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변화의 바람 (1)
<언론은 스피드와 통찰을 혼동한다 - 요한 크루이프>
경기를 마치고도 좀처럼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다. 그만큼 오늘 경기는 훌륭했고, 또 만족스러웠다.
희주 또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있잖아, 오빠. 나, 처음으로 이 팀을 잘 샀다고 생각했다?”
“참 좋은 소식이긴 한데··· 네가 산 건 아니잖아.”
“대충 칭찬으로 받아들여.”
배시시 웃는 희주의 볼은 아직 상기된 채였다. 자세히 보니 호흡도 조금 거칠다.
하긴 오늘 희주는 경기 내내 옆에서 아주 미친 듯 날뛰었다. 희주와 같이 축구를 본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이 녀석이 이렇게 몰입하는 모습은 처음 봤다.
그래도 슬슬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이렇게 좋은 경기를 한 이후일수록, 구단 관계자의 일은 늘어날 테니까.
“자, 그럼 사무실로 돌아가자.”
“왜? 어째서? 경기 끝난 직후인데?”
“선수들은 경기 끝나면 쉴 수 있지만, 구단주 업무는 안 끝났거든.”
“어, 그 말은···.”
“당연히 구단주 비서도 못 쉰다는 뜻이지.”
“으으, 너무해.”
희주는 가볍게 몸서리치며 툴툴거렸지만, 별다른 저항 없이 사무실로 향했다.
“그럼 구단주님, 어떤 업무를 도와드리면 될까요?”
“우선 경비 인력을 충원해야겠지.”
“하긴, 오늘 보니까 좀 부족해 보이더라. 관중이 엄청 늘었잖아.”
바르샤, 그리고 레알이라는 빅클럽을 초청한 덕분이긴 하지만, 지난 시즌과 비교하면 거의 두 배 가깝게 늘어났다.
티켓박스 쪽 직원이나 경비팀이 전반적으로 오버워크 상태다. 다들 베테랑이라 아직까진 잘 버텨주고 있지만, 언젠가는 한계에 달할 게 틀림없다.
투지 넘치는 축구가 취향이지만, 그렇다고 구단 운영까지 정신론을 들이밀고 싶지 않다.
“곧바로 추가 채용 공고 낼게. 그리고?”
“잔디 관리 인력을 보강해 줘. 전문가로.”
지금까지는 잔디를 신경 쓰지 않았다. 바르샤나 레알 상대로는 그저 엉망으로 두들겨 맞고 깨지길, 그 와중에 무언가를 깨닫길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다가올 뮌헨전부터는 경기의 디테일도 신경 써야 한다.
경기 준비와 전술은 감독이 하고, 경기는 선수가 한다면, 구단주로서는 그 이외의 요소에서 팀의 경기력을 끌어올릴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축구장의 잔디 길이와 습도는 전적으로 홈팀의 경기 스타일과 취향에 맞춰 세팅된다. 축구계에서는 원정팀 드레싱룸에 부리는 심술 이상으로 악명 높은 텃세다.
“잔디 전문가··· 알았어, 알아볼게. 또?”
“야식 2인분. 브라이언이 오늘 야근 확정이거든. 혼자만 고생시키면 미안하니까 같이 있으려고.”
그러자 희주가 웃었다.
“그럼 3인분 준비할게.”
***
희주가 준비한 야식은 치킨, 그것도 무려 코리안 프라이드치킨이었다. 양념이 뚝뚝 떨어지는 시뻘건 놈이다.
도대체 이걸 어디서 구해왔는지 나로선 짐작도 안 간다.
“브로, 이 시뻘겋고 끈적한 닭튀김의 비주얼은 좀···.”
“참고로 희주가 준비한 거야.”
“비주얼만 봐도 아주 군침이 돈다는 뜻이었습니다, 레이디··· 어, 이거 맛있네!”
처음엔 생소한 비주얼에 망설이며 조심스레 입을 대던 브라이언이었지만, 일단 치킨에 입을 대자 거침없었다.
브라이언은 한참 동안 볼이 미어지도록 치킨을 우물거렸고, 그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던 나와 희주 역시 참전했다.
잠시 후 치킨 세 마리는 처참한 잔해로 변했고, 거의 손도 대지 않은 치킨무와 닭뼈만 남았다.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던 브라이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브로, 그래서 오늘은 무슨 이야기가 하고 싶은 거야?”
“팀을 슬슬 다음 단계로 끌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일방적으로 가드 올리고 얻어맞기만 하는 축구로는 이길 수 없잖아?”
“하긴, 슬슬 때리는 법도 배워야겠지··· 그런데, 뮌헨 상대로?”
“막으면서 때릴 줄 알아야 하니까. 때리는 법 자체는 이미 라일 파커 시절에 익혔을 테니까."
진정한 수비 축구는, 단단한 방어에 날카로운 역습이 더해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바르샤와 레알 상대로는 맞는 법을 배웠으니, 이제부터는 얻어맞는 와중에 반격하는 법을 배울 차례다.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일주일 만에 반격하는 법을 익혀야 한다니, 스케줄이 너무 빡빡하잖아. 진짜 사람 험하게 쓰네.”
“프리시즌 계획 잡을 땐 별말 안 했잖아.”
"그야 레바뮌 세 팀을 모두 만날 줄은 몰랐거든. 아무리 그래도 한 팀 정도는 일정 조율이 안 되는 게 보통 아니야?”
"그러게. 희주 쟤가 생각보다 훨씬 유능하네.”
"에헤헷."
습관처럼 손으로 브이자를 그려 보이려던 희주가 재빨리 주먹을 말아쥐었다.
“그러게, 브로. 여동생이 유능한 건 진작 알았는데, 그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네. 대학생이라고 하지 않았어?”
"그야, 쟤는 경력 10년차거든."
브라이언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제 겨우 이십 대 초반의 대학생인 희주에게 어떻게 10년 차 업무 경력이 쌓일 수 있는지 미심쩍은 거겠지.
희주가 냉큼 대답했다.
"오빠 돈 퍼다 쓴 경력이요. 돈 쓰는 거 하나는 완전 자신 있어요."
대답을 들은 브라이언이 그야말로 시원하게 폭소했다.
“하긴, 레이디 아닌 다른 사람이었으면 일정 못 잡았을 수도 있겠네요. 프리시즌에 레바뮌을 부르는 것은 꽤 부담스러운 금액이 들어가니까요.”
“그렇지. 구단주가 아무리 돈 써도 된다고 허락해 줘도, 정말로 시원하게 지를 수 있는 사람은 아주 드물거든.”
칭찬 아닌 칭찬을 들은 희주가 뿌듯한 표정으로 가슴을 폈다.
“그런 의미에서 오빠, 또 뭐 지를 거 없어?
“곧 생길 거야.”
나는 희주 대신, 브라이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그러자 브라이언이 쓴웃음을 지었다.
“브로, 그 전에 하나만 물어보고 싶은데··· 이번에 준비한 영상 말야. 그것만으로 우리 선수들 모두가 마음을 고쳐먹을 거라고 믿었어?”
“역시 몰카였어! 비밀스러운 비디오···!”
희주가 쓸데없는 추임새를 넣었다.
이럴 땐 입에 치킨을 밀어 넣으면 효과가 좋지만, 진작에 다 먹어 치웠다. 아쉬운 대로 치킨무 한 조각을 대신 밀어 넣은 다음 대답했다.
“그야 확신은 없었지. 몇 명이나 반응할지도 알 수 없었고. 다만 두 가지는 염두에 두고 있었어.”
“두 가지?”
“우선, 우리 교관님이라면 틀림없이 그 영상으로 선수들 눈물을 쏙 빼놓을 수 있을 거라고 믿었지.”
“다른 하나는?”
“그 영상을 보고도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선수라면 우리 팀에 필요 없다고 생각했어.”
그러자 브라이언이 눈을 감았다. 이제부터 시작될 내 이야기를 짐작이라도 한 것처럼.
“그래서 말인데, 브라이언. 팀에 필요한 선수가 있어? 불필요한 선수는?”
“그건 감독님이 판단하셔야 할 문제라고 생각하는데···.”
브라이언이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곤란한 질문이라고는 생각한다.
브라이언은 보기보다 정이 많고, 싫은 소리도 못 하는 타입이다. 파커 같은 악질 감독 밑에서 시달리면서도, 술에 취하기 전까지는 험담하지 않았을 정도로.
하물며 몇 년간 같이 울고 웃었던 선수들에 대해 냉혹한 이야기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도 브라이언의 의견을 들어야만 했다.
코치진 전체가 물갈이된 상황, 심지어 새로 부임한 로저스 감독은 팀에 온 지 이제 겨우 한 달 남짓이니까.
선수단에 대해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사람은, 현재로서는 브라이언 혼자일 것이다.
“당연히 결정을 내리기 전에 감독님과 의논할 거고, 최종적으로는 내가 판단할 거야.”
몇 번이나 추궁하자, 브라이언은 한참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내 생각엔 골키퍼 문제가 좀 신경 쓰이는데···.”
치킨무를 우물거리던 희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골키퍼는 두 경기 모두 완전 날아다녔잖아요. 다른 수비수는 잘 보이지도 않았··· 콜록, 콜록.”
말하다 치킨무가 얹혔는지 가슴을 탕탕 두드리길래, 콜라를 건네주자 기쁘게 받아든다.
“하긴, 골키퍼 혼자 너무 눈에 띄긴 하더라. 의사소통은 별로 없고.”
“평소에도 그래. 수비진 잘못일 수도 있지만, 감독님과 의논해 볼 필요는 있을 거 같아.”
“알았어. 그리고?”
브라이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정말로 대답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이었다.
약간의 침묵이 흐른 다음, 브라이언이 한숨처럼 내뱉었다.
“나는 조금 더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공격진이 제일 심각하겠지. 몇 경기 동안 계속 골을 넣지 못하고 있으니까.”
예상했던 대답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바르셀로나전,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전을 치르는 동안 FC 선덜랜드의 분위기는 확실히 변했다.
관중이 늘어나고, 그에 맞춰 직원도 늘어나면서 구단 곳곳에 활기가 넘쳤다.
선수들 역시 의욕적으로 변했다.
“감독님··· 상대 공격수를 도저히 혼자선 못 막겠습니다. 좋은 방법이 없을까요?”
얼마 전까지였다면 체념이나 포기에 가까운 발언이겠지만, 지금은 아니다. 돌파당하는 분함, 그리고 바뀌려는 의지가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로저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자료부터 보면서 이야기하겠다.”
시선을 받자, 곧바로 오늘의 일일 오퍼레이터 희주의 손이 경쾌하게 움직였다. 잠시 후 아카데미 오브 라이트의 브리핑 룸 한쪽 벽면 전체를 영상이 가득 메웠다.
지난주의 바르셀로나전, 그리고 레알 마드리드전.
공중에서 내려다본 화면부터, 선수를 옆에서 보는 장면··· 경기를 온 사방에서 다각도로 촬영한 영상이었다.
전문 영상팀, 그리고 축잘알 브라이언을 갈아 만든 웅장한 결과물에 선수들이 숨을 삼켰다.
“감독님··· 이게 뭡니까?”
“말했잖아. 우리 구단주가 촬영팀을 따로 샀다고.”
선수 몇 명이 내 쪽을 흘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치자 곧바로 찔끔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화면을 주시한다.
로저스 감독이 미소를 지었다.
“지금 보는 장면은 메시의 선제골 상황인데··· 어떤 생각이 드나?”
곧바로 대답이 돌아왔다.
“중심이동이 정말 깔끔하네요.”
“저땐 메시가 페인트 한 번을 넣었다고 생각했는데, 영상으로 다시 보니 세 번이네요. 어깨 움직임과 시선이요. 너무 자연스러워서 조금 전까진 눈치조차 못 챘습니다.”
“사람이 아닌 거 같습니다.”
이대로라면 끝도 없이 찬양이 이어질 것 같았는지, 로저스 감독이 헛기침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생각에도 메시는 반쯤은 사람 아닌 것 같거든. 그렇다고, 메시 혼자서 우리 팀 전원을 전부 제치고 골을 넣지는 않는다. 왜 그럴까?”
선수들이 조용해졌고,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만이 브리핑 룸에 울렸다.
“화려한 개인기에 속지 마라. 축구장 전체를 읽어라. 바르샤 5번이 평소보다 아래로 내려가 공을 돌리며 잭을 끌어낸 장면은 왜 아무도 언급하지 않지?”
“···.”
“14번이 하프스페이스를 따라 움직이며, 요니를 옆으로 치워버리는 모습은?”
노골적인 움직임은 아니었다. 기껏해야 2미터 아니면 3미터쯤 움직였고, 잭과 요니는 1미터쯤 따라갔을 뿐이다.
하지만 메시에게는 그 1미터의 틈이면 충분했던 거다. 축구의 신이니까.
요니가 손을 들었다.
“그러면 제가 따라 나가지 않는 게 나았을까요?”
“정확히 말하자면, 혼자서는 따라가지 말았어야 했다. 수비진 전체가 블록처럼 움직였어야지. 물론 더 좋은 건, 애초에 14번이 하프스페이스를 노리지 못하게···.”
로저스 감독이 피드백하면, 다시 선수들의 질문이 이어진다.
그렇게 분석과 토론은 몇 시간 동안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이어졌다.
“진부한 이야기일지도 모르지만, Team에 I라는 글자는 없다. 열한 명 모두가 수비에 대한 강한 의식을 가질 때 비로소 우리 선덜랜드의 축구가 완성된다.”
“네!”
“오후부터 뮌헨전 대비한 훈련을 시작하겠다··· 그 전에,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봐야 할 영상이 있다. 레알 마드리드전이 끝난 직후, 우리 팬들의 모습이다.”
그러자 선수들의 몸이 움찔거리며 굳었다. 무리도 아니다. 눈물을 흘리는 서포터의 모습을 보여준 게 불과 어제 일이었으니.
다행히 오늘 준비한 영상은 단맛 버전이다.
[오늘은 진짜 소름 돋더라.]
[올해는 다를 것 같지 않아?]
[매주 이런 경기를 볼 수 있다면 시즌권 질러도 안 아까울 텐데.]
[시즌권은 진작에 매진이야, 멍청아.]
경기장을 떠나는 팬들의 훈훈한 반응에, 선수들의 얼굴엔 미소가 돌아왔다. 로저스 감독의 표정 또한 부드러웠다.
“지난번 레알 마드리드전에 임하는 여러분의 자세는 흠잡을 데 없었다. 팬들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경기였다.”
인자한 표정으로 선수단을 바라보던 로저스 감독이, 표정을 고쳤다.
“하지만 패배는 패배다. 뮌헨전에서는 좀 더 나아진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오늘부터는 연습할 때 홈 유니폼을 입는다. 갈아입고 모이도록.”
로저스 감독의 독려에, 우리 선수들은 기세등등하게 움직였다.
단호한 표정, 의욕이 넘치는 발걸음. 뮌헨이라는 강팀과의 대결을 앞두고도, 조금도 기죽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붉은 유니폼의 거친 물결.
그 가운데, 유일하게 표정이 어두운 선수가 한 사람 존재했다.
스트라이커 크리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