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8화 (8/422)

8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2)

처음에는 눈을 의심했다. 어쩌면 내가 숫자를 잘못 본 게 아닐까?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이마의 숫자에는 변함이 없었다.

70, 틀림없는 숫자 70이다.

“저··· 구단주님,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아, 죄송합니다. 아침 햇살이 들어와서 눈이 조금 따갑네요.”

사실은 감독님의 이마가 눈부십니다. 정확히는 숫자 70이요.

칠십억 원의 가치가 있는 감독.

엄청나게 뛰어난 감독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3부리그에서는 과분한 감독이다. 최소 챔피언십 팀은 맡아야 할 인물이고, 프리미어 리그 하위권까지도 충분히 통할 재능이다.

도대체 왜 이런 감독이 선덜랜드에 와 있는 거지?

아니, 질문을 고쳐야 할 것 같다.

도대체 왜 이런 감독이 선덜랜드를 승격시키지 못한 거지?

그리고 왜 이런 감독이, 브라이언을 축알못이라며 무시했던 거지?

차라리 가치가 낮으면 그냥 감독이 무능해서 그렇다고, 축알못이라고 치고 말겠는데··· 그렇게 넘기자니 너무 거물이 나타나 버렸다.

의문을 한구석에 밀어내며, 감독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희성입니다. 편하게 썬이라고 부르시죠.”

“그럴 수는 없죠, 구단주님.”

정중한 태도, 일단 첫인상은 합격이다. 나는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며 파커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나저나, 오늘 미팅 아젠다가 뭐였더라?

조금 전까지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적당히 인사치례나 하다가 파커를 바로 잘라버릴 생각이었으니.

하지만 파커는 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난 가치를 가진 감독이었다. 몸값만 보고 곧바로 재계약하진 않겠지만, 적어도 어떤 감독인지 좀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러려면 이야기를 주고받아야 한다.

[구단주가 바뀌었으니 얼굴이나 보고 인사나 나누는 자리] 정도면 딱 적당하겠지만, 아쉽게도 오늘 미팅 일정은 전임 구단주 로널드가 잡아놓은 것이다.

지금이라도 로널드에게 전화해서 물어볼까? 오늘 감독 왜 부른 거냐고.

그때 눈앞에 찻잔이 놓였다.

“두 분 다 커피 괜찮으시겠어요? 아니면 홍차로 바꿔 드릴까요?”

영업용 미소를 얼굴 가득히 지으며 희주가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리고 내게 한국어로 슬쩍 속삭인다.

“계약 연장 건. 석 달 남았대.”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표정을 지어 보이자, 손으로 전화기 모양을 만들어 보인다. 음, 로널드에게 전화했구나.

계약 건이란 말이지.

나는 커피에, 정확히는 커피와 함께 희주가 가져온 소식에 만족했고 파커는 처음부터 음료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메뉴는 결국 둘 다 커피 확정이다. 한 모금 입을 축인 다음, 내가 먼저 물었다.

“오늘은 계약 이야기를 하기로 되어 있었죠?”

“맞습니다. 하지만 계약 건은 나중에 천천히 논의해도 괜찮습니다. 구단 인수 직후니까, 팀 상태나 저에 대해 알아볼 시간도 필요하니까요.”

“오늘 대화를 좀 해보면 감독님에 대해서 알게 될 것 같네요.”

“네?”

눈만 깜빡이는 파커를 향해 또박또박 말했다.

“계약 문제는 오늘 중으로 마무리할 겁니다.”

“그렇게 해주시면 저는 좋지만···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닙니까?”

어쩌면 희주도 똑같이 생각할 것이다. 저 멀리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입을 뻐끔거리는 희주의 얼굴을 보면.

“구단의 시즌 준비는 항상 감독과 같이 가는 거죠. 코칭스태프도, 선수단도 결국 감독의 시즌 계획에 맞춰서 영입해야 하는 거니까요.”

“하하, 그건 그렇죠. 구단주님 말씀을 들으니 안심했습니다. 적어도 청소기를 원할 때 옷걸이를 사다 주는 분은 아닌 것 같으니까요.”

대신 당신을 오늘 잘라 버릴 수도 있는데.

속으로만 생각하면서 라일 파커의 이마. 그리고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칠십억 원의 가치에 달한다는 그의 몸값. 그리고 자신의 재능에 못 미치는 실적.

어느 쪽이 라일 파커의 진짜 모습인지를 알아야 계약할지, 아니면 자를지를 결정할 수 있다.

내 시선을 눈치챈 라일 파커가 우호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사실 계약 이야기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딱히 계약 조건에는 관심이 없거든요. 네, 저는 사실 돈에는 별 관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네, 계약 조건은 천천히 맞추면 되겠죠.”

고개를 대충 끄덕여 장단을 맞췄다.

사실 곧이들을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살다보니 돈에 관심이 없다는 사람은 오히려 돈에 미친 경우가 훨씬 많았거든.

혹은 이미 돈이 매우 많거나··· 뭐, 파커의 재산 사정은 내 알바는 아니긴 하다.

중요한 건, 파커가 우리 팀에 필요한 감독인지 아닌지.

그것뿐이다.

“우선 감독님의 다음 시즌 계획을 들어보고 싶군요.”

그러자 파커는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제 축구의 핵심 단어는 바로 4P입니다.”

“4P요?”

생소한 용어다. 어감만 봐서는 꼭, 마케팅에서나 쓰는 단어 같다.

에이 설마, 명색이 칠십억짜리 축구 감독이, 올 시즌엔 마케팅을 잘해보자는 소리를 하진 않겠지.

“네, 구단주님. 우리 선덜랜드의 최대 강점은 누가 뭐래도 크고 아름다운 경기장, 그리고 그 경기장을 가득 메우는 팬들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죠.”

”스탠드를 가득 메운 팬들의 열광적인 성원은 홈 팀의 강력한 무기가 되고, 구단의 재정에도 큰 도움이 되죠. 따라서 팬들이 돌아오게 만드는 게 최우선 과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진짜로 마케팅 이야기였냐!

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매력적인 축구와 적극적인 팬 서비스를 앞세워, 떠나간 팬들을 다시 불러들여야 한다. 팬의 복귀는, 구단의 부흥을 위해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며,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가치다.

그렇긴 한데··· 감독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닐 텐데?

그냥 확 지금 잘라?

“그래서, 감독님이 말씀하시는 4P가 도대체 뭡니까?”

“패스(Pass)와 침투(Penetration), 그리고 점유율(Possession)과 인내(Patience)죠.”

아, 축구 이야기네. 운율 맞추느라 고생했겠다.

“즉, 점유율 축구를 하겠다는 뜻입니까?”

“그렇습니다. 점유율 축구, 화끈한 공격 축구를 목표로 삼을 생각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요.”

“지금까지도 쭉 공격 축구를 해 오셨다는 거군요.”

“그렇습니다. 우리 선덜랜드는 리그 원에서는 손꼽히는 강팀이니까 공격 축구가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저는 승패를 떠나 항상 공격적인 축구를 요구했습니다. 그래야 관중 동원력에도 유리하죠.”

“논리적이군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파커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경기 중, 팀의 최우선 목표는 점유율을 유지하는 겁니다. 점유율을 위해서는 팀 전체가 인내해야 하죠. 그렇게 점유율을 가진 상태에서, 패스와 침투를 통해 결과를 만들어낼 겁니다.”

“팀에 결과를 만들어낼 공격수가 있습니까?”

“당연히 크리그죠. 팀의 간판 스트라이커니까요.”

크리그 이야기가 나왔다.

그러고 보니 줄곧 궁금했었다. 무척이나 성실한 데다, 3부 리그에서 충분히 통할 만한 재능까지 가진 크리그가 어째서 두 시즌 내내 침묵했는지.

“그 친구는 요즘 조금 부진한 것 같던데요.”

“하하, 구단주님! 득점이나 어시스트 같은 단편적인 스탯만 보시면 그렇게 생각하실 수도 있겠지만, 경기 내용을 보시면 생각이 바뀌실 겁니다.”

아니, 경기 봤는데. 득점은커녕 슈팅 한 번을 제대로 못 하더만.

그런데도 라일 파커는 진지했다.

“점유율 축구에는 이타적인 공격수가 필요하거든요.”

파커의 설명은, 내가 아는 크리그의 인상과는 조금 달랐다.

크리그는 동료들을 위해 찬스를 만들기보다, 남이 만들어준 찬스를 직접 해결하는 게 훨씬 어울릴 듯한 선수, 전형적인 골 사냥꾼 타입으로 보였는데.

게다가··· 내가 본 그 경기에서, 크리그는 패스 미스를 했었다. 그것도 킥오프 직후에.

아무리 생각해도 동료들에게 찬스를 만들어주는 역할이 크리그에게 어울릴 것 같지는 않다.

어제 브라이언도 그렇게 말했다. 감독이 크리그 잘못 쓰는 것 같다고.

[라일 파커, 이 답답한 양반아! 크리그 그렇게 쓰지 말라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들어··· 딸꾹!]

귓가에 자꾸만 브라이언의 하소연 소리가 맴돈다.

“알겠습니다. 선수단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스태프는 어떻습니까? 충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파커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습니다. 팀의 코치진은 모두 우수하고,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스태프 중에 유소년 선수 출신 스태프가 한 명 있던데요. 나이도 너무 젊고, 별다른 경력도 없어 보이던데, 괜찮습니까?”

“아, 브라이언 말이군요. 꽤 괜찮은 친구입니다. 아직 미숙한 구석이 없진 않지만, 축구 보는 눈이 아주 좋아요.”

[축알못이라고 까던데요.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어제 브라이언이 했던 이야기와는 정반대다. 서로 뭔가 오해가 있거나··· 아니면?

“알겠습니다. 재계약 제의에 앞서 마지막으로··· 기존 계약 내용을 검토하고 싶군요.”

“감사합니다, 구단주님.”

“그런데 계약서는 법률 용어가 섞여 있어서, 제 짧은 영어 실력만으로는 불안하네요. 통역사의 조언을 듣고 싶습니다.”

“아, 물론 그러셔야죠.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뵐까요?”

“그 정도는 아니고··· 잠시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는 곧바로 유능한 비서 코스프레 중인 희주에게 눈짓을 보냈다.

잠시 후, 희주가 두툼한 서류를 잔뜩 끌어안은 채 내 뒤를 따라나섰다.

“어제는 바로 잘라버릴 것처럼 그러더니, 막상 만나보니 의외로 괜찮았나 봐?”

“뭐, 그런 셈이지.”

“왜? 관상이 좋아 보여?”

“관상?”

“오빠 그런 식으로 투자하잖아. 사람 얼굴 빤히 보다가··· 갑자기 꽂혀서 투자하고.”

정확히는 이마를, 거기 붙어 있는 몸값을 보는 것뿐인데.

하긴, 내 능력을 모르는 사람 눈에는 관상 보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긴 하겠다.

“누굴 점쟁이로 아냐.”

“점쟁이면 뭐 어때?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지! 오빠는 투자의 신이잖아.”

희주 말대로다. 결과가 좋으면 그만이지. 그리고 라일 파커의 지난 시즌은 결과적으로 썩 좋지 못했고.

생각을 가다듬는 사이, 희주가 옆에서 재잘거렸다.

“하긴, 나도 이야기 들어보니 의외로 괜찮아 보이던데. 시즌 구상도 꽤 체계적인 것 같았고, 브라이언 씨에 대한 반응도 엄청 호의적이었지?”

“그랬지.”

“혹시 브라이언 씨가 뭔가 오해한 거 아닐까? 아무리 봐도 엄청 유능한 감독 같잖아.”

“그러게, 너무 유능해 보여서 고민이다.”

“유능하면 좋은 거 아니야?

“보통은 그렇지··· 근데, 이 사람은 실적이 따르지 않았으니까.”

“그저 운이 좀 나빴던 거 아니야? 승격 플레이오프까지 딱 1점 차이, 아까운 시즌이잖아. 컵 대회에선 엄청 잘했다면서. 강팀도 막 잡고!”

축구를 잘 모르는 희주는, 자기가 하는 이야기가 얼마나 이상한지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컵 대회는 토너먼트이고, 공이 둥글다는 격언을 떠올리면 약팀이 강팀 잡아내는 결과는 그렇게까지 보기 드물지는 않다.

하지만 그런 경기에서 약팀들은 보통 수비를 굳히고 역습으로 기회를 노리지, 맞불을 놓고 이기지는 않는다.

라일 파커는 스스로를 그렇게 소개했다. 자신은 점유율 축구를 하는 감독이라고. 승패를 떠나 언제나 공격적인 축구를 요구했다고.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매우 드문 결과다.

“기록 좀 찾아줘.”

“무슨 기록?”

“컵 대회, 강팀들 잡았다는 바로 그 경기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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