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처음이자 마지막 퍼즐 (1)
<경기의 99%는 선수가 만들고, 1%는 감독이 만든다. 감독이 없으면 100%가 될 수 없다 - 알렉스 퍼거슨>
고액 용돈 수령자에서 고액 알바비 수령자로 전직한 희주는, 업무 첫날부터 그 수완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경비팀 오늘부터 전원 복직처리 완료, 브라이언 씨는 이제 숙직 안 서도 돼요.”
“오오!”
“구내식당 운영팀은 내일부터 돌아오기로 했지만, 첫날은 운영 준비에 시간이 필요하겠죠. 중식대 드릴 테니까, 다들 내일 식사는 알아서 처리해주세요.”
“그 말씀은?”
“구내식당이 목요일부터 정상 운영된다는 거죠.”
“목요일부턴 냉동 피시 앤 칩스와 작별할 수 있다는 뜻이군요! 감사합니다!”
기뻐하는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희주가 키득거렸다.
“오늘 저녁부터 바로 작별하셔도 될 거예요. 블랙캣츠가 정상 영업을 시작하거든요.”
“레이디, 거긴 원래 정상 영업이었는데요.”
아니, 정상은 아니었어. 일단 농약 맛 칵테일은 절대로 정상적인 메뉴가 아니야.
“주로 안줏거리긴 하지만, 그래도 간단한 요기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최소한 냉동 피시 앤 칩스보단 다섯 배쯤 나을 거에요. 아, 그리고 레스토랑은 다음 주 수요일부터 재오픈이니 참고해주세요.”
“브로, 도대체 네 여동생 정체가 뭐야? 엄청나게 유능하잖아!”
일단은 고액 용돈 수령자, 오빠 등골 브레이커였는데.
“그리고 신문사에서 몇 군데에서 연락이 왔어. 구단주 인터뷰를 하고 싶다던데··· 언제로 잡을까?”
나는 대답 대신 턱을 쓸었고, 잠시 후 희주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안 내켜?”
“조금.”
“새삼스럽네. 인터뷰 처음 하는 것도 아니면서.”
희주 말대로, 인터뷰 경험 정도는 차고 넘친다. 유소년 시절에도 몇 번쯤 했었고, 투자자로 성공한 다음에는 그야말로 인터뷰 요청이 쇄도했다.
그래도, 이번에는 조금 조심스럽다. 왜냐면···.
“아, 하긴. 괜히 꼬투리 잡히면 곤란하겠구나. 오빤 이제 구단주니까.”
투자자 이희성일 때는 언론에 대해서 전혀 신경 쓰지 않았었다. 언론에서 뭐라고 떠들든, 투자자로서의 업무에 지장이 생기지는 않으니까.
그러니 마음 내키는 대로 인터뷰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당시에도 고의로 내 발언을 왜곡해서 어그로를 끌려는 기레기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음, 아무튼 이제는 없다. 희주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부 착해졌다. 죄다 고소미 먹였거든.
하지만 지금의 나는 구단주, 언론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직업을 갖게 되었다. 고소미도 함부로 못 먹이겠지.
그러니 언론 대응은, 홍보팀을 뽑아서 맡기는 게 좋겠다.
“그래도 오빠, 내 경험상 이대로 내버려 두면 오히려 위험할 수도 있다?”
“네가 무슨 인터뷰 경험이 있다고 그래.”
“그야 CTS 코어 팬이니까.”
요즘은 코어 팬도 인터뷰를 해 주던가?
“아이돌 팬질을 하다보면 그렇거든. 멤버 누구랑 누가 불화라더라. 누가 혼자 중국 갔다더라. 어찌보면 참 별거 아닌 루머인데, 소속사가 침묵하면 그때부턴 일이 커지더라고.”
이 정도면 사서 걱정이다. 피식, 헛웃음이 나온다.
“뭐, 아무렴 내가 연예인도 아닌데 그렇게까지야 하겠냐. 조만간 홍보팀 뽑아서 정식으로 기사 보내겠다 그래.”
“알았어. 그럼 인터뷰는 거절할게.”
“홍보팀 채용 공고도 부탁하자.”
“오케이.”
보고를 마친 희주는 콜라를 홀짝거리며 자리로 돌아갔고, 다음은 브라이언의 차례였다.
“어, 브로. 감독 쪽 말이지만··· 영 신통찮은데.”
감독 이야기를 꺼내는 브라이언의 어깨가 평소보다 축 처졌다. 아무래도 첫날부터 업무를 팍팍 처리해버린 희주와 자신의 성과를 비교하는 거겠지.
“괜찮아. 오히려 하루 만에 감독 후보를 데려오면 그게 더 이상한 거야. 우리 전 감독은 라일 파커였잖아.”
“하긴, 그 사람 네임밸류는 리그 원에선 탑클래스지. 덕분에 잔챙이들 연락은 안 와서 좋더라.”
파커가 하루만에 잘릴 정도면, 당연히 파커보다 급 떨어지는 감독을 써줄 리가 없다는 정도는 눈치가 있으면 다 알겠지.
즉, 파커는 충실한 거름망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뜻이다. 그 인간에게 고마워할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그것도 겨우 하루 만에.
그런 것치고는 브라이언의 손에 들린 서류가 꽤 많아 보이는 게 신경 쓰이지만, 차차 살펴보면 되겠지.
시선을 눈치챈 브라이언이 멋쩍게 웃었다.
“아, 브로. 이건 사표야.”
“사표!?”
“참고로 내 건 아니니까 그런 표정 하지 말고.”
깜짝 놀랐네.
“꽤 많아 보이는데? 전임 구단주가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 못하게 빡세게 정리해고한 거 아니었어?”
그래서 브라이언 혼자 독박 쓰던 게 바로 어제까지의 일이었고, 희주가 구단 직원들을 복직시킨 게 오늘 일이다.
도대체 이 사표 뭉치가 어디서 이렇게 잔뜩 튀어나온 건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그야 코치들이지 뭐. 축구판 코치들은 대부분 감독 따라 움직이거든. 그래서 디에고 사단이니 콜린 사단이니 하는 거 아니겠어, 브로?”
“그래서 몇 명이 그만두는데?”
브라이언은 대답 대신 애매한 미소를 지었고, 나는 질문을 고쳤다.
“··· 몇 명이나 남는데?”
마찬가지로 애매한 미소가 돌아온다. 이런 빌어먹을. 슬슬 코치진 중 파커 사단이 차지하던 비중이 짐작이 간다.
“설마 너 혼자냐?”
고개를 끄덕거리는 브라이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차분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머리카락 말고, 코치를 뽑아. 오빠.”
옆에서 희주의 목소리가 무심하게 울렸다.
하긴, 코치진을 물갈이하기엔 오히려 좋은 타이밍일 수도 있다. 지금은 시즌오프 직후고, 선수들은 전부 휴가를 떠났다.
긍정적으로 생각해야지. 긍정적으로.
축축 처지는 분위기를 끌어올리려는지, 희주가 의식적으로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코치는 제가 알아볼까요? 아니면 브라이언 씨가?”
“놔둬. 감독 오면 뽑을 거야.”
“괜찮겠어. 오빠? 코치가 한두 명이 아닌데? 감독 구하는 것도 오래 걸리잖아?”
브라이언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습니다. 팀의 코치들은 어차피 감독의 보조 역할이거든요. 게다가, 새 감독이 자기 코칭스태프를 데려올 수도 있고요.”
“아, 하긴. 기존 코치들이 파커 사단이었던 것처럼요? 그럼 걱정 없겠네. 새 감독이 전부 데려올 테니까.”
“안 데려올 수도 있고. 사실 아닐 가능성이 더 높아.”
“시즌오프 직후에 소속팀이 없는 감독, 그것도 노장이라면··· 아마 집에서 쉰 지 오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딸린 스태프는 별로 없겠죠.”
나와 브라이언의 설명을 들은 희주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그럼 코치라도 미리 뽑아 두면···.”
“말했다시피, 코칭스태프는 결국 감독을 도와주는 보직이야. 그러니 감독 입맛에 맞춰야지.”
“일단 감독부터 뽑아야 뭐라도 할 수 있다는 뜻이네요.”
그래서 라일 파커를 곧바로 잘라버린 거다. 최대한 빨리 다음 감독을 찾아 나서기 위해서.
“아무나 빨리 데려와야겠네. 브라이언 씨, 힘내요.”
“아무나 데려올 순 없죠. 적어도 라일 파커보다는 좋은 감독을 찾아야 합니다. 안 그러면 감독을 바꾼 보람이 없으니까요.”
사실 누굴 데려와도 라일 파커보다는 낫다고 생각한다. 그 인간은 고의로 승격을 회피한 감독이니까.
물론 라일 파커보다 좀 나은 정도로 만족할 수는 없다. 내 단기 목표는 2년 연속 승격, 최단기간 프리미어리그 복귀다.
능력 있는 감독, 태업 안 할 감독, 최소한 팀을 프리미어리그까지는 문제없이 데려다줄 감독··· 그런 감독을 뽑아야 한다.
잘, 신중하게, 잘 골라야겠지.
실제로 브라이언은 신중하게 감독 후보를 물색했고, 나름의 기준에 따라 리스트를 정리했으며, 꼼꼼하게 프로필을 살폈다.
때로는 옛날 경기 영상을 구해서 돌려 보기도 했다.
나도 거들었다. 현재로서는 감독 선임 이상으로 중요한 업무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딱히 소득은 없었다.
영상 속의 감독 중 딱히 명장이라 할 만한 인물은 보이지 않았다. 이마에 붙은 가격표는 대부분 십억 원 남짓이었고, 많아 봐야 이 삼십억 원 수준이었다.
물론 리그 원에서는 이 정도 감독도 나쁘지는 않지만, 그래도 라일 파커에 비하면 턱도 없다.
그렇게 며칠의 시간이 지나갔다.
“전술이 영 구리네. 압박도 느슨하고··· 이 감독은 좀 아닌데? 비추야, 브로.”
“그러게. 별로네.”
사실 처음부터 별 기대도 안 하긴 했다. 프로필 사진을 본 순간 몸값이 선명하게 잘 보였으니까.
지금 보여주는 감독의 몸값은 약 십억 원.
3부 리그에서는 무난하겠지만, 우리 팀에 데려오고 싶은 감독감은 아니었다.
나는 조용히 프로필 서류를 옆으로 치웠고 브라이언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동영상을 넘겼다.
“그럼 다음 사람은···.”
다음 프로필을 집어 든 순간, 그만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력서가 워낙에 개판이었기 때문이다.
이름 대신 닉네임이고, 사진 자리엔 축구공 박아놨고, 연락처라고는 SNS 아이디 하나 던져놨고.
원래대로라면 서류전형 광탈, 입구컷당했어야 마땅한 꼬라지다.
그런데도 이따위 프로필이 내 눈앞까지 올라왔다는 건, 그래도 직접 살펴볼 가치가 있다는 뜻이겠지.
혹은, 감독 후보가 씨가 말랐거나.
구겨지는 내 표정을 흘끔거리던 브라이언이 기묘한 표정을 지으며 덧붙였다.
“아, 혹시라도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하는데. 그거, 나 아니다?”
안 그래도 물어보려고 했다. 닉네임이 “반짝반짝 SQ”였거든.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닉네임을 쓸 인간이 흔하지는 않을 텐데.
아무튼 읽어보라니 읽어는 봐야지.
경력 사항에 제일 먼저 눈이 갔다. 음, 선덜랜드 팬질 24년. 고맙긴 한데, 지금 혹시 나랑 장난하나?
그리고 이건 또 뭐야, SM 누적 플레이 7천 시간? 아니, 이력서에 이걸 왜 적어? 혹시 변태세요?
실시간으로 썩어들어가는 내 표정을 즐겁게 관찰하던 브라이언이 짧게 덧붙였다.
“사커 매니저라고, 축구 게임일 거야.”
그래, 차라리 게임이 낫지.
남다른 성적 취향은 당연히 존중해줄 수 있지만, 그걸 이력서에 쓰는 취향까지는 참아주기 힘들거든.
물론 게임 플레이 시간을 이력서에 쓰는 정신머리도 좀, 그렇긴 하다.
한숨을 내쉬며 페이지를 넘겼다.
잠시 후,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 크리그의 npShot / npxG 을 고려할 때, 그는 리그 내에서 가장 순도 높은 공격수.
- 슈팅 횟수를 늘려줄 수 있도록 전술적 배려를 해주면 자연히 득점력이 올라갈 것.
나와 브라이언은 이미 짐작하고 있던 내용이긴 하다. 크리그는 쓰기 나름에 따라 훨씬 활약할 수 있는 선수이며, 라일 파커는 크리그를 잘못 썼다고.
그래도 이렇게 통계가 덧붙으니 훨씬 일목요연하다.
닉네임 “반짝반짝 SQ” 는 그 외에도 나름대로의 분석을 잔뜩 써보냈다. 이 정도면 차라리 거의 논문이다.
아니, 이런 인재가 왜 가명을 쓰고 그래.
나는 잠시 프로필 첫 페이지에 붙은 축구공을 노려보았다. 음, 역시 얼굴이 아니니 몸값은 안 보이네.
브라이언이 실실 웃었다.
“솔직히 다 맞는 이야기라고는 말 못 하겠어. 축구에는 아직 통계에 안 잡히는 플레이도 엄청 많으니까. 그래도 이 정도면 축구 잘 아는 친구 같더라고.”
“그래도 감독감은 아니겠지.”
실명과 얼굴을 오픈하지 못하는 모습도 그렇고, 선덜랜드 팬질이나 사커 매니저 7천 시간 같은 걸 경력이라고 써둔 걸 보면 축구 관계자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코칭 라이센스도 없겠지. 따라서 감독으로는 절대 쓸 수 없는 그런 타입의 인재다.
다만, 다른 쪽으로는 쓸모가 있을 것 같긴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전력분석관, 지금 브라이언이 맡고 있는 포지션이다.
브라이언을 코치로 승격시켜 신임 감독의 보좌를 맡기고, 반짝반짝 SQ가 브라이언을 돕는 그림도 괜찮을 것 같다.
반짝반짝 SQ의 이력서를 한쪽에 따로 잘 빼 뒀다.
그러자, 다음 프로필이 모습을 드러냈다.
핀 헤이즈, 어쩐지 들어본 적 있는 이름. 그리고 한 번쯤 본 기억이 나는 얼굴.
네임밸류 있는 감독이라는 뜻이겠지.
하지만, 가장 인상적인 건 그의 이마에 선명하게 드러난 숫자, 55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