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3)
희주는 곧바로 컵 대회 경기 결과를 찾아냈다. 경기 기록부터 언론 보도까지.
나는 희주가 가져온 기사를 눈으로 훑었다.
[아름다운 축구, 빛의 경기장을 수놓다]
마치 한잔해야 할 것 같은 기사 제목 아래에는, 선덜랜드가 미들즈브러 상대로 완승했다는 내용이 적혔다.
결과는 3-1. 상대의 강점을 모조리 무력화하며 전술적으로 압도했다는 찬사는 덤이었다.
옆에서 희주가 입을 삐죽거리며 덧붙였다.
“기사인지 위인전인지 잘 모르겠어. 영국 신문들은 원래 기사 이렇게 써?”
“미들즈브러도 지역 라이벌이거든. 뉴캐슬만큼 오랜 숙적까지는 아니지만, 일단 이웃 동네라서.”
“아하, 라이벌을 잡아내서 기분이 좋아진 거구나. 그래서 오빠, 실제 경기 내용은 어떤 거 같아?”
“훌륭했다고 칭찬받을 정도는 돼.”
일단 기록만 보면 아주 훌륭하다. 점유율은 약간 우세했고, 슈팅 수는 크게 압도했다.
다른 경기에서도 파커는 전부 공격적인 점유율 축구를 하면서 챔피언십 팀 상대로 맹활약을 펼쳤다.
“그렇구나? 역시 이 정도면 능력 있는 감독 같은데··· 맞지?”
“맞아. 확실히 능력은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이쯤 되면 다른 고민을 해 봐야지.”
내 눈에 보이는 칠십억 원의 가치, 그리고 컵 대회에서 보여준 화려한 전술 역량을 고려할 때 라일 파커가 지금의 리그 원 최고의 명장임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서 더욱더 의아하다. 공격 축구가 특기인 이 명장이, 어째서 주전 스트라이커의 득점력은 도무지 살리지 못했는지.
그리고 챔피언십 팀을 맞불로 제압할 수 있는 감독이 어째서 리그 원 팀들 사이에서는 승격조차 하지 못했는지.
고민하는 내 곁에서 희주가 눈을 빛냈다.
“아, 알았다. 월급 문제구나? 오빤 돈이 많지만 그렇다고 흥청망청 쓰진 않으니까. 스스로 아깝다고 생각하는 요소에는 단돈 1원도 안 쓰잖아?”
“어··· 내가 그랬던가?”
여동생에게 퍼주는 고액의 용돈을 고려하면 꽤 흥청망청 쓰는 거 같은데.
“아니라면, 사랑하는 여동생을 위해 새로 나온 버킷백 하나···.”
“이번에 가방 사 줬잖아. 지갑과 구두까지 얹어서.”
“자, 보시다시피 이렇게 알뜰하신 오라버니십니다.”
내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잠시 키득거린 희주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근데 오빠, 아무튼 파커가 돈 좀 많이 받긴 하지만··· 비싸봤자 어차피 오빠한텐 푼돈이니까 신경 쓸 필요 없지 않아?”
“많이 받는다고?”
“돈 욕심 없다더니 순 거짓말이었어. 엄청 받더라고.”
대답하면서 희주는 서류뭉치를 뒤적거리더니, 기존 계약서를 찾아서 내게 내밀었다.
어디 보자. 연봉이 일십백천··· 이거 0이 대체 몇개야?
“구십만 파운드. 참고로 리그 원 감독 평균 연봉은 십팔만 파운드고, 챔피언십 감독 평균은 팔십만 파운드 정도야.”
정말 어마어마하게 퍼주긴 했구나. 희주 말처럼 내겐 푼돈이지만, 지금까지의 선덜랜드 재정에는 치명적이었을 금액이다.
“그래도 부대비용이 없으니까 의외로 저렴한 걸지도? 보니까 옵션이 안 붙었어. 승리수당 성과급 이런 거 일절 없고.”
나는 반사적으로 혀를 찼다.
“로널드, 이 인간 완전 호구였구만.”
“어? 옵션 안 붙으면 구단에 이득 아니야? 돈 나갈 일이 줄어드니까···.”
“그 반대야. 옵션을 넣고 기본급을 줄이는 게 구단에는 훨씬 이롭지.”
“그렇구나! 오빤 구단 운영이 처음인데도 되게 잘 아네.”
“13년 전까지는 받는 쪽이었잖아.”
“아···.”
희주는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아마 눈치챈 거겠지.
당시 유소년 선수이던 내 계약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옵션은 성인 경기 출장 옵션이고, 데뷔에 실패한 나는 옵션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다는 걸.
뭐, 득점 보너스는 나름 쏠쏠하긴 했다.
“그나저나, 너는 언제 이런 걸 다 조사했냐.”
분위기를 전환할 겸, 슬쩍 이야기를 돌렸다.
하부리그 감독들의 평균 연봉. 사실 대수롭지 않은 자료일 수도 있지만, 희주에게는 조사할 시간이 거의 없었음을 고려하면 칭찬할만한 성과일 것이다.
기분이 좋아진 희주가 혀를 내밀었다.
”헤헷, 이런 거 하라고 평소에 용돈 받는 거잖아?”
희주 말처럼 오빠한테 용돈 받아 쓰는 여동생에게도 나름의 고충은 있는 법이다. 특히 높은 확률로 대한민국의 최고액 용돈 수령자일 희주로서는, 그에 맞는 노력은 필수겠지.
최고액 용돈 수령자. 노력.
그렇다면 리그 원의 최고액 연봉 수령자인 라일 파커는, 도대체 무슨 노력을 하고 있을까?
문득, 희미한 착상이 머릿속에서 스멀거리기 시작한다.
“기왕 고생한 김에, 하나만 더 조사해 줘.”
“알았어, 오빠. 뭐가 필요해? 지난 시즌 선덜랜드의 경기 기록? 선수별 시즌 통계? 말만 해!”
유용할 것 같은 자료다. 나중에 꼭 시켜야지.
하지만 지금 필요한 건 따로 있다.
“스포츠 바 블랙캣츠의 영업일지."
영문 모를 지시에, 희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재빨리 대응했다.
잠시 후, 블랙캣츠의 영업일지가 내 눈앞에 놓였다.
“우선, 특이 사항이라면 두 달 전부터 매출이 폭락했다는 거네.”
“··· 그야 칵테일에서 농약 맛이 나니까.”
두 달 전이면, 브라이언이 바 영업을 전담하게 된 시점이다. 녀석의 칵테일 만드는 솜씨를 고려하면, 매출이 폭락했다는 것 자체는 조금도 특이하지 않다.
“가장 특이한 부분은, 지난 두 달 동안 단 하루도 문 닫은 날이 없다는 거야.”
“연중무휴? 그러네! 브라이언 씨 엄청나게 성실한 사람이었네.”
“그게 아니라, 거짓말을 한 거지.”
“··· 브라이언 씨가?”
희주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변했다. 꼭 고양이 눈처럼.
그런 희주를 향해, 나는 짧게 덧붙였다.
“아니. 감독이.”
***
구단주 사무실로 돌아가자 기다리던 라일 파커가 미소로 반겨 주었다.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구단주님. 서류가 꽤 두꺼워 보이는데, 비서 분이 무척 뛰어나신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지금까지 희주한테 바른 사교육비가 얼만데.
“네, 유능하죠. 그래서 말인데요, 감독님. 제 비서가 이런 자료를 보여주더군요.”
희주가 챙겨준 자료, 블랙캣츠의 영업일지를 내밀었더니 라일 파커가 눈을 껌뻑거렸다.
“이게 뭐죠? 스코어북 같진 않은데요.”
“스포츠 바 블랙캣츠의 영업일지입니다.”
“아, 네. 그렇군요.”
파커의 표정이 의아해졌다. 대충 그걸 왜 자기한테 물어보냐는 뜻으로 받아들인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왜냐면 지난 두 달간 바를 운영한 사람이 전력분석관 브라이언이거든요. 기록을 보니 하루도 쉬지 않았더군요.”
그러자 파커의 얼굴에 미소가 돌아왔다.
“아, 난 또 뭐라고. 네, 그랬었죠. 실은 브라이언 그 친구가 자청했던 겁니다. 아시다시피 최근 얼마간 구단 상황이 엉망이었거든요.”
파커의 얼굴에는 여전히 여유 있는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꼭 가면처럼 보였다.
“그래서 승격 플레이오프까지 겨우 1점 차이인데··· 전력분석관 없이 경기를 치르는 모험을 감수하셨다는 말씀입니까?”
“오해십니다. 브라이언은 겸직 상태였거든요. 블랙캣츠에선 우리 경기장이 아주 잘 보이고요.”
“그렇겠죠. 스포츠 바는 원래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술 한잔하려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니까요. 장사가 잘되지도 않았으니 바에서 경기 살펴볼 여유는 충분했을 겁니다.”
“네, 잘 아시네요. 그래서···.”
“그런데, 원정 경기는요?”
파커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곧바로 흠잡을 데 없는 미소, 자신감 있는 웃음을 되찾았다.
“구단주님은 사실 잘 모르실 수도 있겠지만, 전력분석관은 경기 영상을 주로 분석하는 업무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 자식이 누굴 지금 호구로 아나.
만일 축구판 물정을 모르는, 그저 돈만 많은 구단주 상대라면 또 모르겠지만, 나는 유소년 선수 생활을 했다.
“그럼 경기 영상은 누가 찍어다 줍니까?”
유소년 시절, 분석관들이 내게 보여준 영상은 꼼꼼하고 자세했다. 원경과 근경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으며, 구도 또한 다양했다.
분석팀에서 직접 촬영한 결과물이었겠지.
하지만 지금의 선덜랜드엔 다른 분석관이 없다. 그리고 유일한 분석관, 브라이언은 원정 경기에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니 영상을 촬영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브라이언 본인은 자신의 본업에 최대한 충실히 노력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한된 조건에서의 최선. 기껏해야 바에서 중계 영상을 혼자 돌려보는 정도의 분석에 불과하다.
브라이언을 그런 상황에 방치한 건 감독, 라일 파커다.
“구단주님. 그게, 그게 그러니까···.”
“즉, 감독님은 브라이언의 분석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맞습니까?”
그러자 감독의 얼굴에 살짝 생기가 돌아왔다. 내가 퇴로를 열어줬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네, 그렇습니다. 브라이언 그 친구, 자질은 우수해도 아직 젊어서 미숙한 점이 많죠. 1군 경기를 분석할 수준은 아닙니다.”
안타깝게도 그쪽은 막다른 길인데.
“그렇다면 왜 전력분석관을 보강하지 않았습니까?”
다시 말하지만, 선덜랜드는 단 1점 차이로 플레이오프를 놓쳤다. 그야말로 끝까지 결과를 알 수 없는 아슬아슬한 시즌이었다.
“이런 상황에선 지푸라기라도 잡는 게 사람 심리일 텐데, 감독님은 전력분석관을 바에 처박아 두셨고, 새로 뽑지도 않으셨네요.”
맞춤 전술, 그것도 공격 축구로 챔피언십 팀을 잡아낼 정도의 명장이, 리그 원에서 팀을 승격시키지 못한 이유는 자명하다.
굳이 위로 올라갈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파커는 이미 챔피언십 평균 이상의 연봉을 받고 있다. 커리어 욕심을 버릴 수만 있다면, 챔피언십에서 실력을 증명하기보다는, 리그 원에 눌러 앉아 최고의 명장 대우를 받는 게 훨씬 쉽고 편한 길이다.
그러니 주전 공격수에게 엉뚱한 역할을 맡겼고, 전력분석관을 써먹지 않았으며, 시즌 마지막 경기에선 극도로 무기력했던 거겠지.
점유율 축구, 화끈한 공격 축구를 선호하는 이유도 뻔하다. 그래야 팬들의 지지를 받기 쉽고, 그만큼 자기 자리 또한 안전해질 테니까.
파커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굳게 다물어진 그의 입이 다시 열리기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죄송하지만 스태프를 어떻게 쓰는지는 감독인 제 권한입니다. 그런 일로 저를 문책하시려는 생각이시라면···.”
“아뇨. 문책이 아니라 경질입니다. 사유는 태업이고요.”
“태업이라니! 무슨 근거로 그따위 막말을···!”
파커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그래서 이마에 쓰인 70이라는 숫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칠십억 원의 몸값. 능력만 보면 아마 챔피언십, 혹은 그 위에서도 통할 감독임을 보증하는 숫자다.
아깝다. 주인을 잘못 만난 재능이.
파커에게서 음울한 시선이 돌아왔다. 내가 어디까지 눈치챘는지, 어디까지 가려는지 탐색하려는 듯한 눈길이었다.
“근거요? 근거가 왜 필요합니까?”
그 시선을 맞받으며 나는 천천히 되물었다.
“감독을 경질할지 말지는 구단주인 내 권한인데요.”
한참 동안 나를 노려보던 파커가 입술을 깨물었다.
“··· 날 이렇게 잘라버리면, 대안은 구할 수 있겠소? 축구판은 돈만 가지고 되는 게 아닌데.”
“그건 그쪽에서 고민할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알려주려는 거요. 가진 거라곤 돈밖에 없는 사람 같아서. 세상엔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많소. 좋은 감독도 그중 하나지.”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그렇더군요. 당신이 몸소 증명한 것처럼.”
그의 말대로다. 세상에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게 많이 있다. 팀의 클래스도, 좋은 감독도.
하지만 꼴 보기 싫은 인간을 치워 버릴 수는 있다.
그러니까.
“남은 연봉 일시불로 챙겨줄 테니, 당장 짐 싸시죠.”
구단의 시즌 계획은 항상 감독과 뗄 수 없다.
라일 파커를 잘라버리고 새 감독을 구하는 게, 구단 재건의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