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팀을 만드는 방식 (5)
경기장으로 나서는 우리 선수들은 하나같이 전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기대했던 대로의 모습이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를 감지한 희주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빠, 오늘은 뭔가 분위기가 다른데? 역시 금융치료 한 거야?”
“아니.”
“그럼 설마··· 물리치료!?”
“되겠냐? 선수들 상대로.”
돈다발로 패는 거 말고는 자신 없다.
“흐음. 요 며칠 영상팀을 들들 볶던 거 같은데. 혹시··· 비디오, 비디오 찍은 거구나? 비밀스러운 비디오!”
“너는 기집애가 못 하는 소리가 없어.”
따지고 보면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 표현하니까 괜히 수상하잖아.
희주가 혀를 내밀었다.
“에헤헤. 그래도 다들 표정이 좋으니 다행이다. 오빠 표정이랑 비슷해. 오늘은 이길 것 같아.”
내 표정이 평소에 저렇게 험악했나? 전에 얼핏 연쇄살인마 같단 소리를 들은 적이 있긴 한데···.
그리고 사실, 이기지도 못할 테고.
투지만으로 승리를 가져올 만큼 쉬운 상대는 아니었다. 레알 마드리드는 바르셀로나 이상으로 막강한 팀이었기에.
비록 축구의 신이라 불릴 만한 대선수는 로스 블랑코스에 없지만, 스쿼드 전체를 따지면 바르샤보다도 훨씬 화려하고 압도적이었다.
그러니까 오늘도 지겠지.
그래도 괜찮다. 선수들이 무언가를 얻어갈 수 있다면, 내일로 이어지는 패배를 만들 수만 있다면.
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킥오프를 앞두고, 잭은 자신의 오랜 파트너 요니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요니, 지금 기분이 어때? 난 죽고 싶었는데.”
“우린 비디오 안 찍혔잖아.”
“내가 거기 찍혔으면 그냥 혀 깨물었지.”
사실 오늘 로저스 감독이 지적했던 장면은, 그동안 잭과 요니 또한 아쉽게 느끼던 부분이었다.
물론 선덜랜드의 모든 동료가 프로페셔널하지 않았던 건 아니다.
예를 들어 골키퍼 에드워드 하퍼나, 주전 공격수 빌 크리그 같은 선수는 그야말로 프로다운 선수들이었다.
끝나기 전에 경기를 포기하거나, 참패한 다음 남의 유니폼 얻겠다고 헤실거리는 모습 따위는 단 한 번도 보인 적이 없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크리그는 비록 프로답긴 하지만, 구단 유소년 출신인 잭과 요니만큼 구단에 대한 애정이 있어 보이진 않았고, 하퍼는 성격이 거칠어 남들과 어울리는 타입이 아니었다.
덕분에 다른 선수들은 한껏 풀어진 모습을 보였다.
그런 동료들의 모습이 못마땅했지만, 잭과 요니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두 사람은 어린 선수였고, 선수단 사이에서 영향력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새 프런트는 고작 한 경기만에 팀의 문제를 파악했고, 가장 드라마틱한 방법으로 지적해 주었다.
“이제부턴 다들 빡세게 뛰겠지?”
“오늘은 그렇겠지. 앞으론 장담 못 하지만··· 몸에 밴 습관은 쉽게 바뀌지 않으니까.”
“뛰라고 독려하는 것보단, 같이 뛰자고 하는 게 낫겠지?”
“그보단 우리부터 앞장서서 뛰는 게 더 낫고.”
요니와 이야기를 나누며, 잭은 결심을 굳혔다.
“있잖아, 요니. 점유율도, 중원도, 공도 전부 내주는 전술이지만, 그래도 바이털 에어리어는 내주지 말자. 어때?”
“레알 상대로? 그거 참··· 정신 나간 생각인데.”
레알 마드리드의 중원은, 현세대 최강의 중원을 논할 때 후보에 항상 거론되는 조합이었다.
3부 리그 선덜랜드의 중원, 그것도 이제 겨우 20대 초반의 애송이 둘이 상대하는 것만으로도 무모하기 짝이 없는 계획, 하물며 바이털 에어리어를 내주지 않겠다는 건 만용에 가깝다.
요니가 히죽 웃으며 덧붙였다.
“기왕 미칠 거면 좀 더 미쳐봐야지. 오늘 이 경기에서 로스 블랑코스의 중거리 슛은 없다··· 는 정도면 어때?
“미친놈.”
마찬가지로 히죽 웃으면서, 잭은 요니의 어깨를 두드렸다.
잠시 후, 두 사람에게서 합창같은 외침이 터져나왔다.
““오늘, 제대로 한번 미쳐보자!””
***
경기는 내 예상대로 레알 마드리드의 우세로 흘러갔다. 우리 선덜랜드 선수들은 하프라인조차 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얻어맞았고, 경기 시작 7분 만에 선제골을 내주었다.
코너킥 상황에서의 실점에, 옆에서 희주가 분통을 터트렸다.
“아 진짜! 무슨 7분 만에 골을 내주냐? 표정은 꼭 슈퍼히어로들처럼 짓더니만."
“아직 세트플레이까진 맞추지 못했으니까.”
로저스 감독과 브라이언 코치 체제로 팀이 개편된 지 이제 겨우 3주, 두줄 수비를 몸에 익히는 것만으로도 버거운 시간이었다. 세트플레이 수비까지는 익힐 겨를이 없었다.
코너킥을 내준 게 일종의 사고였다면, 세트플레이에서의 실점은 지금의 우리에겐 세금 같은 것이다.
애초에 승리를 바라는 경기가 아니었기에, 실점에도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그저 유일하게 신경 쓰이는 건, 혹시라도 이른 시간의 실점이 기껏 끓어오른 선수들의 투지에 찬물을 끼얹게 되는 것이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내 기우였다. 실점 이후에도 우리 선수들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고, 마치 0-0인 것처럼 뛰었다.
스트라이커 크리그는 상대 센터백이 공을 돌리지 못하도록 쉼 없이 견제했고, 잭과 요니는 바이털 에어리어를 틀어막았다. 필드 플레이어 전원이 선보인 육탄 방어에, 골키퍼 하퍼는 신들린 선방으로 화답했다.
여전히 경기는 일방적이었고, 축구계 최강의 로스 블랑코스가 쉼 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하지만 전반이 끝날 때까지 스코어보드는 움직이지 않았다.
후반을 맞이한 레알은 곧바로 경기에 변화를 주었다.
교체되어 들어오는 레알의 8번, 14번 유니폼을 바라보며 희주가 으르렁거렸다.
"후보 내려나 봐! 의무출전 시간 대충 채웠다 이거지?"
"아니, 쟤들이 주전이야."
크로스와 카세미루. 로스 블랑코스가 자랑하는 미드필더이자 팀의 핵심 선수들이다. 즉, 후반전의 레알은 아주 작정하고 나섰다는 뜻이다.
아마 자존심 문제겠지. 3부 리그 팀, 그것도 지난주에 라이벌 바르샤가 5-0으로 짓밟은 팀 상대로 천하의 레알이 전반에 겨우 1점밖에 올리지 못한 거니까.
그렇기에 레알의 공세는 전반보다 훨씬 더 거세졌다.
전광판의 시계가 67분을 가리킬 무렵, 카세미루와 깔끔한 원투 패스를 주고받은 크로스가 곧바로 바이털 에어리어로 파고들었다.
절묘한 플레이였다.
패스 마스터라 불리는 크로스의 시야는 말할 것도 없지만, 이번에는 카세미루의 플레이 또한 절묘했다. 너무 멀지도, 아주 가깝지도 않은 완벽한 위치를 차지했다.
덕분에 잭이 완벽하게 유인당했다.
하지만 우리 선수들도 속수무책으로 무너진 건 아니었다. 레알의 15번, 발베르데를 견제하던 요니가 재빠르게 몸을 돌려 크로스를 추격했다.
그 모습에, 무심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만큼 요니의 움직임 또한 절묘했던 것이다.
만일 요니가 곧바로 크로스를 마크했다면, 크로스는 그냥 발베르데에게 패스해서 노마크 상황을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니의 위치는 두 사람 사이의 어느 중간쯤이었고, 비록 크로스를 완벽히 마크하지는 못했지만, 발베르데에게 향하는 패스 루트를 열어두지도 않았다.
[패서긴 한데요. 요나스 뮐러라고··· 우리는 보통 요니라고 부르죠.]
쟤가 우리 패서라고?
아니다. 아닐 거다. 물론 저 정도 공간지각력이 있다면 그야 패스도 잘하겠지.
그렇지만 요니는 자기가 직접 공간을 찾아 움직일 때 진가를 발휘할 선수다. 공간에 침투하는 동료에게 패스를 찔러줄 때가 아니라.
언젠가 우리가 라인을 올릴 수 있을 때. 맞불을 놓을 수 있을 때 훨씬 더 피어날 재능이겠지.
이윽고, 크로스를 따라잡은 요니가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했다. 비록 크로스에게서 공을 따내지는 못했지만, 슛 타이밍을 한 템포 늦추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태클을 피하는 동작, 고작 한 템포의 차이였지만, 끌려나갔던 잭이 복귀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크로스의 슛 동작에 맞춰 잭이 몸을 날렸고, 다음 순간 퍽-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공이 하늘로 떠올랐다.
눈앞에서 펼쳐진 기적적인 수비에, 저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그때, 희주가 새된 소리를 냈다.
"어떡해! 얼굴로 막았나 봐!"
희주가 가리킨 곳에서, 선덜랜드의 18번이 그라운드 위를 힘없이 구르는 중이었다. 잭이다. 잭이 얼굴을 감싸고 있다.
"이런 빌어먹···."
숨이 멎을 것 같다. 당장이라도 경기장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하지만 잠시 후, 잭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났다.
스크린이 온통 피범벅이 된 잭의 얼굴을 비췄다. 그런데도 잭은 뭐가 좋은지 히죽거렸다. 피칠갑을 한 얼굴로 웃으니 꼭 스릴러 영화에 나올 것 같다.
“입술만 좀 터진 검다! 괜찮슴다!”
잭은 곧바로 유니폼 상의를 끌어 올려 입가를 대충 닦아내고는, 관중석 쪽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런 잭의 곁에서, 요니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아니, 좀, 데굴데굴, 구르지. 숨, 좀, 고르게."
“멍청아, 지는 팀이 시간 끌어서 어쩌게. 그리고 우리 축구는 계속 뛰어야 하는 거잖아.”
잠시 후, 요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잭을 뒤따라 달렸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무릎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나는 구단주인데, 팀을 다시 강하게 만들 생각만 해야 하는데.
이길 수 없는 상대를 데려와 선수들을 담금질하고, 누구를 남기고 누구를 내보낼지 판단해야 하는데, 다가올 새 시즌을 구상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머리를 차갑게 유지해야 하는데.
다 아는데도 자꾸만 가슴이 뜨거워져서 견딜 수가 없다.
젠장. 축구는 이래서 심장에 좋지 않아. 사람을 미쳐버리게 하거든.
미친 듯이 달리는 선수들, 한층 더 목소리를 높이는 서포터, 옆에서 날뛰기 시작한 희주.
어느새 나 또한 목놓아 외치고 있었다.
We are Sunderland. Say we are Sunderland. Sunderland `til I die.
***
휘슬이 길게 세 번 울렸다.
선덜랜드의 18번, 미드필더 잭 맥그리거는 천천히 발을 멈춘 채 스코어보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3-0이라는 점수가 눈에 들어왔다. 패배의 증거물이다.
선덜랜드는 후반에 두 골을 더 내주었으며, 점수를 올리지는 못했다. 분투했지만 그래도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극복할 수는 없었다.
잭은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관중석의 팬들이 하나둘씩 일어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패배에 실망했을 테니, 빨리 돌아가고 싶은 거겠지.
잭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때 레알의 미드필더, 크로스가 다가왔다.
“헤이, 넘버 19! 유니폼 바꾸자.”
19번이라면, 요니다.
크로스는 이미 자기 유니폼을 벗어든 채였지만, 요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대답하지 못했다는 게 정확하다. 그라운드에 축 늘어진 요니는 대답 대신 힘없이 눈만 깜빡거렸다.
잭이 대신 대답했다.
"죄송함다. 이 친구가 정신을 못 차려서요."
"그럼 좀 기다리지."
그러자 발베르데가 옆에서 곧바로 항의했다.
"아니, 선배님! 19번은 제 껀데요. 제 마크맨이잖아요."
"내 마크맨이었는데?"
옥신각신하는 크로스와 발베르데를 바라보던 잭이 낮게 덧붙였다.
"그야 당연한 거 아님까. 그쪽은 다이아몬드 4-4-2였고, 우린 플랫 4-4-2니까 번갈아 막아야죠. 덕분에 이놈 완전히 죽었슴다. 죄송함다. 유니폼은 못 드릴 것 같슴다."
"그럼 네 거는?"
카세미루였다. 크로스와 마찬가지로 이미 벗어든 자신의 유니폼을 잭에게 내밀고 있다.
로스 블랑코스의 14번, 미드필더라면 누구나 탐낼 만한 유니폼이다.
하지만 잭은 고개를 저었다.
"죄송함다. 제 유니폼은 보시다시피 피가 묻어서요."
"어, 그래서 더 가치가 있는 건데···."
"그건 또 무슨 특수한 취향임까? 그리고··· 유니폼은 나중에 좀 더 좋은 축구 했을때 부탁드림다. 오늘은 도저히 팬들 보기 미안해서 유니폼 못 바꿈다."
잭의 대답을 들은 카세미루의 표정이 기묘하게 일그러졌고, 발베르데는 입을 쩍 벌렸다. 그리고 크로스는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크로스의 손이 관중석 쪽을 가리켰다. 손짓을 따라 시선을 돌리자, 관중들의 모습이 잭의 눈에 들어왔다. 진작에 자리에서 일어났으면서, 아무도 경기장을 떠날 생각이 없는 팬들이.
어쩐지 손동작이 이상하다. 꼭 먼지라도 터는 것처럼.
잭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분들, 지금 안 나가고 뭐 하시는 검까?"
"뭐긴, 기립박수지."
크로스가 웃으며 덧붙였다.
"너희에게 보내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