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팀을 만드는 방식 (2)
브라이언이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브로, 혹시 나 몰래 뮌헨 지분 사들였어? 아니면 레알 구단주와 안면이 있거나, 메시 자산을 굴려주는 중인가?”
“그럴 리가.”
“아니, 그런 게 아니면 레, 바, 뮌이 우리 상대하러 와 줄 리가 없잖아? 우린 3부 리그 팀이니까.”
“돈으로 부를 거야. 초청비는 전혀 신경 쓸 필요 없다고 말했잖아. 애초에 프리시즌엔 아시아 투어도 다니는 모양이니까, 금액만 맞으면 우리에게도 오겠지.”
레알이나 바르샤, 뮌헨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답이 나온다. 아시아나 북미 투어에 비하면 해외 팬 유입 효과는 줄어들겠지만, 대신 우린 같은 유럽이라 일정 잡기가 편하다는 장점이 있다.
해외 투어 시작··· 혹은 투어 마지막에 들르는 식으로 처리하면 짭짤한 보너스가 될 거다. 절대 거절하지 않겠지.
하지만 브라이언의 얼굴은 변함없이 사색이었다.
“브로, 그렇긴 해도··· 너무 무모한 시도 아닐까?”
“수비적으로 얼마나 단단한지 보려면 엉망으로 두들겨 맞는 경기가 좋다면서. 네가 그랬잖아.”
“그래서 프리시즌 시작부터 유럽에서 가장 큰 구단 셋을 불러다 우릴 패겠다고?”
“맞아. 유럽 최강자들에게 엉망이 되도록 얻어맞다 보면··· 3부리그 팀들이 하는 공격은 그야말로 아프지도 가렵지도 않을 테니까.”
“선수들 사기가 엉망이 될텐데.”
구석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로저스 감독이었다.
“그것까지 각오한 겁니다. 우리는 지난 2년간 점유율 축구를 하던 팀, 리그 원에서는 빅클럽이라며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던 팀이잖습니까?”
선수들의 프로필 사진을 보고 확신한 사실이 하나 있다.
우리 팀 스쿼드는 절대 나쁘지 않고, 적어도 리그 원에선 빅클럽을 자처하기 충분한 수준이다.
선수들의 이마에 표시된 가치는 하나같이 리그 원에선 평균 이상이었고, 개중에는 챔피언십, 그리고 프리미어리그까지 통할 재능도 두세 명쯤 보였다.
그런 팀이 2년간 승격조차 하지 못했다. 비단 감독의 태업만이 원인은 아니었을 것이다.
선수들의 멘탈도 문제일 것이다.
리그 원에선 손꼽히는 빅클럽이라는 자만심, 2년 연속 승격에 실패하며 쌓인 패배 의식, 이대로도 괜찮다는 나태함 같은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 있을 테니까.
“그래서 지금까지의 축구를 싹 잊어버릴 만큼 강렬한 기억··· 혹은 트라우마를 안겨주겠다, 이건가?”
“네, 사실 그동안 해온 점유율 축구가 정신적으론 훨씬 편하죠. 주도권을 잡고 계속 몰아치면 그만이니까요. 반대로 수비 축구, 역습 축구는 심적으로 소모가 심하잖습니까?”
“한 마디로 담금질이군. 나는 좋아하는 방식이지만··· 자칫하면 선수단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는데.”
로저스 감독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고는, 내 쪽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감독님의 역량을 믿습니다.”
로저스 감독과 잠시 지그시 눈을 맞춘 다음, 브라이언과 희주 쪽으로 차례로 시선을 돌렸다.
“브라이언, 전술적으로 압도당했단 소린 듣지 않게 해줘. 희주 너는 경기 일정 차질없이 잡아주고. 어쩌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업무야. 이렇게 말해놓고 막상 섭외 못 하면 말짱 꽝이니까.”
희주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귀를 쫑긋 세운 고양이처럼.
“에헤헤, 그렇구나! 맡겨 둬. 경기당 최소 일주일 이상 간격 두면 되지? 그 밖에는?”
나는 잠시 생각한 다음 대답했다.
“주전급 선수들 의무출전 조항 넣고, 위약금 조항을 빡빡하게 넣어. 대신 초청비는 좀 양보해도 괜찮아.”
“돈은 써도 되지만, 눈 뜨고 날강두 당하진 말라는 소리구나? 알았어. 꼼꼼하게 계약할게!”
희주는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태세를 갖췄지만, 브라이언의 표정은 계속 어두웠다. 보아하니 아무래도 돈이 신경쓰이는 모양이다.
“왜, 초청비가 그렇게 아까워?”
“그렇지 뭐. 아무리 브로 덕분에 돈 걱정은 안 해도 된다지만, 고작 프리시즌 세 경기에 그렇게 돈을 퍼붓는 건 좀.”
“영국 지도 한 번 보면 생각이 바뀔걸.”
평소 유럽 대회에 나가는 빅클럽들은 영국 남부와 북서부에 몰려 있다. 빅 6이라고 불리는 강팀들의 연고지가 그렇기 때문이다. 런던에 셋, 맨체스터에 둘, 그리고 머지사이드에 하나.
“우리가 런던이나 맨체스터 팀이었다면, 빼도박도 못할 돈지랄이겠지. 그 지역 사람들은 챔스에서 레바뮌 종종 보거든. 파리나 알레띠, 유베도 보고.”
하지만 선덜랜드가 위치한 영국 북동부에는, 유럽 대회에 나가는 팀이 없다.
“노스이스트 팬들은 해외 팀 한번 보려면 그레이트 런던이나 맨체스터, 머지사이드까지 가야 했어. 그나마도 억수로 운 좋은 사람들 이야기야. 한정된 티켓 수량을 놓고 지역 팬들과 경쟁해야 했을 테니.”
천천히 침을 삼키는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메시가 영국 북동부에 오는 건 이번이 처음이지.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어. 그런데도 아직도 초청비 걱정이 들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수용인원이 사만 구천 명이나 되는데?”
브라이언이 맹렬히 고개를 흔들었다.
***
마일즈 우드는 선덜랜드의 서포터였다.
꾸준히 시즌권을 산 지 14년, 이제는 슬슬 고참이라고 해도 좋을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마일즈는 선덜랜드 서포터들 중에서는 한참 어린 축에 속했다.
선덜랜드 골수팬은 대체로 연령대가 높은 편이다.
구단이 잘 나갔던 시절이 하도 오래전 일이라 그럴 거라고, 마일즈는 늘 생각했다.
‘내가 미쳤지. 어쩌다 이딴 팀을 응원하게 되어서.’
뉴캐슬이라는 선택지도 존재했었다. 비록 선덜랜드가 집에서 좀 더 가까웠지만, 마일즈는 굳이 따지자면 중립 지역, 게이츠헤드 주민이었으니.
실제로 그의 이웃 브렌든은 오랜 뉴캐슬 팬이었고, 10년 넘는 세월 동안 마일즈를 조롱했었다.
- 기어이 이번에도 시즌 티켓 샀다고? 그냥 빨리 환불하고 이 기회에 뉴캐슬로 옮기지?
또 시작이다. 마일즈는 입술을 한번 깨문 다음, 짧게 회신했다.
- 뉴캐슬은 너무 멀어.
- 솔직히 세인트 제임스 파크나, 스타디움 오브 다크나 거기서 거기지. 차 타면 딱 5분 차이잖아.
- 다크?
- 전망이 다크하잖아.
“브렌든 이 새끼가 진짜.”
마일즈는 스마트폰을 내려다보고 낮게 욕설을 퍼부었지만, 그게 고작이었다. 전망이 어둡다는 말에, 차마 반박할 수 없는 자신이 슬펐다.
- 너, 나중에 혹시라도 우리 팀 티켓 구해 달라고 입 털면 죽인다.
- 내가 거기 갈 일이 있겠냐? 프리미어 팀 서포터가, 3부따리 팀을 보러?
- 뉴캐슬도 2부 다녀왔잖아. 그때는 선덜랜드가 프리미어 팀이었어.
- 벌써 11년 전, 그것도 딱 1년이었지.
하여간 한 마디를 안 지려 든다. 마일즈는 깊은 한숨을 쉬고 말았다.
그 사이 브렌든에게서 또다시 메시지가 날아왔다.
- 혹시라도, 내가 스타디움 오브 다크 입장권 구해달라고 하는 날이 있으면, 그땐 내가 사람이 아니라 개다. OK?
-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 알았어. 이름만 라이트.
마일즈는 한숨을 쉬었다. 응원하는 팀이 3부 리그에 처박혔을 뿐인데 이렇게 놀림당하고 비아냥을 들어야 하는 걸까.
“내가 잠깐 미쳤었지.”
마일즈는 원래부터 선덜랜드의 서포터는 아니었다.
뉴캐슬어폰타인도 시티 오브 선덜랜드도 아닌 중립지대, 게이츠헤드에 거주하는 중이기도 했고, 축구라는 스포츠에 대해 특별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90분간 자기들끼리 공 차고 놀다가 돈까지 받아간다고? 그거 참 세상 편한 일이네.’
그랬던 마일즈가, 선덜랜드 서포터가 된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14년 전, 일 때문에 선덜랜드에 갔다가 웬 동양인 꼬맹이 하나가 동네를 뛰는 모습을 보고 만 것이다.
비를 옴팡지게 맞으면서도 조금도 개의치 않고 달리는 모습에 놀랐고, 벌써 몇 년째 매일같이 저런다는 주위의 이야기에 감동했었다.
그 꼬맹이가 선덜랜드 유소년 축구 선수라는 사실을 안 순간, 마일즈는 선덜랜드의 열렬한 서포터가 되었다.
그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동양인 꼬맹이는 프로가 되지 못했고, 선덜랜드는 강등당했다. 그리고 그날의 선택 때문에, 마일즈는 벌써 10년 넘게 계속 조롱당하는 중이다.
“진짜 올해가 마지막이야··· 두 번 속으면 속은 놈이 병신이잖아. 그렇지, 썬?”
그때, 마일즈의 주위가 시끄러워졌다. 무슨 일인가 봤더니, 구단 직원들이 부산하게 경기장 곳곳에 무슨 포스터 같은 걸 붙이는 중이었다.
[선덜랜드 VS 바르셀로나]
마일즈는 눈을 깜빡이고, 비비고, 깜빡인 다음 포스터를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바르샤와 선덜랜드가 친선 경기를 치른다고?
“저기, 이게 무슨 소리요?”
마침 그의 곁을 지나가는 구단 직원이 있길래 잠깐 불러세웠다. 오리엔탈 뷰티라는 말이 잘 어울릴, 예쁘장한 동양인 여성이 영업용 미소를 지어 보였다.
“보시는 대로인데요.”
“아니, 그 바르셀로나 맞습니까? 바젤이 아니라? 아니, 사실 바젤만 불러와도 대단한 거지만···.”
“바르셀로나 맞아요. 축구의 신이 뛰는 바로 그 클럽이요.”
“혹시 이게 꿈이라면···.”
“뺨이라도 때려드릴까요?”
“그건 사양하겠소만.”
그러자 구단 직원은 생긋 웃었고, 마일즈의 손에서 스마트폰을 빼앗다시피 받아들더니 주소를 하나 입력했다.
선덜랜드 데일리의 사이트였다.
[선덜랜드 프리시즌 일정 밝혀! 첫 상대는 바르샤]
[선덜랜드는 이번 프리시즌에 바르셀로나, 레알 마드리드, 바이에른 뮌헨을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에 초청한다.]
[시즌권 보유자는 3경기를 모두 무료로 관전할 수 있으며, 오늘부터 동행자 1명을 위해 티켓을 추가로 구매할 수 있다. 일반 관객을 위한 입장권 예매는 다음주부터 시작된다.]
눈으로 읽고도 믿기지 않아서, 마일즈는 신문 기사를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읽었다. 그때 마일즈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브렌든의 메시지였다.
- 그래서, 시즌권 환불했냐? 아니, 환불하셨습니까?
- 놉.
- 그러면 혹시 이번 레바뮌 3연전 티켓 좀···.
마일즈는 잠시 폰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리고는 느긋한 손길로, 지난 10여년간의 한을 담아 회신했다.
- 일단 네발로 기어 와서 다시 짖어봐. 개새꺄.
여전히 뉴캐슬은 프리미어 팀이고 선덜랜드는 리그 원 소속, 라이벌이라기도 민망할 만큼 벌어진 격차는 아직 조금도 좁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아주 약간, 선덜랜드를 응원해온 십여 년의 세월을 보상받은 것만 같아서.
마일즈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
“오빠, 이상한 사람 봤어.”
“왜?”
“아니, 포스터 붙이는데 와서··· 한참 동안 울면서 웃더라고. 좀 무서웠어.”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 팬이겠지. 그것도 아마, 시즌권을 가진 골수팬.”
그러자 희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시즌권 사서 나가는 길이었겠네. 나중에 감사 카드 같은 거라도 보내 주자. 이번 포스터 붙이기 전에 시즌권 샀으면 완전 충성팬이잖아?”
“괜찮은 생각이네. 폼으로 아이돌 팬클럽 한 건 아니었나봐?”
“에헤헷. 덕질이 이렇게 이롭습니다, 오라버니.”
희주가 활짝 웃으며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였다.
“근데 브이 그거, 영국에선 하지 마. 욕이니까.”
“어, 진짜?”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손을 오므리는 희주를 향해, 나는 상냥한 미소를 되돌렸다.
손가락 브이의 경우 방향이 손등 쪽일 경우에만 욕이라는 사실은 영원히 알려주지 않을 생각이다.
왜 놀리냐고 묻는다면, 그곳에 여동생이 있기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게 세상의 오빠들 아니겠어?
“그럼, 단골 보답 서비스··· 바로 준비할까?”
“그 전에 이번 3연전 준비부터 해야지. 유니폼 레플리카 50% 세일가로 풀고, 검은 고양이 인형은 모조리 꺼내와.”
“유니폼은 알겠는데, 고양이 인형? 그거 팔릴까?”
검은 고양이 인형. 하도 안 팔려서 요새는 희주의 스크래처 대용으로나 쓰이는 대표적인 악성 재고다.
그 악성 재고를 꺼내오라는 지시에 희주의 고개가 옆으로 갸우뚱해졌고, 눈은 고양이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음, 이러니까 꼭 인형 같네.
바비 인형 말고, 검은 고양이 인형.
“팔 거 아닌데.”
“그러면?”
레알이, 바르샤가, 뮌헨이 온다. 축구의 신이 노스이스트에 온다.
선덜랜드의 축제, 더 나아가 북동부 축구팬 전체의 축제로 만들 수 있는 호재다. 그러니까···.
“도시를 한번 붉게 물들여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