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팀을 만드는 방식 (1)
<나는 선수들에게 최고가 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최고를 꺾을 수 있는 팀이 되라고 말한다. - 위르겐 클롭>
7월 초. 휴가를 떠난 선수단이 돌아오면서 본격적인 프리시즌이 시작되는 시기가 되었다.
FC 선덜랜드의 메인 훈련장,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는 시즌 맞이 준비로 한창이었다.
“1번 그라운드, 잔디 다시 깎아. 더 짧게! 그리고 3번 그라운드는 수중전용으로 고쳐서 세팅해달라고 했잖아!”
로저스 감독이 목에 핏대를 세우자, 희주가 붙임성 있는 미소를 지으며 접근했다.
“수중전이면 물을 더 많이 뿌리라는 뜻이죠? 시설관리팀에 연락해서 곧바로 처리할게요.”
그러자 로저스 감독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내가 직접 이야기하겠소. 샘, 이 얼간이 같은 친구가 아무래도 노망이 든 게 틀림없거든. 그게 아니고서야 삼십 년 넘게 잔디만 만지던 인간이, 갑자기 잔디를 이따위로 세팅할 리가 있나.”
혀를 차는 감독을 향해 희주가 낮게 덧붙였다.
“저, 감독님? 저희 시설관리팀장 이름은 톰인데요. 톰 하딩.”
“··· 샘 윌리엄슨이 아니고?”
“아니에요. 톰 하딩이에요.”
대답하는 희주의 얼굴은 우수에 잠긴 것처럼 보였고, 덕분에 로저스 감독 역시 덩달아 침통해졌다.
“어째 통 얼굴이 안 보인다 싶더라니··· 뭐 그리 빨리 떠났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로저스 감독을 뒤로 한 채, 희주는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오빠, 감독님 왜 저러셔?”
“샘 아저씨하고는 오래 알고 지내셨거든. 아무래도 연배가 비슷하기도 하고··· 코칭스태프와 잔디관리인은 생각보다 훨씬 마주칠 일도 많으니까.”
샘 윌리엄슨. 일명 샘 아저씨는 내가 유소년이던 시절 이전부터 줄곧 선덜랜드의 잔디를 담당해 온, 베테랑 중의 베테랑이었다.
구단의 과거를 함께해온 사람이라면 당연히 숙연해질 이야기에, 나 또한 그만 표정이 침울해지고 말았다.
물론, 함께할 과거가 없는 희주의 반응은 냉담했다.
“그건 알겠는데··· 내 말은, 저렇게까지 침통한 표정을 지을 필요가 있냐는 건데.”
장어 젤리에 인성 비벼 먹은 듯한 발언.
물론 실제로 비벼 먹었을 리는 없다··· 희주 얘는 입맛이 고급이거든.
“혹시나 해서 말인데, 샘 아저씨, 그러니까 샘 윌리엄슨 씨 말인데, 지금 어디서 뭐 하시냐?”
“집에서 쉬실걸? 지난번 대규모 정리해고 때 그만두셨는데, 나이 때문에 복직 안 하신댔어.”
“··· 그럼 조금 전 지었던 슬픈 표정의 의미는?”
“그야 감독님도 연세가 있으니까 슬슬 기억력이 깜빡깜빡하는가보다 싶어서··· 어머!”
내 암시를 알아들은 희주는 황급히 로저스 감독에게 달려가 고개를 몇 번이고 조아리며 사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조용히 스마트폰 메모장을 열었고, 느긋한 손길로 기록을 시작했다.
- 잔디관리 인력 확충
- 이희주 용돈 1주 정지
***
시설관리팀이 잔디를 손보는 사이, 훈련장 주변에는 어느새 카메라 든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커다란 비디오카메라와 마이크의 향연, 개중엔 반사판 든 사람도 드문드문 보인다. 아무리 봐도 본격적인 영상 촬영팀이다.
브라이언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휴, 또 취재진이야? 지겹지도 않나··· 이봐요! 훈련장은 취재 금지 구역입니다! 무슨 소린지 알겠어요?”
브라이언의 외침은 공허했다. 촬영팀은 딱히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그에 비례해 브라이언의 얼굴 또한 험악해졌다.
“아니, 경비팀은 대체 뭘 하고 있길래 취재진이 훈련장까지 기어들어 오게 놔뒀어?”
마치 권총이라도 꺼낼 듯한 전투적인 동작으로 품에서 전화기를 꺼내 드는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나는 짧게 말했다.
“내가 불렀어.”
“역시 브로, 대응이 빠르네. 그래서 언제 온대? 당장 이 인간들 모조리 끌어다···.”
“아니, 저 촬영팀. 내가 부른 인력이라고.”
브라이언의 얼굴이 기묘하게 구겨졌다.
“왜?”
“왜냐면 이제부터 우리 훈련을 전부 찍을 거니까.”
“어, 그러니까 왜 훈련을 찍느냐는 소린데?”
“이유는 두 가지인데··· 우선 구단 홍보 컨텐츠에 쓸 재료를 확보하려는 거지. 물론 공개 전에는 민감한 내용이 새지 않도록 코치진의 검수를 받을 거야.”
선수의 버릇이나 훈련 내용이 새어나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다. 그렇게 못을 박자 브라이언은 좀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브로, 그럼 두 번째 이유는?”
“이 영상은 분석팀에서 쓰일 데이터이기도 하거든.”
“내가 찍고 있잖아.”
“약은 약사에게··· 촬영과 편집은 전문가에게 맡기자.”
브라이언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브로, 내 영상이 그렇게 엉망이었어?”
“애들 홈 비디오 찍는 아버지들과 비교했을 때 일장일단이 있는 정도라고 생각하는데.”
그러자 브라이언은 좌절한 것처럼 어깨를 늘어뜨렸지만, 나로서는 이것도 최대한 포장해준 거다.
내 생각엔 영상 퀄리티가 단점, 피해자가 적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거든.
“근데 브로, 분석팀 스태프라기엔 너무 그··· 전문적이라서, 나는 꼭 취재 온 줄 알았지 뭐야.”
“그야 당연하지. 방송일 하는 사람들이니까.”
“방송일 하던 사람들? 브로, 그러면 월급이 너무 비싸지 않아?”
그러자 옆에서 희주가 쏙, 끼어들었다.
“브라이언 씨, 이제 돈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했잖아요. 우리 오빠는 돈 많은 갑부 구단주라니까요.”
“그건 아는데··· 그래도 축구판엔 FFP같은 제도가 있으니까 신경이 쓰이긴 하네요.”
“FFP가 뭐에요?”
“재정적 페어플레이라는 건데요. 유럽 축구 연맹의 규정에 따르면···.”
브라이언의 설명을 들은 희주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남매니까 표정이 닮았다는 가설에 따르면, 이 표정은 [전혀 모르겠으니 매우 가만히 있어야겠다.] 에 해당한다.
희주를 위해 짧게 설명했다.
“한마디로 버는 만큼만 돈 쓰라는 내용의 규제야. 수익보다 지출이 많으면 단속당하지.”
“그렇구나! 그럼 FFP에 따르면 구단주가 구단에 돈 퍼붓는 건···.”
“당연히 수익이 아니지. 그러니까 희주 너도 용돈을 수익으로 잡는 습관을 벗어나라.”
“내일부터 FFP 반대 시위 나갈 거야.”
어 그래, 마스크 꼭 쓰고.
귀국하는 대로 광화문에 나갈 듯한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한 희주를 잠시 내버려 두고, 나는 브라이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FFP 문제는 나도 다 생각하고 있어. 우선 저 사람들은 FC 선덜랜드 직원들이 아니야. 애초에 축구 구단에서 일할 만한 사람들이 아니잖아? 방송사 직원이지.”
“방송사 직원?”
정확히는 TV 프로그램 제작사인데, 대충 방송사라고 퉁치자.
“아까부터 그렇게 말했잖아. 방송일 ‘하는’ 사람이라고.”
“무슨 문법 강사도 아니고, 시제 이야기는 대충 넘기자. 그래서, 방송사 직원들이 갑자기 왜 떼로 몰려온 건데?”
“저 방송사는 우리랑 스폰서 계약을 했어. 그런데 스폰서는 광고비도 주지만, 물품 협찬 같은 것도 하잖아? 마찬가지로 영상 기술을 협찬하는 계약이라고 생각하면 돼.”
물론 광고비도 받을 거지만.
그러자 상황을 파악한 브라이언의 입이 길게 찢어졌다.
“혹시 저기 오너가··· 나하고 잘 아는 사람인가?”
“맞아. 아마 어릴때 기숙사 방도 같이 썼을 걸.”
나와 브라이언, 둘 중 누가 먼저 소리 내 웃었는지는 모르겠다. 사실 거의 비슷했을 테니까.
우리는 얼굴을 마주 보고 한참을 킬킬거렸다.
“이제는 진짜로 선수만 남았구나.”
“맞아. 선수만 남았지.”
***
- No 18. MF | 잭 맥그리거
희주가 경쾌한 손놀림으로 스크린에 선수 프로필을 띄웠고, 브라이언의 설명이 뒤따랐다.
“이 선수는 잭 맥그리거. 포지션은 미드필더인데요. 구단 유소년에··· 선덜랜드 출신이죠. 올해 스물 한 살, 어리지만 장래가 괜찮은 선수입니다.”
흔히 말하는 로컬 보이. 실력이 뒷받침되기만 하면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성장할 만한 조건이다.
하지만 나로서는 그의 커리어보다, 다른 쪽이 훨씬 더 흥미로웠다.
예를 들면 그의 프로필, 구체적으로는 얼굴 사진이다.
맥그리거는 축구 선수라기보다는 군인이 어울릴 것 같은 각진 얼굴과 험상궂은 인상의 소유자였다. 짧게 깎은 머리 아래 드러난, 이마의 숫자 180이 인상적이다.
잠재가치 백팔십억 원짜리 축구 선수.
제대로 성장하기만 하면, 틀림없이 프리미어리그 팀의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는 재능의 소유자다.
로저스 감독이 빙긋 웃었다.
“한번 키워 보고 싶게 생긴 친구로군. 말은 안 듣게 생겼지만··· 실제론 어떤가, 브라이언?”
“조금 다혈질이지만, 솔직하고 단순해서 다루기는 편하실 겁니다.”
“다혈질이면 빌드업 리더가 될 타입은 아니겠군. 발은 빠른 편인가?”
“주력이 괜찮고, 지구력도 훌륭합니다. 경기장 안에서는 아주 성실하죠.”
“팀에 괜찮은 패서가 있다면 빛을 보겠군.”
“마침 바로 다음에 소개할 선수가 패서긴 한데요. 요나스 뮐러라고··· 우리는 보통 요니라고 부르죠.”
그렇게 선수단 프로필을 하나하나 살핀 로저스 감독의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피었다.
“이 친구들이 뛰는 모습을 하루빨리 보고 싶군. 최대한 빨리 연습 경기를 잡아 주지 않겠나?”
그러자 브라이언이 재빨리 일어났다.
“안 그래도 그 말씀을 드리려던 참입니다. 저는 다 계획이 있거든요.”
글쎄, 어떨까.
마침 내게도 계획이 있지만, 우선 브라이언의 계획부터 먼저 들어보기로 했다.
“우선 프리시즌 첫 경기는 볼턴. 리그 투 팀이니까 몸풀기 상대로 적당하겠죠. 지난 시즌 우리하고 두 경기 다 비겼으니까 복수전이라는 의미에서도 적당합니다.”
“브라이언 씨, 리그 투 팀인데 어떻게 우리하고 비길 수 있었죠?”
“이번에 강등당했습니다. 레이디··· 그리고 다음 상대는 챔피언십의 로더럼, 마침 우리와는 지난 시즌 전부 비긴 상대입니다.”
“이번에 승격했다는 뜻이겠네요.”
“정확하십니다. 레이디··· 그렇게 컨디션을 조절한 다음엔, 남미 투어를 가는 거죠.”
“투어요?”
여행이라는 소리에 희주의 표정이 환하게 피었다. 아마 관광이라도 다녀오자는 소리로 착각한 모양이다.
안됐지만 브라이언이 말하는 투어는 관광과는 거리가 멀다.
브라이언의 설명이 이어졌다.
“보통 축구팀의 프리시즌 투어는 해외 팬을 확보하고, 초청비를 벌어들이는 활동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시즌권도 다 못 파는 마당이라 해외 팬까지 챙길 상황이 아니에요.”
“그리고 모처럼 갑부 구단주가 들어왔으니 초청비를 욕심낼 필요도 없다는 뜻이군요.”
“현명하십니다, 레이디. 따라서 이번 프리시즌 투어는 수련의 장으로 삼자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미는 상업적으로는 큰 시장이 아니지만, 대신 실력 좋은 팀이 많은 곳이죠··· 브로, 왜 웃어?”
“내 생각하고 똑같아서.”
“좋아. 그러면 이대로 프리시즌 계획 짜면 되겠지?”
“아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돈을 벌 필요가 없으니 이번 프리시즌의 최우선 목표는 팀의 전력을 끌어올리는 것이다. 옳은 말이야. 나도 그렇게 생각했거든. 딱 하나만 빼고.”
“음, 남미 대신 아프리카로 갈까?”
“돈을 벌 필요가 없다는 부분이 틀렸어. 브라이언, 내 직업이 뭐였지?
“투자자.”
나는 고래를 끄덕였다.
“투자란 돈을 써서 더 큰 돈을 버는 행위야.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고. 따라서 이번에 투어는 없어. 우리는 프리시즌 전 경기를 홈에서만 치를 거야.”
눈치 빠른 로저스 감독이 가장 먼저 히죽거리기 시작했고, 뒤이어 브라이언이 사색이 되었다.
잠시 후, 눈만 깜빡이던 희주가 속삭이듯 물었다.
“그럼 오빠, 홈으론 어느 팀을 부를 건데?”
나는 짧게 대답했다.
“레, 바, 뮌.”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브로, 혹시나 해서 말인데··· 그래놓고 레알 소시에다드, 바젤, 묀헨글라트바흐 부르는 건 아니지?”
무슨 맥, 북, 에어 마케팅 같은 소릴 하고 있냐. 그리고 마지막은 ‘묀’ 이잖아.
“진짜 레바뮌 부를 거야.”
레알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바이에른 뮌헨··· 유럽 축구계의 거인들. 빅클럽 중의 빅클럽.
우리 프리시즌은 그 세 팀을 초청해서 치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