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처음이자 마지막 퍼즐 (5)
“나보고 감독을 하라니, 대체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냐?”
“안 그래도 요즘 들어 부쩍 물어보는 분들이 늘었습니다. 제 멘탈 건강에 호기심이 많으신 것 같네요.”
여동생부터 옛 은사까지, 아주 다양한 이들이 관심을 드러내는 중이다.
덕분에 날 잡아서 정신과에 들러야 하나 진지하게 고려하는 중이다. 이 사람은 완벽하게 제정신임, 같은 서류라도 하나 만들어 두려고.
쉽진 않을 것 같다. 이마에 사람의 몸값이 보이는 증상이 있다고 말하면 정신과에선 입원을 권할 테니까.
“다른 건 안 궁금하십니까? 구단 복지, 감독 연봉, 혹은 선수단 예산 같은 거요.”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
로저스 감독이 가슴을 탕탕 쳤다. 재회한 직후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처음 다시 만났을 때, 로저스 감독은 나를 무척 반겨 주었다.
만난 직후에는 나를 끌어안으려 들었고, 내가 선덜랜드를 샀다는 소식에는 자기 일처럼 기뻐했었으며, 내가 제 발로 걷는 모습을 보면서는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었다.
그랬던 로저스 감독의 태도가 변한 건, 선덜랜드 감독직을 제의한 순간부터였다.
거절, 거절, 거절. 덕분에 21세기에 삼고초려 찍고 있게 생겼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희주, 그리고 브라이언을 대동했다.
누가 관우 역할이고 누가 장비 역할일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래도 둘 다 도움 정도는 되겠지.
로저스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인터뷰 잘 봤다. 네가 그 시절 일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뜻은 잘 알겠다.”
“알아주시니 다행입니다.”
“하지만 감정적인 내용을 제쳐두고 냉정하게 평가하면, 나는 결국 선수 관리를 제대로 못 했던 감독이라는 뜻 아니냐?”
그러자 브라이언이 활기차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감독님. 세상에 브로··· 썬 같은 미친놈이 어디 흔하겠어요?”
“넌 좀 닥쳐, 브라이언.”
조금 전부터 희주가 널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단 말이지. 남매니까 표정이 닮았다는 설에 따르면, 당장 영화가 찍고 싶어진 것 같다.
“풀백이었으니까 시체는 사이드라인에···.”
물론 장르는 스릴러, 배역은 연쇄살인마다. 브라이언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브라이언의 이야기에도 일리가 있습니다. 프로 선수들은 다 자기관리 정도는 하죠. 고상하게 표현하자면, 자기관리 못하면 프로가 못 됩니다.”
내가 프로가 되지 못했던 것처럼.
“적나라한 버전도 들어보고 싶구나.”
“저 같은 미친놈은 프로 데뷔 전에 무릎이든 발목이든 어디 한 곳 깨 먹고 사라진다는 뜻이죠. 그러니 프로 씬에선 저 같은 놈 만나기 힘드실 겁니다.”
“미친놈들. 두 놈이 아주 쌍으로 미쳤구나.”
로저스 감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고, 희주는 내 쪽으로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브라이언 씨, 윙포워드 출신은 어디에 묻으면 좋아요?”
“그야 당연히 사이드라인이죠.”
이러다 같이 묻히겠네. 나는 재빨리 목소리를 높였다.
“감독님 입버릇 아니셨습니까? 감독은 선수들의 인생을 책임지는 자리가 아니라고. 감독이 책임질 건, 오직 경기의 승패뿐이라고요.”
“이젠 승패도 책임질 능력이 없어. 축구 접은 지 벌써 13년이거든. 요즘 축구판은 우리 같은 늙은이들이 나서기엔 너무 변화가 빨라. 복잡하지.”
로저스 감독은 고개를 돌려, 브라이언 쪽을 빤히 바라보았다.
“몇 년 전에 브라이언 저놈이 자꾸 안쪽 슬금슬금 파고들길래 쌍욕을 퍼부은 적이 있었지. 축구도 모르는 놈이 왜 안쪽에 꿀이라도 발라둔 것처럼 기어드냐고.”
그랬었다.
유스 시절, 브라이언은 풀백이었지만 전통적인 풀백 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뛰어난 축구 지능에서 비롯한 폭넓은 활동량은 일품이었지만, 그렇다고 발재간이 썩 뛰어나지도, 피지컬이 출중한 선수도 아니었다.
측면을 초토화하는 파괴력도, 그렇다고 상대 윙어를 일대일 상황에서 무력화시킬만한 수비력도 갖지 못한 레프트백 브라이언의 선택은, 틈만 나면 안으로 파고드는 것이었다.
13년 전 당시의 풀백에게는 일반적이지 않은 행동이었기에, 당연히 로저스 감독으로서는 역정을 낼 만한 일이었다.
물론, 요즘의 축구판에선 풀백의 중원 가담도, 안으로 파고드는 모습도 일상적으로 찾아볼 수 있다.
저런 타입의 측면 수비수를 부르는 용어까지 생겼다. 인버티드 풀백.
로저스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런데 정작 축구 모르는 건 나였지 뭐냐.”
“사실 인버티드 풀백은 저도 좀 부정적으로 봅니다. 실제로 펩 말고는 잘 쓰는 사람도 못 봤고요.”
“너는 젊은 놈이 왜 이리 고루해. 그걸로 두 리그를 평정한 감독이 있는데.”
“인버티드 풀백 안 쓰고도 리그와 챔스 들어올리는 감독도 있으니까요. 결국, 중요한 건 무슨 전술을 쓰느냐가 아닙니다.”
“하긴, 쓰리백은 진작에 끝났다 끝났다 하지만, 그래도 종종 쓰리백으로 재미 보는 팀이 나오지.”
축구계를 떠난지 오래라 요즘 전술은 이제 잘 모른다던 로저스 감독은, 정작 축구 이야기가 나오니 자글거리는 눈매를 가늘게 뜨며 열을 올렸다.
브라이언과 희주가 한 마디씩을 덧붙였다.
“그럼요, 감독님. 10번 플레이메이커만 해도 20년간 계속 죽고 죽고 또 죽고 있잖아요?”
“아, 그거! 이집트 시절부터 요즘 애들은 계속 버릇이 없었다던 거랑 똑같은 거죠?”
중요한 건 무슨 포메이션을 쓰는지, 어떤 전술을 쓰는지가 아니다. 그런 건 명장과 졸장을 가르는 요소가 될 수 없다.
무슨 전술이든 잘 쓰면 명장이고, 못 쓰면 졸장이다.
잠시 나와 브라이언, 그리고 희주를 번갈아 바라보던 로저스 감독의 눈이 옆으로 길쭉해졌다.
“세상엔 명장이 많지. 나 같은 퇴물 늙은이 말고도··· 그런데도 나보고 감독을 하라는 게냐?”
“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언하자, 로저스 감독이 피식 웃었다.
“그래서, 어디까지 가보고 싶은 건데?”
“2년 연속 승격이죠.”
“다음은?”
“챔스 진출.”
리그 우승, 챔스 우승 같은 야심은 굳이 꺼내지 않았다. 이쯤 되면 로저스 감독도 이미 짐작했을 테니까.
“길고 험난한 길일 텐데···.”
“경쟁률로 따지면 비슷하지 않을까요? 유소년 선수가 프로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와 비교하면요.”
“하긴, 너는 먼저 포기한 적은 없지.”
잠시 날 아련한 눈길로 바라본다 싶던 로저스 감독의 고개가, 마침내 천천히 움직였다.
마침내 수락하겠다는 의미인가 싶었지만, 방향이 달랐다. 그렇다고 거절의 표시처럼 보이지는 않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정도의 모습에 더 가까워 보였다.
로저스 감독이 쓴웃음을 지었다.
“요즘 축구판은 현장을 한 번 떠났던 노장들이 통할 정도로 만만하지 않아. 내 역량은 리그 원, 기껏해야 챔피언십까지일 거다. 그런데도 정말 날, 감독으로 삼겠다고?”
“네.”
“보아하니 내게 전술적 역량 같은 건 조금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뜻이구나.”
“브라이언이 도와드릴 겁니다.”
잠시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로저스 감독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저 녀석이냐? 네가 정해둔 사람이.”
“네. 브라이언이 감독 보좌 역할을 해드릴 겁니다.”
그러자 로저스 감독은 빙긋 웃고는, 브라이언에게는 들리지 않을 만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 보좌 말고, 내 후임 말이다.”
눈치가 빠르다.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네.”
“선수 말고, 이제는 감독도 키워내란 소리구나.”
“네.”
빤히 날 쳐다보던 시선, 13년 전에는 세상 누구보다 엄격했던 그 눈가에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감독은 사이드라인 안쪽으론 들어갈 수 없지. 일단 킥오프하고 나면, 휘슬이 울릴 때까지는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어. 눈앞에서 선수가 쓰러져도 손을 내밀지 못해.”
“네. 하지만 저도, 브라이언도 이제는 선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스태프는 항상 사이드라인 밖에 머물고요.”
“그래. 이번에는 내가··· 도와줄 수 있겠구나.”
눈앞에 내밀어진 로저스 감독의 손을 힘주어 잡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
감독 선임 소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선덜랜드 데일리를 통해 발표했다.
- 라일 파커 자르고 데려온 게 유스 감독ㅋㅋㅋ 올 시즌도 던졌죠.
ㄴ 유스 팀 감독이긴 한데, 선덜랜드 유스 팀임. 그리고 그 시절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 팀이었음. 솔직히 요즘 만나는 3부리그 감독들보다는 급이 높지.
ㄴ 그렇게 치면 맨시티나 리버풀에서 유스 감독 빼 오지? 2부리그까지도 싹 다 씹어먹을 텐데?
ㄴ 시티는 그렇다 치고, 리버풀이 왜 나옴? 너 콥등이지.
댓글 한번 잘 불탄다.
“유소년이라서 근본인 줄 알았는데 하는 짓은 친목 축구임. 친목 축구 할 거면 아예 헨도도 빼 오지··· 라는데, 오빠?”
어, 헨도는 진짜 좀 솔깃한데··· 지금의 선덜랜드에 돌아와 줄 리는 없겠지만.
“그런데 희주 너는 뭐하냐?”
“응? 댓글 다는데?”
보아하니 꼭 꼬리를 곤두세운 고양이 같은 게, 완벽한 전투 태세다.
나는 실소했다.
“야, 구단 관계자가 괜히 옹호댓글 달고 그러면 나중에 문제 생긴다.”
“오라버니, 그야 가계정은 기본이죠.”
희주는 의기양양하게 계정을 바꿔가며 댓글마다 답댓글을 달았고, 잠시 후에는 SNS에 건너가서도 맹활약했다.
이것도 아이돌 팬질로 다져진 솜씨겠지. 나름 재주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길게 보면 홍보팀을 뽑아서 맡기는 게 나을 업무일 것이다.
물론 지금의 내게는 홍보팀을 섭외할 만한 여력이 없었다.
코치진 선임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는 중이었으니까.
파커에게 라일 파커 사단이 있었던 것과는 달리, 13년간 야인으로 머물던 로저스 감독에게는 자신의 사단이라 불릴 코치들이 없다.
그를 도와줄 멤버는 전부 우리 손으로 데려와야 했다.
“브로, 골키퍼 코치 후보를 압축했는데.”
브라이언이 내민 프로필을 흘끔거리며,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셋 다 괜찮네. 이마가 아주 환해.”
가치만 봐서는 셋 다 적당하다. 딱히 능력이 부족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감독 머리채를 잡고 흔들려 덤빌 만큼의 거물들도 아니다.
내 눈엔 셋 다 고만고만하니 나로선 누구를 골라도 상관없다. 그러니 기왕이면 로저스 감독의 입맛에 맞는 사람이 좋겠지.
슬쩍 눈짓하자 브라이언이 얼른 프로필을 챙겨서 감독에게 내민다.
“감독님?”
로저스 감독은 곧바로 반응하지는 못했다.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었기 때문이다.
“오호라. 요즘은 선수를 이렇게 관리하는 게로군?”
심박계와 GPS를 기반으로 한 관리 도구, 그러니까 EPTS다.
심박계도 GPS도 로저스 감독의 시대에 있던 기술들이지만, 축구판에 본격적으로 이용된 건 요즘의 일이다.
요즘은 경기 중에는 물론, 훈련할 때에도 선수들의 신체 기록을 실시간으로 측정하고 분석하는 시대다.
브라이언이 빙긋 웃으며 설명했다.
“네, 감독님. 덕분에 요즘은··· 선수가 무리하다 망가지는 일은 극히 드뭅니다. 누가 오버워크하고 있는지 측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래. 사용법을 배워야겠구나.”
“네! 제가 알려드릴게요.”
해맑게 웃는 브라이언을 밀쳐내고 재빨리 끼어들었다.
“체력 코치를 따로 구할 겁니다.”
최근, 브라이언이 기계치라는 제보를 입수한 적이 있다. 물증도 있다. 브라이언은 희주가 만든 선수들 프로필 자료를 몽땅 날려 먹을 뻔한 당사자다.
클라우드는 진리입니다. 두 번 쓰세요.
다행히 체력 코치는 스포츠 생리학은 물론, 전자기기 사용과 EPTS에도 능통한 사람으로 새로 뽑았다.
이윽고 골키퍼 코치, 기술 코치를 비롯한 코칭스태프가 속속 갖춰졌고, FC 선덜랜드의 새 시즌 준비는 비교적 빠르게 진행되었다.
이제 남은 퍼즐 조각은···
브라이언의 후임을 맡을 전력분석관과.
선수단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