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팀을 만드는 방식 (3)
[FC 선덜랜드의 새 시즌권, 이틀 만에 전량 매진··· 파문]
[바르샤전 앞두고 티켓구매 전쟁! 매표소 앞 2천명 줄서]
[선덜랜드의 희성 ‘썬’ 리 구단주, 팬들의 뜨거운 사랑에 감사··· 되돌려줄 방법 고민]
기사를 읽던 브렌든은 혀를 찼다. 뉴캐슬 팬으로서는 썩 유쾌한 기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랄을 한다. 지랄을 해. 아주 지랄도 풍년이지.”
사실 브렌든은 뉴캐슬의 열성 팬까지는 아니었다. 애초에 뉴캐슬어폰타인이 아닌, 게이츠헤드 필링 거주민이기 때문이다.
물론, 열성적인 축구 팬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노스이스트에 바르샤가 온다는데, 이걸 놓친다는 건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침 이웃집에 선덜랜드 팬이 있길래 티켓 구매를 부탁했지만, 곧바로 거절당했다.
- 사람 말 알아듣고 똥오줌 알아서 가리는 개새끼 대기 중입니다. 제발 티켓 좀.
- 미안한데, 우리 애가 너무 가고 싶다고 해서···.
몇 년 놀렸더니 제대로 삐진 모양이다. 브렌든은 핸드폰에 침이라도 뱉을 듯한 기세로 내뱉었다.
“너 독신이잖아.”
그래도 차마, 매표소 앞에 밤새 줄을 설 자신까진 없었다. 별수 없이 중계라도 챙겨 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프리시즌 경기를 중계해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이웃집 선덜랜드 팬, 마일즈가 보낸 메시지였다.
- 선덜랜드 대 바르셀로나, 경기를 보는 또 다른 방법
“이 인간이 진짜···!”
처음엔 놀리는 건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영상 링크가 붙어 있다. 클릭하자 깔끔한 정장 차림의 청년이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 프리시즌 경기에, 상상 이상으로 많은 축구 팬 여러분께서 뜨거운 호응을 보여주셨습니다. 전부 다 모시지 못하게 되어서 너무나 아쉽습니다.”
들리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브렌든은 무심코 푸념했다.
“알면 어떻게 좀 해 봐.”
“하지만 우리에겐 축구 펍이 있지 않습니까?”
“중계도 안 해주는데 무슨 놈의 축구 펍···.”
“이번 3연전은, 선덜랜드 전 지역의 축구 펍에서도 영상으로 시청하실 수 있도록 제휴했습니다. 입구에서 FC 선덜랜드의 마스코트, 검은 고양이 인형을 확인하세요.”
눈이 확 뜨이는 소식이었다. 브렌든은 금방이라도 스마트폰 화면에 뛰어들 듯한 자세로 몸을 일으켰다.
“다만, 제휴 펍 또한 FC 선덜랜드 홈이라는 거 잊지 말아 주시고요. 드레스 코드 지켜 주시길 바랍니다.”
드레스 코드 이야기와 동시에 화면이 줌 아웃되더니, 장면이 바뀌었다. 동양인 미녀가 선덜랜드 레플리카 킷을 걸친 채 주먹 쥔 손을 흔들며 방긋방긋 웃는 모습으로.
어째 검지와 중지 쪽을 움찔움찔하는 게 좀 어색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풋풋한 매력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브렌든은 피식 웃었다.
홈 팀 유니폼 착용, 사실 그리 과한 요구는 아니다. 어차피 선덜랜드 지역의 축구 펍에선 뉴캐슬 유니폼은 입지도 못한다··· 혼자서 서른 명쯤 거뜬히 때려눕힐 자신이 있는 게 아니라면.
‘유니폼 한 벌 정도야, 못 살 것도 없지.’
그때 화면 속에서 선덜랜드 유니폼걸이 안내를 시작했다. 아나운서 뺨치는 매끄러운 발성이었다.
“멀리서 오신다고요? 걱정 마세요! FC 선덜랜드 제휴 호텔이 여러분을 기다리니까요! 티켓만 보여주면 즉시 할인! 입구에서 검은 고양이 인형을 꼭 확인하세요!”
어, 아무리 봐도 뉴캐슬보다 전망이 훨씬 밝아 보인다. 축구는 아직 뉴캐슬보다 못하지만, 프런트 일 처리 솜씨는 훨씬 나은 것 같다.
그리고 보통 프런트의 수준이 이 정도로 격차가 나면, 축구 실력도 곧 뒤집히기 마련이다.
첼시와 맨시티가 금방 빅클럽으로 올라선 것처럼.
“아, 그냥 나도 선덜랜드로 옮길까.”
올해 선덜랜드 시즌권은 이미 동이 났다. 내년을 기약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리그 원 경기부터 챙겨볼까 싶었다. 이번 레바뮌 3연전 끝나면, 티켓 구매를 다시 부탁해보자고.
브렌든은 그렇게 생각했다.
***
경기 날이 코앞으로 다가올수록, 분위기는 뜨거워졌다.
거리 곳곳에서 선덜랜드 유니폼을 걸친 사람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브라이언은 ‘마치 1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 며 눈시울을 붉혔다.
“아직 안 돌아갔어.”
“냉정하긴.”
“원래 구단 운영은 차가운 머리로 하는 거야.”
사실은 나도 며칠간 흥분으로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차가운 머리에는 항상 뜨거운 가슴이 따라붙는 법이니까.
경기를 사흘 앞두고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달밤에 산책을 나서기까지 했다.
아카데미 클럽하우스, 13년 전에 내가 머물던 유소년 기숙사 쪽으로. 굳이 의식하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발이 이쪽으로 움직였다.
이게 다 브라이언 탓이다. 그놈이 괜히 13년 전으로 돌아간 것 같다고 입방정을 떨었기 때문이겠지.
[브로는 반드시 프로가 될 수 있는 재능이거든.]
“틀렸어, 인마.”
나는 예전에 브라이언과 함께 쓰던 방, 기숙사 4층 13호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지금도 누가 쓰고 있는지, 불이 켜져 있었다.
그때였다.
“거기서 지금 뭐하는 검까!?”
축구선수라기보다 군인이 훨씬 어울리는 인상, 짧게 깎은 머리 아래 드러난 몸값 백팔십억 원.
팀의 로컬 보이, 잭 맥그리거가 어느새 내 코앞까지 달려와 씩씩거렸다.
“아저씨.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면 안 됨다. 쫓겨남다. 훈련장하고 기숙사는 외부인 출입 안 되는 곳임다.”
잭은 마치 랩이라도 하는 양, 속사포처럼 떠들고는 주위를 슥슥 둘러보았다. 마치 정찰 나간 사냥개처럼.
그리곤 잭은 곧바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기는 좀 이상한 각도로.
“하이파이브?”
“사인 필요해서 오신 거 아님까? 유니폼이나 공 같은 거 따로 없으면 그 티셔츠에 해 드림다. 제 사인 붙으면 당장 팔아도 백 파운드는 받을 검다.”
“꼭 그렇지는 않을 거야.”
나는 패션에 별 관심이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걸친 의류는 전부 희주가 골라다 주는 거··· 그러니까 죄다 백화점 명품관에서 가져오는 옷들이다.
그러니 아마 티셔츠 가격만 해도 몇백 파운드는 될 게 틀림없다··· 아, 혹시 값이 깎여서 백 파운드가 되는 건가?
“사인 필요 없슴까?”
“아니, 받지.”
장차 몸값 백팔십억 원, 그것도 팀의 프랜차이즈 스타가 될 로컬 보이의 사인이다. 몇백 파운드짜리 티셔츠를 사인보드 대신으로 써도 전혀 아깝지 않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티셔츠 아래쪽을 잡아당겨 내밀었고, 잭은 퍽 능숙한 손길로 사인했다. 연습 많이 한 것 같은 솜씨다.
“이름은 어떻게 되심까?”
“이희성. 그냥 썬이라고 하면 돼.”
그러자 잭의 손이 우뚝 멈췄다.
“그거, 저희 구단주님 이름 아님까?”
“맞아. 내가 새로 온 구단주야··· 그래도 사인은 마저 해 줘.”
그러자 잭은 잠시 머뭇거리면서도, 멋들어지게 사인을 마쳤다.
“많이 해봤나 봐?”
“연습했슴다. 아, 오해 마십쇼. 축구 연습은 따로 함다. 그저··· 지금은 팬들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사인밖에 없잖슴까.”
잭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분위기가 칙칙해지는 거 같아서 말을 돌렸다.
“그래서, 아카데미엔 어쩐 일이지? 팀 훈련은 진작에 끝난 시간일텐데.”
“친구 만나러 왔슴다. 저기 오네요. 야! 빨리 안 뛰어오냐!”
잭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자, 이십 대쯤 되어 보이는 청년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정말로 이십 대라면 유소년 기숙사에 머물 리가 없으니 실제로는 십대 후반이겠지. 꽤 겉늙어 보이는 타입 같다.
“고막 터지겠다. 옆에 계신 분은 누구셔?”
“우리 구단주님.”
“뭐···? 구단주님이 왜 여기서 나와?”
밤에 잠이 안 와서.
“처음 뵙겠습니다, 구단주님. 요니라고 합니다.”
요니, 들은 적이 있는 이름이다.
[마침 바로 다음에 소개할 선수가 패서긴 한데요. 요나스 뮐러라고··· 우리는 보통 요니라고 부르죠.]
“요니? 혹시 요나스 뮐러?”
“네, 풀 네임은 요나스 뮐러입니다.”
젠장, 겉늙어 보이는 게 아니었네. 유소년이 아니라 프로 선수였어.
나는 최대한 우호적인 미소를 지으려 노력하면서, 달빛 아래에 비친 요니의 이마를 흘끔거렸다.
가치는 이백칠십억 원. 순조롭게 성장한다면 빅클럽의 주전으로 활약할 수 있는 수준이다.
예전의 헨도만한 재능까지는 아니지만, 지금의 선덜랜드에서는 그야말로 특급 유망주다. 잘 키워야지. 망가뜨리지 말고, 다른 팀에 뺏기지도 말고.
“아니, 1군 선수가 왜 유소년 기숙사에···.”
“콜업된 지도 얼마 안 되었고, 제 주급으로 따로 숙소 구하기도 힘들어서 그냥 여기서 버티는 중이에요. 다행히 전에는 구단에서 흔쾌히 허락해 줘서···.”
차분하게 대답하던 요니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저, 혹시 짐 싸서 나가야 할까요?”
“네가 원하면 계속 살아도 돼. 기왕이면 평생, 선수 은퇴할 때까지 살게 하고 싶을 정도야. 다른 팀 못 가게.”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렇게 말하자, 요니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자 잭이 툴툴거리기 시작했다.
“빨리 돈 벌어서 시내에 좀 집을 구해. 그래야 내가 고생 덜 하지.”
“고생이라고?”
물어보자, 잭은 곧바로 자신이 메고 온 백팩을 가리켰다.
“야식 좀 싸 왔슴다. 컴버랜드 소시지임다.”
“구단주님, 쟤가 저렇게 멍청합니다. 독일인에게 영국식 소시지를 먹이려 들 정도로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요니는 정작 싫지는 않은 표정이었다. 이런 게 친구 사이라는 거겠지.
“구단주님도 같이 드심까? 넉넉히 싸왔슴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방 주인이 허락하면.”
요니는 물론 거절하지 않았다.
잠시 후, 우리는 나란히 요니의 방에서 영국식 소시지를 썰었다.
“식어도 맛있네.”
“그렇슴다. 집에서 만든 검다.”
“어머님 음식솜씨가 좋으신가 보네.”
“쟤네 어머님은 뭐든지 다 잘 만드시죠··· 아들만 빼고요.”
“제발 좀 닥쳐. 요니.”
“칭찬이야, 잭. 우리 어머니는 뭐든지 다 못 만드시거든. 아들만 빼고.”
두 사람은 잠시 그렇게 티격태격하더니, 어느새 사이좋게 소시지를 썰고 있다. 유스 시절부터 계속 함께해온 친구 사이, 당연히 호흡도 잘 맞을 것이다.
요니가 건넨 자우어크라우트, 그러니까 독일식 양배추 절임을 소시지에 얹어서 알뜰하게 먹어 치우는 잭의 모습만 보더라도, 둘의 친분은 짐작이 간다.
영국 애들은 소시지에 야채 잘 안 얹는 편이거든. 일단 브라이언은 절대 안 먹는다. 그놈은 김치를 거부한 적이 있다.
“근데 구단주님. 우리 올 시즌 목표는 뭠까? 올해는 승격 노릴 수 있슴까?”
그게 내 목표라고 대답하려던 참이었다. 이미 언론에 밝힌 것처럼 올해 챔피언십으로, 그리고 내년에는 프리미어리그로 연속 승격을 하겠다고.
하지만, 내 입이 떨어지기도 전에 잭이 먼저 한숨처럼 푸념했다.
“지난 시즌 마지막 경기 말임다. 원정 끝나고 돌아오는데··· 요만한 꼬마애가 우리 유니폼을 입고 우는 걸 봤슴다. 열 살도 안 됐을 검다. 그런 앨 우리가 울린 검다.”
군인 같은 잭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사인 정도는 얼마든지 해줘도 괜찮슴다. 팔 아파도 됨다. 어차피 스로인도 자주 안 하는 포지션 아님까? 그치만, 사인밖에 해줄 수 없는 선수가 되고 싶진 않슴다.”
옆에서 요니도 진지한 얼굴로 덧붙였다.
“저도 선덜랜드에서 오래 지냈습니다. 저한텐 제 2의 고향 같은 곳이죠. 얼굴 아는 서포터들도 많습니다··· 올해는 실망시키고 싶지 않군요.”
볼수록 마음에 든다. 3부에서 뛰긴 아까운 재능에, 어린데도 각 잡힌 멘탈까지.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이번 시즌은 다를 거야. 반드시 승격할 거고, 구단주로서 필요한 모든 지원을 다 해줄 생각이야.”
“감사함다. 사실 올 시즌은 저도 좀 기대하고 있었슴다. 감독님도 바뀌고, 프리시즌엔 그··· 바르샤도 부르고요.”
잭의 얼굴은 환하게 피었지만, 요니의 표정은 썩 밝지 않았다. 요니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바르샤는 그렇다 치고, 레알에 뮌헨까지 부르려면 엄청 비쌌을 텐데요. 재정은 괜찮은 겁니까?”
“본전 뽑으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긴 해.”
판이 커지면 오가는 돈도 커진다. 티켓값과 굿즈 판매, 그리고 각종 제휴 마케팅만으로도 본전 뽑을 자신이 있지만, 세상에 100%는 없다.
“그래도, 만에 하나 계산이 틀어져서 적자가 나더라도 후회는 없을 거야.”
나는 요니와 잭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백칠십억 원짜리 재능을 가진 천재와, 백팔십억 원짜리 로컬 보이를.
이 두 사람을 키우는 돈이라고 생각하면, 설령 적자로 끝나더라도 아깝지는 않다.
“팀을 키우는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비싸지 않은 투자거든.”
“우와, 방금 거 좀 멋졌슴다. 녹음하게 다시 말씀해주심 안됨까?”
“하지 마. 그냥 잊어버려.”
흑역사를 퍼트리고 싶진 않거든.
“선수가 기억해야 할 건 딱 세 단어뿐인데, 팀의 재정이나 구단주는 해당 없어.”
그러자 잭과 요니의 고개가 마치 미어캣처럼 쭉 늘어났다.
“세 단어요? 혹시 팬, 스코어, 포메이션입니까?”
“공, 라인, 포지셔닝?”
나는 대답 대신 웃기만 했다.
어차피 이번 3연전을 통해 배우게 될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