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처음이자 마지막 퍼즐 (3)
“감독은, 선수들의 인생을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다. 경기의 승패를 책임지는 자리지.”
교관님은 늘,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다.
사이드라인 안쪽에 들어갈 수 있는 건 한 팀에 딱 열한 명, 선수들뿐이라고. 일단 킥오프하고 나면 감독은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고.
그렇다고 교관님이 딱히 방임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몰래 콜라 마신 놈, 누군지는 묻지 않겠다. 어떤 놈인지 관심도 없고. 그냥 조용히 일어나서, 처먹은 칼로리만큼만 뛰고 와라.”
정말로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날, 교관님의 시선은 정확하게 한 점을 노려보는 중이었기 때문이다.
헨도 쪽이었다.
싸늘한 시선을 견디다 못한 헨도는 비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달리러 나가지는 않았다. 대신 녀석은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바르샤에 미친놈이 하나 있다던데요. 레오 뭐시긴가.”
“그런데?”
“영상 봤는데 진짜 미치긴 미쳤어요. 근데 걔가 그렇게 콜라를 좋아한다고··· 네, 닥치고 뛰고 올게요.”
현명한 선택이었다. 헨도를 노려보던 교관님의 시선이 거의 9할쯤 킬러처럼 변했다는 건, 1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억에 생생하니까.
헨도를 그라운드로 쫓아낸 교관님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썬, 너는 왜 일어나냐?”
“저도 마셨습니다.”
물론 거짓말이었다. 요즘도 탄산음료는 잘 안 먹지만, 당시의 나는 정말로 단 걸 피했었고, 가끔 콜라를 마실 때는 반드시 제로 콜라를 골랐다.
그저, 당시의 나는 초조했을 뿐이었다.
육백억 원짜리 재능을 가진 헨도가 그라운드를 뛰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헨도에게 훨씬 못 미치는 나는 당연히 뛰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는 그만 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쉬는 것도 프로의 일이거든.”
“전 아직 프로가 되지 못했습니다.”
솔직히 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요, 라는 말을 입속으로 삼켜버린 다음, 나는 재빨리 덧붙였다.
“하지만, 지금 뛰지 않으면 확실히 프로가 되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언젠가 오늘 일을 후회할 거라는 것도 압니다.”
“하긴, 네 인생이지.”
교관님은 쓴웃음을 지으며 옆으로 비켜섰고, 나는 슬쩍 고개를 숙인 다음 그라운드로 향했다.
“그래도 혼자 하는 건 아닌데.”
교관님의 옆을 스쳐 지나는 찰나, 마치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이 들렸다.
“축구가 그런 것처럼.”
그 말의 의미를 알기엔,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다.
무릎이 망가진 건, 그날로부터 딱 한 달 뒤의 일이었다.
***
벌써 13년이 지났다. 그 시절을 곱씹어볼 시간도 충분했고, 그때 내 선택이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나이도 먹었다.
나는 그 시절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지만, 내 주위 사람들까지도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어머니는 내 선덜랜드 유스 시절에 관련된 모든 걸 미워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축구공 비슷한 것만 봐도 질색을 하시는 건 물론, 심지어 영어마저 미국식 발음을 배우라고 하실 정도다.
아버지는 겉으로는 별 내색 안 하시지만, 간혹 TV에 축구가 나오면 말없이 채널을 돌린다.
아버지 세대 어르신들에게 있어 최대의 축제라는 월드컵조차 예외는 아니다.
그리고 희주는.
희주는 멀쩡한 줄 알았었다. 얘는 가끔 축구도 보고, 영국행 비행기에도 제 발로 오르며, 심지어 선덜랜드 구단 업무도 능숙하게 했으니까.
하지만 그런 희주에게도 참을 수 없는 포인트는 있었던 것이다.
“희주야.”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마.”
마치 털을 바짝 곤두세운 고양이, 그것도 등 뒤에 새끼를 둔 암고양이처럼 앙칼진 태도다.
“필요하면 그냥 시켜. 이 구단은 오빠 꺼고, 나는 구단주 비서니까 그냥 지시하면 되잖아? 당장 찾아오라고.”
숨도 안 쉬고 쏘아붙인 희주는, 이번엔 입술을 꾹 깨물고 고개를 숙였다.
희주의 수완이나 바지런한 일솜씨는 요 며칠 사이 검증을 마쳤다. 수소문해서 사람 찾는 정도는 뚝딱이겠지.
심지어 비서라는 명목으로 인피니트 스톤··· 아니, 내 인피니트 카드까지 손에 넣었으니, 사실상 경비도 무제한으로 쓸 수 있는 조건이다.
정말로 명령하면, 로저스 감독을 찾아내기까지 사흘이 넘지는 않을 거다.
그러고 싶진 않다.
로저스 감독을 선임하겠다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다. 감독을 빨리 데려올수록 팀의 시즌 준비가 앞당겨진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 사람들, 가족들의 상처를 헤집어가면서까지 서두르고 싶지는 않다.
사람의 감정은, 순리대로 풀어야 할 문제다.
그날 이후, 희주는 일단 겉으로 보기엔 차분한 태도를 유지했다.
일종의 선이 그어진 덕분이었다.
나는 희주 앞에서 로저스 감독 이야기를 꺼내지 않고, 대신 희주도 나와 브라이언이 따로 로저스 감독을 찾아 나서는 걸 방해하지 않는다는 정도의 선.
딱히 말로 정한 적은 없지만, 나와 희주 사이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덕분에, 요 며칠간 브라이언이 꽤 고생하는 중이다.
브라이언은 유스팀 시절 동료들에게 전부 연락을 돌렸다. 비록 교관님 소식을 알아내지는 못했지만, 마치 거미줄처럼 다른 사람들 연락처를 받아내긴 했다.
그러니까 당시의 유스팀 스태프 연락처 같은 것.
“소득은 좀 있었고?”
“이걸 소득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알아낸 건 있었지. 코치님들도 다 모른다더라.”
“꼭 일부러 잠수타신 거 같네. 은퇴하신 게 딱 13년 전이라고 했지? 그때 무슨 일 있었나?”
“브로, 진심으로 묻는 거라면 한 대 때려주고 싶은데.”
아니, 나도 눈치는 있지. 시기적으로 볼 때, 로저스 감독의 진퇴와 내 부상이 어느 정도 관련은 있을 거라고는.
아무리 그래도, 나 때문에 13년간 쭉 잠적했다고 생각하면 너무 자의식 과잉이잖아.
“말을 말아야지··· 아무튼 브로, 이쯤 되면 아예 기사라도 내 보는 게 어때? 아니면 신문광고도 좋고.”
“기사라.”
그러고 보니 마침 인터뷰 거리가 밀려 있긴 하다. 구단을 인수한 이후, 몇 차례 언론사에서 연락이 왔었는데 내부사정으로 뒤로 미뤘으니까.
잘 풀어보면 괜찮을 것 같기도 하다.
유망주 출신 구단주, 옛 은사 같은 키워드를 잘 버무리면 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살짝 찜찜한 부분도 있다.
아직 홍보팀이 뽑히기 전이라 내가 직접 대응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언론에 연락하려면 자연스레 누군가를 끌어들여야 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 이야기를 못 들은 척 새침하게 앉아 있는 고양이 같은···.
기사를 좀 내 달라고 부탁하는 건, 그간의 암묵적인 합의를 깨는 건지 아닌지 살짝 헷갈린다.
순간, 희주 고양이의 눈이 크게 부릅떠졌다.
“기사!?”
아, 선 넘었다는 뜻이네.
“지금, 지금 이것도 기사라고 쓴 거야?! 이 기레기들!”
내가 넘은 건 아니지만.
***
[140년 역사 선덜랜드, 한국 자본에 넘어가]
[구단주의 첫 행보는 감독 경질, 몸집 줄이기 들어가나]
“한 축구 관계자는, 투자자란 결국 싸게 사서 비싸게 파는 직업이니 구단의 성장보다는 차익에 훨씬 관심이 많을 것이라며 우려를 나타냈다··· 아니, 그 축구 관계자가 누군데? 가만 안 둘 거야!”
으르렁거리는 희주의 곁에서 브라이언이 기름을 끼얹었다. 지금 우리가 표적 아니라 이거지.
“아마 이니셜이 R. P일걸요, 레이디.”
“그 인간이 진짜! 중간에 확 I를 덧붙여줄까 보다!”
그러면 R. I. P니까··· 죽여버리겠다는 뜻이네.
눈빛이 영 표독스러운 게 도무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는다. 하필이면 마침 희주의 사교육 목록에는 태권도와 주짓수도 들어가 있다.
마침 로저스 감독 사태로 요 며칠 심기가 썩 편치 않았던 희주다.
[구단주 동생, 폭력 범죄를 일으켜] 같은 후속 기사는 사양하고 싶단 말이지.
“기사 참 꼼꼼하게도 써 놨네. 브로, 얘들 자본에 휘둘려 엉망이 된 구단들 사례를 스무 군데나 찾았다? 이 정성이면 그냥 제대로 된 기사도 쓸 수 있었을 텐데.”
기레기가 기레기하는 거야 만국 공통이라지만, 확실히 축구의 본고장이라 그런지 꽤 집요한 느낌이다.
그 사이 희주는 점점 더 고양이스럽게 변해갔다.
구체적으로는 손톱을 세웠다는 점에서.
구단주실에 새로 들여놓은 가죽 소파를 벅벅 긁으며, 희주가 낮게 중얼거렸다.
“타인위어 스포츠! 얘들 분명히 인터뷰 거절했다고 앙심 품은 거예요. 틀림없어요. 아 진짜! 난 정말 정중하고 예의 바르게 대응했는데!”
“어땠는데 그래?”
“구단 인수한 직후라 지금은 도저히 대응해 드릴 수 없다. 홍보 담당자 구해 지는 대로 다시 연락 드리겠다. 준비되면 제일 먼저 인터뷰하게 해 주겠다고 했어. 단독으로!”
“잘했네.”
“연락처 교환하고, 우리 굿즈도 보내 줬고. 아 맞다. 그거 경비처리 되지?”
“굿즈는 경비처리 되는데, 소파 수선비는 네 월급에서 깔 거야.”
일단 희주에게는 검은 고양이 마스코트 인형을 스크래쳐 대용으로 던져 줬다. 우리 팀 굿즈 중에서도 제일 안 팔리는, 대표적인 악성 재고다.
“레이디, 혹시 기념품이 문제 아니었을까요? 우리 팀 굿즈는 대체로 악성 재고라서···.”
“이런 건 성의가 중요한 거죠. 인터뷰도 안 해주는 마당에, 빈손으로 돌려보내면 얼마나 화나겠어요.”
하긴, 아무리 봐도 희주의 대응은 흠잡을 구석이 없다. 브라이언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내 옆구리를 쿡쿡 찌른다.
“브로, 저것도 사교육의 성과야?”
“뭐, 비슷해.”
시간과 돈을 엄청 발라가면서 배웠다는 점에서는 사교육이라고 말해도 틀리지 않을 거다. 아이돌 팬클럽 생활을 하면서 배운 거니까.
극성팬을 예의 바르게 쫓아낼 때 소속사에서 쓰는 방식이다. 희주는 아마, 자기가 당했던 것 중 가장 기분이 덜 나빴던 대응을 충실히 재현했겠지.
“굿즈 대신 좀 더 비싼 걸 줄 걸 그랬나? 고급 양주라든가···.”
“아냐. 그랬으면 역효과가 났을 거야.”
시작부터 저자세로 숙이고 들어가면, 당장에 악성 기사에 시달리는 일은 없겠지만 대신 제대로 길들이기를 당해 버린다.
지금 잠깐 편하려고, 앞날을 피곤하게 만들 순 없다.
게다가 무슨 메이저 신문도 아니고, 지역 일간지 따위에 숙이기도 영 모양 빠지는 짓이고.
“오빠, 그럼 인터뷰라도 다시 잡을까? 구단주 인터뷰 잡아서, 전부 오해라고 밝히는 거야.”
“인터뷰하긴 해야지.”
“알았어. 금방 연락할게. 구단주 인터뷰해 줄 테니까 일단 기사는 좀 내리자고.”
곧바로 핸드폰을 꺼내는 희주를 제지했다.
“아니, 타인위어 스포츠 말고··· 인터뷰는 다른 데랑 할 거야.”
타인위어 스포츠의 기사를 시작으로 FC 선덜랜드, 그리고 나에 대한 자극적인 기사들이 범람했다.
일단 한 곳에서 먼저 기사 터트리고 나면, 다른 데에도 퍼져나가는 게 요즘 언론들이니까.
[인터뷰도 거부한 불통의 구단, 향후 행보 우려]
[라일 파커 경질, 대안은 있는가?]
신나게 우리를 두들기는 기사들 사이, 유일하게 건조한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선덜랜드 인수. 새로운 구단주는 구단 유소년 출신]
선덜랜드 데일리.
나를 처음으로 인터뷰했던 기자, 애니 피터슨이 몸담았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