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팀을 만드는 방식 (4)
경기 당일, 선덜랜드 전역은 그야말로 붉은 물결로 뒤덮였다. 정확히는 빨갛고 하얀 세로 스트라이프 유니폼으로.
원정 경기를 위해 선덜랜드를 방문한 ‘축구의 신’ 은 그 광경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생각보다 훨씬 팬이 많네요.”
그러자 바르샤 감독이 옆에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뭘 새삼스럽게 그래. 캄 노우에 비하면 이 정도는 동네 구멍가게 수준이잖아. 경기장도 작고, 팬도 훨씬 적고···.”
“그야 캄 노우는 세계 최고니까요. 하지만 이곳 경기장도 크고 멋지네요. 3부 리그 팀이 이런 경기장을 쓰는 건 처음 봤어요. 이렇게 많은 팬을 불러모으는 모습도.”
“예전엔 1부리그 중하위권쯤에 있었을 거야.”
“언제요?”
“레오 네가 라 마시아에서 뛰던 시절? 쿠키 주워 먹고, 초콜릿 씹어먹고, 콜라 퍼마실 때.”
의표를 찌르는 가벼운 농담에 허를 찔린 메시는 잠시 웃었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그런데도 아직 팬이 이렇게 많이 남았을 정도면, 이 지역 사람들은 정말로 축구를 좋아하는 모양이네요.”
“그렇겠지. 유럽에서 안 그런 동네가 어디 있겠어.”
감독의 대답은 살짝 시큰둥한 느낌이었지만, 차창 너머의 거리를 둘러보는 메시의 표정은 누구보다 진지했다.
***
축구의 신이 두 번째로 깊은 감명을 받은 순간은, 드레싱룸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였다.
원래 원정팀용 드레싱룸은 각종 악의와 심술로 가득하기 마련이다.
홈팀 드레싱룸보다 훨씬 비좁고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 기본 상식. 바닥에 미끄럽게 광을 내거나, 옷걸이를 한참 위에 올려 까치발을 하게 만드는 일도 흔하다.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의 원정팀 드레스룸 역시 각종 심술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설계 당시부터 좁게 지은 것은 물론, 벽면 전체를 기괴한 색으로 얼룩덜룩하게 칠해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메시는 딱히 불쾌감을 느끼지는 않았다.
애초에 좁게 지어진 공간 자체는 어쩔 수 없더라도, 그 이외의 요소에서는 최대한의 환대하려는 성의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바닥엔 붉은 카펫을 깔아서 미끄러지지 않게 배려했고, 벽면 곳곳에는 바르샤 선수들의 포스터와 레플리카를 빽빽하게 걸었다.
사실상 홈팀에 준하는 대우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정성스러운 대접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환대 중에서도 가장 축구의 신을 감동시킨 포인트는, 드레싱룸 한쪽 구석에 설치된 작은 스크린이었다.
그곳에선 오늘 경기장을 찾은 팬들의 인터뷰 장면이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아 저요? 달링턴에서 왔어요! 오늘이 아니면 언제 축구의 신을 직접 볼 수 있겠어요?”
“누구를 제일 좋아하냐구요? 당연히 메시죠! 근데··· 오늘 정말로 뛰는 거예요? 딱 15분 만이라도 뛰면 좋겠는데···.”
“선덜랜드 팬이지만, 오늘 하루는 바르샤에게도 박수를 보낼 겁니다. 두 팀 모두 멋진 경기를 보여주면 좋겠네요.”
아마 편집을 거치긴 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바르샤에 호의적인 인터뷰만 담았을 게 뻔하다고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런 편집까지 포함해서 정성이라고, 메시는 그렇게 생각했다.
“제가 몇 분간 뛰게 되어 있죠?”
“선발 출전, 최소 30분 이상 뛰게 되어 있지.”
“그럼, 오늘은 하프타임 전까진 교체하지 말아 주세요. 여기 모인 사람들에게 최고의 축구를 보여줘야 하니까요.”
메시는 부드러운 손길로 벽에 걸린 자신의 레플리카를 쓰다듬었다.
블라우그라나의 10번, 세계에서 축구공을 가장 잘 다루는 선수의 상징을.
***
오늘 경기는 희주와 단둘이 보게 되었다. 익스클루시브 박스 한 개를 구단주 전용으로 개조했기 때문에.
덕분에··· 정말 분위기가 산만하다.
“또, 또 뚫렸어! 어떡해!”
“괜찮아, 그건 상수야.”
메시를 혼자서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전 세계를 뒤져도 한 줌을 넘지 않을 거다. 하물며 3부 리그인 우리 선수들로서는 당연히 돌파당하는 게 상식, 혹시라도 혼자서 막아내면 기적이다.
진짜는 이제부터다. 혼자서는 막을 수 없는 선수를 어떻게 팀 전체가 협력해서 막아내는지.
협력 수비는, 우리가 하려는 ‘수비 축구’ 의 시작이자 가장 기초가 되는 요소였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경기장을 내려다보았다.
첫 번째 수비를 볼 트래핑과 동시에 턴으로 제쳐버린 메시가, 곧바로 가속하며 두 번째 수비까지 따돌렸다.
완벽한 체인지 오브 페이스. 그리고 세 번째는···.
“그냥 스쳐 지났다고? 무슨 자동문이야?”
“저게 진짜 라 크로케타야.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수비를 따돌리는 거지.”
“그렇구나! 꺅! 방금은 빙글 돌았어!”
데자뷔가 느껴지는데, 기분 탓이지?
아무튼, 덕분에 나도 돌아버릴 것 같다··· 시끄러워서.
메시는 그렇게 내 눈앞에서 꼼꼼하게 우리 수비진을 학살했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저항한 선수가 잭과 요니였지만, 그렇다고 메시를 막아내지는 못했다.
돌파, 그리고 돌파. 영원처럼 이어지는 원맨쇼.
경기 시작부터 라인을 낮추고 중원을 내줬기에 공은 항상 바르샤의 차지였다. 공을 건네받은 메시는 몇 번이고 돌격해 들어왔고, 우리가 세운 수비벽은 그 앞에서 수수깡처럼 허물어졌다.
전반에만 2골 1어시스트. 완벽한 경기력에 우리 팬들은 당연하게도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그리고 경기는 5-0, 참혹할 정도의 대패로 끝났다.
하지만 관중석의 분위기는 밝았다.
애초에 아무도 선덜랜드가 이기리라고, 심지어 대등한 경기를 펼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유일하게 화가 난 사람은, 희주였다.
“아니, 대체 뭐가 좋다고 실실거려? 오빠, 저기 웃는 애들 보여? 2번하고 7번··· 얼씨구? 11번하고 15번 쟤들은 아주 유니폼 얻으려고 바르샤 벤치에 줄을 섰네?”
“그러게.”
“저게 선수야? 쟤들 용돈, 아니 주급 정지해! 1주간 주급 압수!”
“괜찮아.”
나는 짧게 대답했다.
“훨씬 좋은 걸 준비하고 있어.”
드라마 한 편 찍는 중이거든. 모처럼 TV 프로그램 제작사도 하나 샀으니까 말이지.
***
축구의 신이 세 번째로 감명을 받은 순간은, 원정 경기가 모두 끝나고 선덜랜드를 떠나려 했을 때였다.
전용 버스에 오르는 바르샤 선수들을 배웅하러 나온, 선덜랜드 구단 관계자들의 사이에, 정장 차림의 청년의 모습이 보였다. 선덜랜드의 새 구단주, 이희성이다.
메시는 천천히 몸을 돌려 이희성에게 다가갔다.
“미스터 프레지던트, 괜찮다면 딱 하나만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그러자 우호적인 미소와 함께 정중한 답변이 돌아왔다.
“삼백 가지도 괜찮습니다. 레오.”
“감사합니다··· 굳이 우리 바르샤를 상대로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꽤 부담스러운 개런티가 들어갔을 텐데요.”
“아, 이해합니다. 좀 더 수준이 맞는 상대가 있었겠지요. 지금의 우리는 3부 리그 팀이니까요.”
“무례하게 들렸다면 미안합니다. 이 팀의 수준은 최고였습니다. 프로페셔널한 프런트, 완벽한 시설, 열광적인 팬. 모든 면에서 훌륭한 적수였습니다. 그저, 선수들의 준비는 조금 부족했던 게 아닌가···.”
그러자 이희성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수비 축구로 전환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서요. 그래서 최고의 상대가 필요했습니다. 기술적으로도, 전술적으로도···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본받을 만한 상대가요.”
“즉··· 팀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비용은 전혀 문제가 아니라는 뜻이군요.”
“팀의 클래스나 성적은 돈으로 살 수 없지만, 최고의 스파링 파트너는 살 수 있으니까요.”
어렴풋이 예상하던 대답에, 메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축구를 시작한 이래, 블라우그라나 이외의 다른 유니폼을 동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캄 노우의 열광적인 팬, 클럽의 역사와 전통, 등에 걸친 붉고 푸른 유니폼. 지금의 메시를 축구의 신으로 만들어 준 모든 재료들.
하지만, 프런트의 수준이라면···.
몇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무패우승을 단 두 경기 남겨두었던 날, 느닷없이 만델라컵 친선 경기 일정을 들이밀던 바르셀로나 회장의 모습이.
[이런 이벤트 한 번이면 돈이 얼마가 움직이는 줄 알아? 그러니까 레오, 너는 다음 경기는 빠져. 문제는 없을 거야. 어차피 다음 상대는 레반테잖아?]
문제가 있었다.
바르샤는 레반테에 졌고 무패 우승의 대기록 또한 메시의 눈앞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메시에게는 결과를 뒤엎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명단에서 제외된 상태였으니까.
메시는 눈을 떴다. 그러자 여전히 부드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이희성의 모습이 보였다.
“할 수 있다면, 당신을 바르샤 회장으로 모셔오고 싶네요.”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이희성은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그저 웃기만 했다.
“그보다는 당신의 바이아웃, 오억 팔천만 유로를 제가 지불하는 게 빠를 것 같은데요··· 농담입니다. 돈은 얼마든지 있지만, 당신을 3부 리그에서 뛰게 하는 건 실례니까요.”
“아쉽군요. 그렇다면 다음엔 공식전에서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겠습니다··· 챔스에서요.”
그러자 이희성의 힘찬 대답이 돌아왔다.
“약속합니다. 그리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않겠습니다.”
정말로, 그리 긴 기다림은 아닐 것 같다고···.
축구의 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
일주일 뒤, 레알 마드리드전.
선덜랜드의 드레싱룸에서, 로저스 감독은 선수들을 향해 짧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도 특별히 할 말은 없다. 이기고 오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러니까 그냥 나가서 지고 오면 된다.”
그러자 예상대로의 반발이 돌아왔다.
“아니, 감독님! 그게 무슨 무책임한 말씀입니까? 아무리 상대가 레알이라지만···.”
“무책임? 내가 무책임하다고? 축구를 하겠다는 놈이 있어야 감독질을 하지.”
의도했던 대답을 끌어낸 로저스 감독은 일부러 보란 듯 코웃음을 치며 덧붙였다.
“너희들 중, 그동안 축구를 하던 놈이 있기는 했냐?”
로저스 감독은 선수들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 대신 리모컨을 눌렀다. 잠시 후, 드레싱룸 구석에 설치된 스크린에 영상이 떠올랐다.
FC 선덜랜드의 지난 시즌 실점 장면 모음이었다.
아니, 실점만이 아니었다. 영상은 잔혹하게도, 상대 선수들의 골 세레머니 장면까지 꼼꼼하게 담고 있었다.
자신들을 놀리려는 의도라고 생각한 선수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직접적으로 실점에 관여한 골키퍼 하퍼와, 수비진의 표정이 특히 험악했다.
그때, 화면이 점차 바뀌기 시작했다. 관중석의 붉은 유니폼, 선덜랜드의 서포터들에게로.
실점 장면마다 침묵하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돌리고, 욕설을 퍼붓는 팬들.
하지만, 영상 속의 팬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목 놓아 팀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그렇게 흘러간 영상은, 마침내 시즌 마지막 경기, 팀이 가장 무기력하게 무너졌던 브리스틀과의 경기를 화면에 비췄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점차 열광적으로 날뛰는 브리스틀 홈팬들의 푸른 물결 사이로, 고작 한 줌밖에 안 되는 붉은 유니폼이 꿈틀거렸다.
이미 경기가 기울었음에도, 마지막까지 저항을 멈추지 않던 서포터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리는 노인.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입술을 피나게 깨문 청년.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흐느끼는 아가씨. 나라 잃은 것처럼 우는 꼬마 팬.
그 팬들의 모습 위에 선덜랜드 선수들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지난주, 바르샤와의 친선 경기다.
메시에게 다섯 명, 여섯 명씩 한꺼번에 제쳐지고도 그저 웃는 선수들의 얼굴, 점수 차이가 벌어진 다음부턴 반쯤 멈춘 발걸음, 휘슬이 울리자마자 바르샤 선수들과 유니폼을 교환하러 줄을 서는 모습까지.
“이래도 너희가 하던 게 축구라고? 내가 보기엔 아닌데?”
어느새 선수들 사이의 웅성거림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다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달아오른 얼굴로 스크린을 응시할 뿐이었다.
“너희가 하던 걸, 세상에서는 보통 포기라고 부른다. 혹은 배신이나 도피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절대로, 저런 행위를 축구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울렸다.
“적어도 나는, 저걸 축구라고 부를 수 없다.”
“······.”
“다시 말한다. 오늘 이기고 오라고 말하지 않겠다. 지고 와라. 엉망으로 깨지고 돌아와라.”
침묵이 내려앉은 드레싱룸엔, 오직 노장의 목소리만이 힘있게 울렸다.
“다만 그저 축구를 하고 와라.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리기 전까진 죽어도 멈추지 마라. 발을 멈추지 말고, 집중력을 잃지 말고, 고개를 떨어뜨리지 마라.”
서슬 푸른 목소리에 선수 한 명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늙은 감독의 싸늘한 눈과 마주쳤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축구, 선덜랜드의 축구다. 너희가 앞으로 해야 할 축구이기도 하다. 대답은 오직 행동으로만 듣겠다.”
그리고 로저스 감독은 손을 들어 드레싱룸의 출구, 그라운드로 향하는 통로를 가리켰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치 무엇에 홀린 것처럼 경기장에 향하는 선수들이 존재했을 뿐이다.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단호한 발소리 이외에는 그 어떤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 어슴푸레한 빛줄기가 선수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Be the light]
통로 끝 저 멀리 보이던 빛이 조금씩 다가올 때마다, 걸음 소리인지 아니면 심장 소리인지 모를 울림 위에 차츰차츰 다른 소리가 덮이기 시작했다. 마치 화음처럼.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Sunderland `til I die.
그렇게 선덜랜드의 일레븐은 걸어 나갔다.
그라운드 안으로.
오늘도 어김없이 빛의 경기장,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를 가득 메운 뜨거운 함성 속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