종 성적은 승격 실패니까, 명분도 딱 적당하다.
성적에 아무 상관없는 구단 직원들도 비용 문제로 가차없이 잘라버린 전임 구단주의 스타일을 고려하면, 브라이언의 목은 꽤 위태로운 상태였을 것이다.
“맞다. 구단주가 그러더라고. 내일 잠깐 면담 좀 하자고.”
브라이언 이 녀석, 진짜로 위태로웠구나.
단 하루만 늦었으면 브라이언이 잘렸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그만 눈앞이 아찔해졌고, 그에 비례해서 희주의 고개는 무척 빳빳해졌다.
이번에 희주가 여러모로 애쓰지 않았다면 브리스톨에서 선덜랜드까지 하루만에 날아오지는 못했을 것이다.
약속했던 신상 백과 지갑에 더해, 구두라도 하나 얹어야 할 것 같다.
“아마 자르겠지? 잘릴 것 같아.”
“구단주가 제정신이면 절대로 널 자를 일 없다. 안심해.”
“우리 구단주 알기나 하고?”
“좀 알아.”
뭐, 내일 구단주실에서 만나면 이 녀석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 나는 슬쩍 이야기를 돌렸다.
“그보다, 오히려 감독이 위험하지 않겠냐? 감독이야말로 파리 목숨이잖아.”
사실 지금의 선덜랜드처럼 구단 직원들까지 잘라버리는 경우는 무척 드물다. 이런 모습은, 파산 직전의 구단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다.
하지만 감독을 자르는 일은 축구계에서는 무척 흔해서, 별다른 화제도 안 될 정도다.
마침 승격에 실패했으니 명분도 적절하다.
“아, 그러고보니 감독도 면담 잡혔다고 들었어. 내일 아침에.”
예상대로네.
비용 절감에 혈안이 되었던 전임 구단주 로널드라면 틀림없이 시즌이 끝나자마자 감독을 자르려 들었을 테니까.
하지만, 지금의 선덜랜드 구단주는 로널드가 아니라 나다.
그리고 내 점수는요.
직접 만나보고 판단하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자르는 쪽으로 무게가 실린 상태다. 브리스톨 원정에서의 졸전이 너무나 생생하기 때문에.
시즌 마지막 경기, 이겼으면 승격 플레이오프를 노릴 수 있던 바로 그 경기!
생각 같아선 지금 전화 한 통으로 잘라버려도 시원찮을 판인데, 브라이언은 어쩐지 확신에 찬 듯한 표정으로 단언했다.
“브로, 내기할까? 감독 잘릴지 안 잘릴지. 나는 유임에 한 표.”
“내기는 관두자. 별로 공정한 내기는 아닌 거 같거든.”
“하긴, 내가 너무 유리하지.”
그 반대다. 네게 너무 불리하지.
“아무튼 브로, 라일 파커 정도면 리그 최고 명장이야. P급 라이센스 보유자거든. 잘릴 일은 없지.”
“P급 라이센스?”
생소한 용어에 옆에서 희주가 호기심어린 시선을 보내온다. 브라이언과 내가 차례로 설명했다.
“감독이 되기 위한 자격증 같은 겁니다. P급이 제일 높죠.”
“한마디로 정교사 1급 자격 같은 거야.”
“축구판도 자격증 없이는 살아남기 어려운 곳이었구나.”
“그런 셈이지.”
P급 라이센스. 유럽 대회에서 팀을 지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자격. 3부 리그 팀인 지금의 선덜랜드 감독을 맡기에는 과분할 정도다.
하지만 실력은?
경기를 직접 지켜본 내 눈으로 보기엔 결코 P급 라이센스에 어울리는 지휘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작 한 경기만으로 감독의 자질을 판단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감독을 가까이에서 보좌한 브라이언의 의견은 어떨까?
“네가 보기엔 어떤데? 네임밸류나 자격, 경력 같은거 잠깐 제쳐두고··· 순수한 능력은?”
“실적은 좋아.”
“좋다고?”
승격도 못하고 미끄러진 인간이?
“토너먼트에 강한 타입이거든. 리그에서는 마지막에 미끄러졌지만, 컵 대회에서는 괜찮았어. 챔피언십 팀도 몇 번쯤 잡아냈고.”
“그건 대단하긴 하네.”
챔피언십 팀들은, 컵 대회에서 만날 땐 프리미어리그 상위권 팀 못지 않은 까다로운 상대다.
프리미어리그 팀이라면 컵 대회에선 2군과 유소년 위주로 내보내지만, 챔피언십 팀들은 그럴 사치를 부릴 여력이 없다.
배부른 호랑이보다 굶주린 늑대가 훨씬 무서운 법이다.
라일 파커는 토너먼트에 강한 타입이라는 정보를 마음속 한곳에 기억해두고, 다시 물었다.
“실적은 그렇다 치고, 능력은?”
“내 입으로 말하긴 좀 그런데.”
브라이언의 얼굴엔, 지금까지 본 것중에 가장 격렬한 거부감이 떠올라 있었다.
***
“보고서를, 보고서를 써줘도 안 읽어! 이게 말이나 됩니까?”
“감독이 안 읽었다고요? 어떻게 확신하죠?”
“사이에 머리카락 끼워 놨어요··· 소중한 모발···.”
“저런, 아깝네요.”
“괜찮아요. 다음달 월급 받으면··· 발모제 살 겁니다.”
깔끔하게 빗어넘긴 헤어 스타일 때문에 눈치채지 못했는데, 브라이언의 이마 선이 예전보다 꽤 올라가긴 했다.
“그리고 라일 파커, 이 답답한 양반아! 크리그 그렇게 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딸꾹!”
말한 게 아니라 보고서에 쓴 거겠지, 이 친구야.
그리고 라일 파커는 브라이언의 보고서를 읽지도 않고 내팽개쳤고.
브라이언은 자타가 공인하는 축잘알, 그의 분석력은 정말로 탁월하다. 하지만 보고서를 잘 만드는 타입은 아니다.
따라서 단순히 브라이언의 보고서가 읽기 불편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는 없긴 한데···.
“너 말고 다른 분석관은 없냐?”
“있었으면··· 내가 이렇게 굴렀겠냐.”
음, 브라이언이 직접 만들었다면 일단 가독성 좋은 보고서는 아니었겠다.
옆에서 희주가 다시 브라이언에게 물었다.
“그래서, 보고서는 도대체 왜 안 읽는대요?”
“축알못이라고 까던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내가 선수 보는 눈은 좀 없어도, SQ는 완벽한데요. 내 SQ는 정말로 완벽하다니까요.”
취기에 꼬부라진 혀로 한탄하던 브라이언은, 마침내 테이블에 머리를 쳐박고 말았다. 그런 브라이언을 내려다보던 희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SQ가 뭐야?”
“축구 지능. 사커 아이큐의 줄임말이라던데.”
“그렇구나. 근데 영국은 사커가 아니라 풋볼 아니야?”
“FQ는 어감이 별로래.”
희주는 내 대답에 한참을 소리죽여 키득거린 다음에야 입을 열었다.
“그래서, 완벽한 축구 지능이라는 말, 진짜야 오빠?”
“맞아.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선 제일 뛰어났으니까.”
“···그렇구나.”
한참동안 내 쪽을 빤히 바라보던 희주가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나저나, 브라이언 씨는 술 먹이지 말아야겠다.”
나는 깊은 한숨을 섞어 답했다.
“너어는 정말.”
사실, 처음부터 브라이언이 감독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은 건 아니었다. 술이 들어가기 전까지, 브라이언은 이런 저런 이유를 대며 평가를 거부했다.
하다못해 술이라도 좀 먹이면 솔직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려나 싶었지만, 녀석은 의외로 완강한 태도로 버텼다.
오랜만에 만났으니 한 잔 하자는 내 권유는 순순히 받아들였지만, 두 잔째부터는 가차없었다.
[브로, 벌써 취했어? 내일 구단주랑 미팅 있다고 했잖아. 일찍 일어나서 준비해야지.]
[그냥 좀 마시고 일찍 자면 되잖아.]
[나 숙직 서야 해.]
마치 전성기 이탈리아의 카테나치오를 보는 듯한 브라이언의 철벽 방어는, 의외로 사소한 부분에서 무력했다.
[브라이언 씨, 술 되게 약한가봐요?]
[에이 설마요. 아가씨 오빠보다는 제가 훨씬 셀 걸요.]
[진짜요? 그런데 그런 분이 겨우 한두 잔으로 내일 미팅에 차질이 생길 걱정을 해요?]
두 잔째가 분수령이었다. 세상에는 취기가 오를수록 술을 더 찾는 종류의 인간들이 있고, 브라이언 역시 그런 타입이었다.
이후 벌어진 일은 브라이언의 명예를 위해 굳이 밝히지 않도록 하자.
그저, 녀석은 엉망으로 취했고 우리는 그런 브라이언을 간신히 숙직실에 쳐박았다는 정도만 말해두겠다.
“오빠, 브라이언 씨의 축구 지능이 완벽하다고 했었지?”
“그랬지.”
“그런데도 브라이언 씨를 축알못이라고 무시했다는 건, 감독의 안목이 형편없다는 뜻이겠네?”
“아마도 그렇겠지.”
브라이언이 완벽한 초인 같은 건 아니다. 의외로 여자를 밝히는 편이고, 주량은 약하며, 그런 주제에 주사도 꽤 부린다.
자기가 만든 농약맛 칵테일을 좋다고 퍼마시는 걸 보면 미각도 엉망이거니와, 요즘 들어 부쩍 올라가기 시작한 이마 라인도 영 위험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결점 가운데, 축알못이라는 단어만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내가 아는 브라이언은 예전부터 몇 번이나 예리한 축구 지능을 과시했던 녀석이며, 코칭스태프가 된 지금은 잠재가치 삼백억 원의 몸값이 붙어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브라이언의 가치를 모르는 감독, 라일 파커야말로 진짜 축알못이다.
브라이언조차 축알못으로 취급할 수 있을 정도의 엄청난 명장일 가능성도 제로는 아니겠지만··· 그런 명장은 지금의 선덜랜드엔 와주지 않겠지.
희주가 키득거렸다.
“내일, 도대체 어떤 인간이 나타날까, 기대되네.”
“그러게나 말이다.”
대답하면서도 나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몸값 오억 원쯤 되는 양반이 나타나면 다행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동안 수고했다고 인사한 다음, 곧바로 경질해버리면 되겠지.
그런 내 예상은 다음날 아침 9시가 되자마자 박살났다.
“새로 오신 구단주라고요? 반갑습니다. 제가 라일 파커입니다.”
몸값은 무려 칠십억 원.
지금의 선덜랜드에서는, 돈으로도 못 데려올 감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