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것 (4)
라일 파커가 경질 통보를 듣고 떠나간 직후, 구단주실에는 키보드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샷건이라도 치는 듯한 전투적인 소리가.
나는 컴퓨터는커녕 스마트폰도 안 만지고 있으니, 이 맹렬한 키보드 소리는 당연히 희주 작품이다.
“뭐하냐?”
“응? 언플 준비하는데? 저 인간, 이대로 곱게 보낼 수는 없잖아?”
어째 지나치게 전투적인 타이핑 소리다 싶더라니.
“관둬.”
그러자 희주가 곧바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송은 좀 그래도, 언플은 해줘야 하는 거 아니야? 감독으로서의 사회적 평판이라도 박살 내줘야지. 마침 자료도 있으니까.”
희주는 블랙캣츠의 영업일지를 한 손으로 흔들어 보이며 전투적으로 웃었다.
“넣어 둬.”
“왜? 스캔까지 예쁘게 해놨는데? 이 정도면 라일 파커의 감독 생명은 확실하게 끝장낼 수 있을 거야.”
“대신 우리 팀 이미지도 확실히 끝장나겠지. 막장 오브 막장이라고.”
내 이야기를 알아들은 희주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평소의 희주가 고양이 상이라면, 지금 보니 꼭 너구리 같다.
솜사탕 씻은 너구리.
“··· 알았어. 그럼 다 지울게.”
“지우진 말고. 언젠가 필요할 거 같으니까.”
혹시라도 라일 파커가 나중에 자서전 같은 걸 쓰기라도 할 때를 대비해야 한다.
자기는 최선을 다했지만 새로 온 구단주가 부당하게 잘랐다는 둥 헛소리를 할 수도 있다··· 의외로 축구판에선 자주 있는 일이다.
자료를 보존하라는 지시에, 희주의 얼굴에는 곧 생기가 돌아왔다. 마치 새 솜사탕을 받은 너구리처럼.
아니, 고양이니까 츄르인가.
“그러고 보니 곧 브라이언 씨와 미팅 시간이네. 구단주실에서 오빠 보면 깜짝 놀라겠지? 어떤 표정일까?”
“글쎄, 조금 전 네 표정 변화처럼 극적이진 않을 텐데.”
“하긴, 술이나 깨서 오면 다행이겠다. 브라이언 씨, 이 기회에 술 끊으라고 하자. 어때?”
너어는 정말.
***
구단주 사무실에 나타난 브라이언의 상태는, 우리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아이고 머리야. 죄송합니다. 술이 덜 깨서요.”
딱히 음주측정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아직 몸 곳곳에 술기운이 남았음은 명백했다. 브라이언은 아직 바텐더 유니폼을 입고 있으니까.
삐뚤어진 나비넥타이나 여기저기 구겨진 셔츠 같은 흔적에서, 눈뜨자마자 곧바로 달려왔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런데 술이 덜 깨서 그런지, 구단주님 얼굴이 꼭 제 브로처럼 보이네요. 죄송한데 세수 좀 하고 와도 괜찮을까요?”
“괜찮긴 한데··· 그렇다고 크게 달라지는 건 없을 거야. 네 친구 맞거든.”
실은 어제 구단을 샀고, 따라서 오늘부터 내가 선덜랜드 구단주라는 사실을 세 번쯤 참을성 있게 반복하자 브라이언의 동공이 차츰 흔들리기 시작했다.
브라이언의 머리가, 마치 고장 난 기계처럼 삐걱거리며 옆으로 돌았다.
희주 쪽이다.
“저, 아름다우신 레이디? 괜찮으시면 제 뺨을 좀···.”
“때려드릴까요?”
“···그래도 술이야 깨겠지만, 기왕이면 살짝 꼬집어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러자 희주는 상냥하게 웃으며 브라이언의 뺨에··· 콜라 캔을 내밀었다.
“쭉 들이키세요.”
뺨에 닿는 서늘한 감촉에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브라이언은 희주가 건넨 콜라 캔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받아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희주에게 낮게 속삭였다.
“야, 근데 숙취에 탄산은 안 좋은 거 아니냐?”
“글쎄? 나야 모르지. 술 안 마시니까. 그치만 꿀물도 마시니까 콜라도 괜찮은 거 아니야? 둘 다 일종의 설탕물인 거잖아?”
이쯤 되면 콜라가 마치 최고급 숙취 해소 음료라도 되는 것처럼 경건한 자세로 들이키는 브라이언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진다.
잠시 후, 정신을 수습한 브라이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그럼 파커 감독은? 오늘 아침 미팅이었지? 어떻게 하기로 했어?”
“착해졌어요.”
“경질했어.”
희주와 내 대답을 차례로 듣고 난 브라이언이, 테이블 위에 마시다 만 콜라 캔을 내려놓았다.
“왜 그래?”
“아니, 탄산이 좀 과한 거 같아서.”
브라이언의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마치 웃음을 참으려 애쓰는 것처럼. 사실 브라이언이 전임 감독에게 받은 대접을 생각하면, 이 정도면 퍽 점잖은 반응이다.
나 같으면 최소한 어퍼컷 세레머니 정도는 했을 텐데.
“그래서 말인데, 추천할만한 감독을 좀 골라 줬으면 하는데.”
“브로, 아니 구단주님, 저한테 하신 말씀입니까?”
“그럼 희주한테 그랬겠냐? 쟤는 축구 몰라.”
브라이언은 황당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세상에 어느 구단이 전력분석관더러 감독 뽑으라고 하냐? 이거 완전 개족보네.”
“결정은 내가 할 거야. 면접도 내가 볼 거고. 그냥 후보만 좀 추려줘.”
내 설명에 납득한 것처럼 브라이언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하긴, 브로가 직접 움직이긴 좀 그렇겠지. 축구판에서 오래 떠나 있었으니까. 알았어. 내가 찾아볼게. 그래서 말인데, 대충 예산은 어느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리그 최고 대우. 실제로는 경력과 실력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일단 쓸 수 있는 상한선은 그 정도라고 생각해 줘.”
“라일 파커하고 비슷한 급은 전부 찔러볼 수 있겠네.”
만족스러워하는 브라이언을 향해, 친절하게 부연했다.
“아니, 파커가 받던 건 리그 원 최고 수준이었고. 우리는 리그 최고 수준.”
“어 그러니까··· 브로 이야기는.”
숨을 삼키는 브라이언을 향해,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클롭이나 과르디올라, 시메오네가 오더라도 일단 연봉은 맞춰줄 수 있어. 뭐, 그런 감독은 절대 돈만 보고 움직이진 않겠지만.”
설명을 들은 브라이언의 표정이 극적으로 변했다. 환희, 그리고 좌절이 빠르게 교차했다.
“브로, 구단주의 적극적인 의지 표명은 스태프로서 매우 고맙지만··· 우리 팀 재정, 생각보다 훨씬 엉망이야.”
“괜찮아. 나 돈 많으니까.”
“아니 그야 돈이 많기야 하겠지. 구단을 샀을 정도니까. 그래도 실제로 구단을 운영하다 보면 이래저래 돈이 엄청나게···.”
옆에서 희주가 끼어들었다.
“저기, 브라이언 씨. 우리 오빠 이름이 뭐죠?”
“썬.”
“별명 말고 본명은요?”
“희성 리.”
“와! 발음 좋네요. 영국인은 발음하기 힘들 텐데··· 오빠랑 진짜 엄청나게 친한 사이 맞나봐요. 아무튼, 그 이름에서 혹시 떠오르는 거 없어요?”
브라이언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눈을 몇 번 깜빡거리고, 입을 몇 번 뻐끔거리는 데 시간을 소모했기 때문이다.
“어··· 한국에 있다는 투자의 신이 비슷한 이름을 쓰는 것 같은데요.”
“비슷한 게 아니고, 똑같은 이름! 참고로 동명이인 아니에요. 그러니까, 앞으로 선덜랜드는 돈 걱정과는 거리가 먼 팀이 되었다는 뜻이죠.”
희주의 설명에 브라이언의 얼굴이 극적으로 변했다. 나라 찾은 표정이다.
현실감이 없는지, 자기 손등을 쓰다듬는 브라이언을 향해 희주가 상냥하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뺨 때려드릴까요?”
브라이언이 멍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뇨. 꿈이라면 깨지 않고 싶은데요.”
***
물론 현실은 꿈이 아니었고, 브라이언이 기쁨을 만끽할 여유는 그리 길지 않았다.
감독의 선임은 그 자체만으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여운에서 깨어난 브라이언이 눈을 빛냈다.
“감독 후보 추천은 내 마음대로 하면 돼?”
“두 가지 조건만 지켜 주면.”
“조건?”
나는 잠시 턱을 쓰다듬은 다음 덧붙였다.
“우선은 나이.”
“아, 그렇지! 나이, 나이 중요하지. 요즘 축구판 트렌드를 따라가려면 젊고 참신한 감독이어야 하겠지.”
“아니. 노장이 좋겠는데.”
노장이 좋다는 내 코멘트에, 브라이언의 표정이 뭐 씹은 것처럼 바뀌었다.
“브로, 그런 분들은 아무래도 좀 꼰··· 흠흠, 요즘 전술 트렌드에 안 맞는 경우가 많던데.”
“상관없어. 전술은 네가 도와주면 해결될 문제거든.”
“나를 높게 평가해주는 건 고마운데··· 굳이 그런 리스크를 감수할 필요가 있을까? 처음부터 전술적 역량 확실한 감독 뽑는 게 낫고, 그러려면 젊은 감독이 유리하잖아.”
“대신 노장 감독들에겐 확실한 장점이 있지. 전술적 유연함은 상대적으로 떨어지지만, 대신 리더십이나 카리스마, 기강 관리 같은 부분은 훨씬 낫거든.”
삼백억 원짜리 가치를 가진 전술가, 브라이언을 가진 우리로서는 감독의 전술적 역량보다는 선수단 관리 능력을 훨씬 중요하게 평가하는 게 당연하다.
“알았어, 브로. 나이는 지긋한 분으로 고르고··· 두 번째 조건은?”
“수비적이고 단단한 역습 축구. 그런 축구를 하는 감독이 좋겠는데.”
“브로, 2년 연속으로 승격 실패한 마당에 이렇게 말하긴 좀 그렇지만, 우리는 빅클럽이야. 역습 축구는 우리가 아니라 상대 팀이 하는 거야. 우리 만나면 다들 바로 꼬리 내리고 라인 낮춘다고.”
“리그 원에서야 그렇겠지. 그런데 챔피언십이라면, 혹은··· 프리미어리그라면? 거기서도 우리가 빅클럽일까?”
브라이언은 한 방 맞은 듯한 표정이 되었다.
“우리는 언젠가 수비 축구를 선택해야 해. 그러니까 지금 바꾸려는 거야. 올해는 팀의 체질을 바꾸는 혼란을 감수할 여유가 있지만, 내년부턴 그럴 여유가 없을 거야.”
브라이언이 천천히 침을 삼켰다.
“그러니까 브로, 지금··· 프리미어리그까지 최단기간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 맞지?”
“맞아. 그 정도는 해야지. 지난 4년간, 이 팀이 잃어버린 게 너무 크니까.”
2년 연속 강등과 2년 연속 승격 실패를 겪으며, 선덜랜드의 위상은 그야말로 땅에 떨어졌다.
이제는 갑부 구단주가 나타나 돈을 산더미처럼 쌓아도 특급 명장을 데려올 수 없는, 흔한 3부리그 팀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클래스는 돈으로 살 수 없으니까.
팀의 클래스를 살 수 있는 수단은 오직 성적뿐이다.
브라이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좋아. 그럼 당장 움직일게.”
나는 당장에라도 뛰쳐나갈 듯한 브라이언을 제지했다.
“지금 그 꼴로 사람 만나러 다니겠다는 건 아니겠지?”
엉망으로 뻗친 머리나 비뚤어진 나비넥타이, 흐트러진 바텐더 유니폼. 아무리 봐도 사람 만나러 다니기엔 부적합한 복장이다.
브라이언이 가슴을 탕탕 두들겼다.
“브로, 내가 바본 줄 알아? 당연히 저녁때 움직일 건데.”
“그럼 지금은 어디 가는데.”
“당연히 바 정리하러 가는 거지. 어제 치우는 걸 깜빡했거든.”
“아, 오늘부터 그건 신경 쓰지 마··· 구단 직원들 전부 복직시킬 거니까.”
“아, 그러면 내가 연락 돌릴···.”
“그것도 신경 쓰지 마.”
너한테 축구 말고 다른 일을 시키면 여러모로 손해라는 게 확실해졌거든.
브라이언은 삼백억 원의 가치가 있는 코칭 스태프다. 따라서 브라이언에게 각종 잡무를 시키는 것만으로도 손해가 큰데, 하물며 브라이언은 축구 이외의 다른 일에는 요령도 별로 없다.
다행히 일상적인 사무 업무를 능숙하게 처리해 줄, 요령 좋은 녀석은 따로 있다.
“고액 용돈 수령자님.”
“왜 그러세요, 갑부 오라버님.”
내 표현이 재미있다는 듯, 희주가 배시시 웃으며 장단을 맞췄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단기 알바 좀 어떠세요.”
“보직은?”
“구단주 비서.”
“으으, 여기 일 엄청 빡셀 것 같은데.”
보란 듯이 얼굴을 구기며 끙끙거리던 희주가, 잠시 후 혀를 낼름 내밀었다.
“에르메스도 하나 얹어 줘, 콜?”
“무슨 소리야. 당연히 월급 줘야지.”
“오라버님, 저는 이미 고액 용돈 수령자입니다만? 어지간한 알바비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답니다.”
이상하네, 샤넬 백에는 잘 넘어오던데.
“이 기회에 알아두시죠. 여동생은 돈으로 살 수 없답니다. 그동안은 그저 약간의 선물을 명분 삼아 오라버님을 도와드렸을 뿐···.”
“참고로 정확히 네 용돈과 동일한 액수를 월급으로 지급할 생각인데.”
“오늘부터 일하면 돼?”
오늘의 교훈, 여동생의 노동력은 돈으로 살 수 있다.
희주는 정확히 3분 만에 노예계약··· 아니 근로계약서까지 준비해서 서명을 마쳤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브라이언이 눈을 껌뻑거렸다.
“어? 그럼 나는?”
“나가서 감독이나 찾아오세요, 유능한 전력분석관님.”
그 전에 바텐더 유니폼은 꼭 반납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