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처음이자 마지막 퍼즐 (2)
“사실 경력만 보면 핀 헤이즈가 제일 괜찮지.”
“그러게, 괜찮네.”
첫 감독 생활은 첼시 유스에서 시작했고, 이후에는 스코틀랜드 1부의 킬마녹 감독을 맡았다.
영국에서도 감독 생활을 제법 했다. 울브스, 노리치··· 프리미어리그와 챔피언십 사이를 오가는 팀을 맡았다.
커리어만 봐서는 딱 내가 원하는 감독이다.
“나이도 꽤 지긋하니까, 브로가 원하는 노련한 노장 감독이야.”
“그렇겠네.”
이 정도 경력과 연차면, 그의 현재 능력은 자신의 포텐에 거의 근접했을 것이다.
오십오억 원의 가치가 있는 감독.
비록 라일 파커에게는 못 미치지만, 이 정도 감독이면 리그 원에서는 어차피 거의 무적이나 마찬가지고, 챔피언십에서도 충분히 통한다.
파커가 위로 더 올라갈 생각도, 맡고 있는 팀도 없다는 걸 고려하면··· 현재로선 핀 헤이즈가 리그 원 최고 매물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남은 건 스타일인데···.
“경기 운영 스타일은 어때?”
보통 노장들일수록 신중한 축구를 한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실제 축구판은 꼭 그렇지도 않다.
지금은 은퇴한 모 교수님은 예술적인 패싱 축구 좋아하시는 분이었고, 지금의 리즈 감독은 아예 미치광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의 공격적인 축구를 즐긴다.
나이가 예순다섯인데도!
지금의 선덜랜드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단단한 축구, 수비 축구를 팀의 플랜 A로 삼아야 한다.
핀 헤이즈가 그럴 수 있는 감독이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데려올 것이다.
“내 눈엔 괜찮더라. 이건 브로가 직접 영상 보면서 판단해야겠지.”
브라이언은 그렇게 말하며 스크린에 영상을 띄웠다.
잠시 후,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냐면···.
“야, 저거 나잖아!?”
정확히 말하자면, 유소년 선수 시절의 나다. 13년 전의 내가 선덜랜드 유스팀 유니폼을 입고 있다.
넘버 9, Lee.
“말했잖아. 핀 헤이즈는 첼시 유스팀 감독이었다고. 그리고 저 경기는 알다시피 브로가 피터 톰슨을 엿먹인 바로 그 경기지.”
“그래서 저걸 왜 틀어. 네가 우리 부모님이냐?”
설마 브라이언 이놈, 아이들 학예회 영상 틀어놓는 부모 같은 감상에 눈을 뜬 건가.
살짝 의심의 눈길을 보내자, 청산유수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전술적으로 얼마나 단단한지를 보려면, 진 경기를 보는 게 낫지. 그런데 내가 구할 수 있는 영상 중에서, 핀 헤이즈가 가장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경기가 저거야.”
“일리는 있는데, 그걸 꼭 지금 너랑 같이 봐야 하냐?”
그러자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 사실 나도 더럽게 쪽팔리긴 해. 브로.”
앳된 모습의 소년 이희성과 소년 브라이언이 빨빨거리며 뛰어다니는 영상을, 서른 살 이희성과 브라이언이 나란히 앉아서 감상하려니 참··· 낯간지럽다.
한편으로는 묘한 기분도 든다.
음, 확실히 저땐 나도 엄청 잘 뛰었구나. 무릎이 망가지기 전이었으니까.
옆에서 브라이언도 고개를 끄덕거린다. 저땐 자기도 엄청 풍성했다며.
아무튼, 이것도 일이니까 일단 경기에 집중해야겠지.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브라이언이 왜 이 영상을 골랐는지 이해하게 되었다.
“다시 보니 새삼 엄청 단단하네.”
당시에도 마치 벽을 두들기는 것 같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이렇게 영상으로 보니 정말, 정말로 단단하다.
저 시절의 첼시는 그야말로 강철이었다. 푸른색의 강철.
성인팀은 물론, 유소년팀도 마찬가지다.
만일 그날, 우리가 피터 톰슨의 사소한 버릇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저 철벽을 부수지는 못했을 것이다.
“브로, 사실 유소년 경기는 멀티골이 잘 나온다는 인상이잖아.”
“그렇지. 아무래도 피차 압박이 느슨하고, 성인 경기처럼 조직적이지도 않을 시기니까.”
“유소년 데리고 저 정도면 통곡의 벽이야.”
맞는 말이다.
하지만, 자꾸만 다른 쪽에 눈이 가는 건 역시 내가 그날 붉은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일까.
“다시 보니 우리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구나.”
아무리 같은 프리미어리그 팀이라고는 해도, 당시의 선덜랜드는 첼시보다 명백히 떨어지는 팀이었다.
쓸 수 있는 자금력도, 팀의 위상도 엄청나게 다르다.
그러니 데려올 수 있는 유소년의 질도 달랐을 거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내 눈엔 오히려 13년 전 선덜랜드 유스가 훨씬 단단해 보인다.
브라이언도 그런 내 평가에 동의했다.
“그러게. 새삼 생각해보면 우리 교관님도 참 좋은 감독이셨지.”
조니 로저스. 13년 전 선덜랜드 유스팀의 감독. 당시 우리는 로저스 감독을 교관님이라고 불렀다.
그만큼 엄격하게 기강을 잡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늘 모자를 쓰고 다니는 모습 때문이기도 했다.
로저스 감독은 늘 캡모자를 쓰고 다녔다. 패셔너블한 캡모자가 아니라, 꼭 군대 교관들이 쓸 것처럼 생긴 투박한 빨간 모자를.
슬슬 벗겨지려는 머리를 감추려는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로저스 감독의 머리에는 언제나 모자가 얹혀 있었다.
적어도 나는 로저스 감독이 모자를 벗은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오늘까지는.
“브라이언? 잠깐 화면 멈춰 봐.”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직후, 2-0으로 경기를 완벽하게 틀어막은 옛 스승이 잠깐 모자를 벗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핀 헤이즈와 악수하기 위해서다.
“브로, 갑자기 왜 그래? 교관님 모자 벗은 게 그렇게 궁금했어?”
“궁금하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거든.”
“하긴. 사실 나도 좀 궁금해. 교관님은 정말로 대머리였을지. 대머리 맞으면 헨도에게 5파운드 받기로 했었거든.”
“비싸네.”
“참 나, 있는 놈들이 더하다더니. 브로, 지금 5파운드가 비싸다고···.”
“그게 아니라.”
나는 옛 은사, 조니 로저스 감독의 이마를 바라보았다.
벌써 13년 전이나 과거에 찍은 영상이고, 팀 관계자가 찍은 거라 썩 좋은 화질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래도 숫자를 알아볼 정도는 된다.
에누리 없이 100.
핀 헤이즈의 두 배에 달하는 몸값, 지금까지 후보로 거론된 누구보다 파격적인 금액이 눈에 들어왔다.
“결정했어. 우리 팀 감독.”
“역시 핀 헤이즈가 제일 낫지?”
“아니. 교관님으로.”
브라이언의 얼굴이 기묘하게 변했다.
“브로, 옛 스승을 잊지 않고 모셔오려는 자네의 의리에는 깊은 찬사를 표하고 싶네만, 나로서는 한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군.”
연극 조로 말하는 브라이언에게, 계속 말해보라는 시선을 던졌다.
“교관님 진작에 은퇴하셨어. 13년 전에.”
“복귀하시면 되지.”
물론 나도, 현역에서 물러난 과거의 명장들이 오랜만에 복귀하면 어떻게 되는지는 안다.
한때 리그 우승컵과 유로피언 컵을 들어올렸던 명장, 안필드의 왕조차 20년간의 공백기를 버텨내지는 못했다.
낡은 축구를 한다고 비판받으며, 전술적 약점을 사정없이 후벼 파였고, 급기야 1시즌 만에 경질당하는 대참사를 겪었다.
그게 요즘 축구판이다.
각종 분석 설비가 등장하고, 인터넷만 뒤져도 스탯이 돌아다니는 마당이니 변화가 빠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교관님, 로저스 감독의 경우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공백기가 갉아먹는 건 감독의 전술적 역량이다. 그런데 우리 팀에는 그 부분을 메워줄 스태프, 브라이언이 있다.
그리고 로저스 감독의 선수단 장악력, 카리스마는 이미 검증이 끝났다. 몸으로 직접 겪어봤으니까.
브라이언을 성장 시켜 줄 감독이라는 명제에도 부합한다. 교관님은 우리의 옛 은사, 스승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모든 면에서 선덜랜드에 가장 적합한 감독감이다.
유일한 걸림돌이라면 커리어인데···.
로저스 감독은 13년 전에 은퇴했고, 최종 커리어를 유스팀 감독으로 마감했다. 프로 선수들을 통솔하기에는, 무게감이 조금 떨어지는 이력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본 결과, 마찬가지로 문제는 없다는 결론을 얻었다.
1부 리그의 유스 팀 감독은, 아무리 생각해도 3부 리그 감독보다 딱히 급 떨어지는 자리가 아니거든.
그렇기에 브라이언이 지적한 문제점은, 그야말로 사소한 문제일 게 분명하다.
그래야만 했는데···.
“그게 말이지, 인사라도 드릴까 해서 몇 번 찾아뵈려고 했거든. 그런데 통 연락이 안 닿아.”
어, 그건 좀 심각한 문제네.
***
브라이언은 예전의 유스팀 동료들 위주로 연락을 돌려, 조니 로저스 감독과 연락이 닿는지를 수소문하고 다녔지만, 뾰족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브라이언과 헨도 말고는 친한 녀석이 없었지. 뭐, 당시의 나는 일종의 외국인 용병 선수였으니까.
그런 내가, 로저스 감독을 찾아낼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저기, 고액 알바비 수령자님.”
“네, 갑부 오라버님.”
“사람 한 명 찾아줬으면 좋겠는데.”
그러자 희주의 눈이 가늘어졌다.
“지금 나보고 탐정 노릇 하라는 거야? 음, 하긴. 모처럼 추리물의 본고장에 왔으니까, 미녀 탐정도 나쁘진 않겠네.”
“무슨 탐정이라고?”
“사람 찾기 싫어진 거 아니면 조용히 하세요? 오라버님.”
에라이, 마녀 탐정아.
내가 침묵하는 사이, 희주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쇼핑몰 홈페이지를 열었고, 신상 레인 코트와 체크무늬 모자를 재빨리 장바구니에 담았다.
사냥에 나선 고양이처럼 날렵한 솜씨다.
뭐, 이 정도는 필요경비라고 생각할 수 있다. 신상 코트라고 해 봤자, 딱히 비싸지도 않으니까.
“그래서 누굴 찾으면 돼?”
“조니 로저스. 예전 선덜랜드 유스팀 감독인데.”
레인 코트와 모자를 곧바로 결제하려던 희주의 손길이 뚝, 멈췄다.
“그 사람, 오빠 예전 선수 시절 감독하던 사람이지?”
“맞아.”
“그럼 자신 없는데.”
희주는 단호한 손길로 장바구니에서 코트와 모자를 삭제했다. 희주가 평소 신상 코트나 가방 따위에 보이는 집착을 고려하면, 정말로 못 하겠다는 뜻이다.
“오빠는 그렇다 쳐도, 계속 영국에서 축구 했던 브라이언 씨하고는 연락이 닿아야 정상이잖아? 그런데도 굳이 나한테 찾아보라고 하는 건, 지금 연락 두절이라는 뜻이지?”
“그 정도면 탐정 모자는 사도 되겠네.”
“··· 됐어. 모자만 써서 뭐 하게.”
약간의 침묵. 신상 코트에 대한 미련까지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는지 희주의 목소리는 보기 드물게 시무룩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왜 찾아?”
“우리 팀 감독으로 데려올까 싶어서.”
그러자, 희주의 표정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오빠, 미쳤어!?”
음, 정신과 의사라면 다른 견해를 내세울 것 같다. 이 구역의 미친년은 바로 희주 너라고.
아니면 이건가? 여동생의 폭력성을 실험해보기 위해 신상 코트를 장바구니에서 빼 보겠습니다.
“오빠 무릎을 망가뜨린 사람이잖아. 그런 사람을 데려와서, 뭐? 감독으로 쓰겠다고?”
둘 다 아니었구나.
나는 물끄러미 희주를 바라보았다.
고양이 같던 눈망울엔 어느새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고, 꾹 깨문 입술에는 핏기가 가셨다. 어찌나 힘을 줬는지, 신상 립스틱으로도 가리기 힘들 만큼.
나 원, 이래서는 화도 못 내겠다.
“내 무릎, 감독님이 망가뜨린 거 아니야.”
“그러면?”
“내 선택이었지.”
혹은, 내 발버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