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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2화 (22/422)

22화 변화의 바람 (2)

팀 연습이 끝나고 선수들이 모두 돌아간 다음에도, 크리그는 혼자 남아 있었다. 묵묵히, 주위의 시선조차 신경 쓰지 않고서.

크리그의 슛은 예리했고, 동작은 간결했으며, 궤적은 항상 크로스바 아래쪽을 빠듯하게 지났다.

슈팅 기술 하나만 보면, 프리미어리거라고 해도 믿을 정도다.

다만 그 외의 테크닉은 특출나지 않다. 게다가 육체적으로 출중한 것도 아니다.

워낙에 노력가니까 몸 관리 자체는 잘했지만, 프로 선수들 사이에서는 흔한 수준일 뿐이다. 타고난 체격 조건 자체가 평범하니까.

슛 이외의 다른 재주가 없는 선수. 팀에서 찬스를 만들어줘야 하는 스트라이커.

“몸만 보면, 오빠랑 비슷한 정도 같은데?”

“그건 크리그에게 너무 실례고.”

그동안은 크리그에게 기회가 돌아오지 않았다. 전임 감독 파커는 고의로 크리그에게 찬스를 주지 않았고, 그를 미끼 용도로만 활용했다.

지금의 코치진, 로저스 감독과 브라이언에겐 크리그를 잘 다룰 능력이 있겠지만, 대신 최근엔 팀의 전술 자체가 역습 축구로 바뀌었다.

덕분에 브라이언도 골머리를 썩이는 중이다.

“그나저나 괜찮아? 팀 훈련도 했던 거지? 그럼 슬슬 오버워크 아니야?”

“그렇겠지.”

슬쩍 다가가 말을 걸었다.

“크리그 선수?”

“아, 구단주님.”

크리그는 잠시 연습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지만, 그렇다고 딱히 연습을 그만두려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당장이라도 다시 공을 걷어차려길래, 재빨리 덧붙였다.

“쉬는 것도 프로의 일입니다.”

“제 일은 골을 넣는 건데요. 그걸 못해서 연습하는 건데요···.”

기어이 한 차례 더 슛을 꽂아 넣은 다음에야 크리그는 천천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선수를 갈아치우는 건 구단주님의 일이겠죠. 다들 신경 쓰고 있더군요. 누가 팀을 떠나고 누가 남을지.”

“그렇겠죠. 프리시즌이니까요.”

프리시즌이라는 말은, 대충 여름 이적시장이 열렸다는 말과 동의어로 써도 무방하다.

“구단주님은 프리시즌 파트너로 레알과 바르샤, 뮌헨을 부를 수 있는 분입니다. 적어도 돈 때문에 원하는 선수를 못 데려올 가능성은 없겠죠. 예전과는 다르게요.”

예전, 전임 구단주 로널드 시절의 이야기다. 당시, 팀의 재정은 파탄 직전까지 몰려 있었다.

그 로널드가 사 온 가장 비싼 선수가 바로 크리그다. 당시 리그 원 사상 최고액의 이적료를 치렀다.

“돈값을 못하는 것 같아서 부담스럽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니··· 사실 모든 게 부담스럽습니다. 골을 전혀 넣지 못하는 저 자신도, 이전 감독님이 요구하던 찬스메이커 역할도, 지금의 팀이 추구하는 전방 압박도요.”

하긴, 크리그는 슛 기술 이외에는 전부 평범한 선수다. 요즘 요구하는 전방압박이나 수비가담은 그에게 썩 익숙한 플레이는 아닐 것이다.

“주장 완장도··· 지금의 제겐 너무 무겁고요.”

“주장이었습니까? 그건 몰랐는데요.”

“이해합니다. 제 코가 석 자다 보니 그동안 주장다운 일을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그동안은 골 이외에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 그러려 했습니다.”

크리그가 쓴웃음을 지었다.

"경기장이 가득 차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린 3부리그 팀이니까, 연속으로 강등당한 팀이니까요.”

독백처럼 쓸쓸한 목소리.

“이번 프리시즌, 잔뜩 모인 관중들을 보면서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려 했습니다. 저 사람들은 바르샤를, 레알을 보러 온 거라고. 우릴 보러 온 게 아니라고."

아래로 축 처진 어깨.

“경기가 끝난 다음, 팬들이 기립박수를 보내 준 건 레알전이 처음입니다. 그래서 이제 압니다. 저는, 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선수였다는 걸요.”

부정적인 발언, 어딜 봐도 크리그에게선 더이상 자신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비 축구를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제가 얼마나 미덥지 못하면 그러나 싶었습니다.”

“그 반대인데요. 한 골을 확실히 넣어줄 수 있는 공격진이 있어야 할 수 있는 게 수비 축구입니다. 소수의 인원만으로, 한정된 찬스를 살려야 하니까요.”

“네, 머리로는 저도 압니다. 그만큼 제 일이 중요하다는 거겠죠.”

하지만 크리그의 눈빛은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크리그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제대로 할 수 있을 때까지 연습할 겁니다. 실전에서도 넣을 수 있도록. 팀원 모두가 만들어줄 단 한 번의 찬스를 놓치지 않도록.”

발아래 놓인 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크리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만약에, 제가 제 일을 못 한다면, 새 팀에 필요 없는 선수라면··· 그땐 내보내 주십시오. 그게 구단주님의 일이잖습니까?”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크리그는 다시 연습에 몰두했다. 나는 차마 그런 크리그를 붙잡지 못했다.

발걸음을 옮기는 내 곁에서, 희주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에도··· 관상이 너무 좋아 보여? 그래서 포기하기 아까워?”

“글쎄. 잘 모르겠다.”

모든 노력이 보답받는 건 아니다. 누구보다 내가 가장 잘 아는 사실이다. 무릎이 망가질 때까지 공을 차고도, 결국은 데뷔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그냥, 가끔은 보답받는 노력이 있었으면 좋겠어.”

희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

브라이언은 오늘도 야근 모드였다. 퀭한 눈 주변이 시꺼멓게 변한 게, 꼭 동물원의 판다 같다.

아무리 봐도 영 피곤해 보였다. 그래서 준비한 에너지 드링크를 건넸더니 이번엔 고개를 옆으로 흔들었다.

“브로, 다른 브랜드 사다 줘. 아무리 피곤해도 잘츠부르크나 라이프치히 배를 불려주고 싶진 않거든.”

“다음부턴 참고할 테니, 오늘은 그냥 마셔. 네 송장 치우느니 라이프치히 재정에 드링크 한 캔 보태주는 게 훨씬 나아.”

그러자 브라이언은 머뭇거리며 드링크를 받아들고는 단숨에 원샷했다.

“계속 고민이야?”

“맞아. 아무래도 전술 짜기가 영 어렵더라고. 지금의 전술에서 크리그를 최대한 쓰려면 2선에 창조성 있는 인재가 필요하거든.”

“그럼 요니를 조금 전진시키면 어때? 걔 2선에서도 잘할 것 같은데.”

정확히 말하자면, 내 생각엔 2선에서 훨씬 잘할 것 같다.

브라이언의 퀭한 얼굴에 담담한 미소가 떠올랐다.

“공격력만 생각하면 그게 베스트긴 한데, 그러면 수비 상황에서 문제가 생기겠지. 요니를 위로 올려버리면 당장 우리 팀 중원이 텅 비거든.”

“요니가 2선과 3선을 오가게 하면?”

“그럼 확실하게 요니가 죽겠지. 체력적으로.”

하긴, 지난번 레알전 종료 직후 요니는 몸도 제대로 못 가눌 만큼 탈진했었다.

“그럼, 요니 대신 3선에 넣을 선수를 구해 오면 어때?”

“흠.”

“요니는 언젠가 팀의 핵심이 될 선수야. 영리함과 공간지능이 최대 무기니까, 지금부터 다양한 포지션을 경험해서 나쁠 게 없어.”

그러자 브라이언이 한숨을 쉬었다.

“하긴, 요니보다 좋은 유망주는 당분간 못 구하겠지. 특히 2선 자원이면··· 어휴! 브로 말대로 차라리 3선 구하는 게 낫겠다. 거긴 베테랑 즉전감이 좀 있으니까.”

옆에서 희주가 쏙 끼어들었다.

“브라이언 씨, 지금 투자의 신을 너무 얕보는 거 아니에요? 즉전감이면서도 나이 어린 유망주, 사오면 그만 아니에요?”

“레이디, 아쉽게도 그런 선수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모조리 다 채갔습니다.”

하부 리그 팀들의 스쿼드가, 주로 어린 선수와 노장들로만 구성되는 이유다. 중간은 없다. 전성기를 맞은 선수는 상위 리그에서 전부 데려가 버리니까.

결국, 3선의 베테랑 선수를 구하기로 결정했다.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챔피언십에 있는 3선 미드필더를 쭉 뽑아 보자. 같이 리스트 보면서 괜찮다 싶은 선수와 접촉할게.”

그러자 브라이언의 눈동자가 좌우로 굴렀다.

“브로, 정말로 돈 생각 안 해도 돼?”

“그렇다니까.”

“그러면 꼭 한 명 보여주고 싶은 선수가 있는데. 피터 톰슨이라고··· 기억나?”

“그야 당연히 기억하는데···.”

피터 톰슨은 우리와 동갑이던 선수다. 13년 전, 첼시 유스가 자랑하던 천재 미드필더로 이름을 날렸다.

지금도 기억난다. 놈의 이마에 선명히 박힌 숫자 150이.

톰슨은 체격이 좋고 패스워크가 뛰어난, 전형적인 후방 플레이메이커였다. 당시 몇 차례 경기에서 상대한 적이 있다.

“나이가 들어서 기동력은 좀 떨어졌지만, 여전히 시야가 넓고 패스가 정확해. 피지컬도 강인하고··· 정말 좋은 선수야.”

“원래 첼시 유스였는데, 지금은 챔피언십에서 뛰나?”

“작년에 노리치로 이적했어. 그리고 노리치가 강등당했지. 지난 시즌에.”

즉, 톰슨은 비록 챔피언십 선수지만··· 급을 따지면 프리미어리거나 마찬가지라는 뜻이었다.

브라이언이 심술궂은 미소를 지었다.

“어때, 브로. 정말로 데려올 수 있겠어?”

“그거야 내가 알아서 할 일이지. 선수를 사고파는게 내 일이니까. 바로 다녀올 테니까 너는 감독님 재가나 받아 둬. 이희주, 출발하자.”

희주가 활짝 웃어 보였다.

“노리치? 위 고 노리치?”

어, 갑자기 조짐이 영 좋지 않다.

***

톰슨과는 노리치 인근의 식당에서 만났다.

마스크에 모자, 선글라스까지 쓴 상태로 나타난 톰슨의 모습을 본 나는 가볍게 불평했다.

“네가 무슨 연예인이냐?”

“축구 선수 정도면 연예인이나 마찬가지지··· 그나저나 너는 왜 그렇게 프리하게 다니냐? 돈도 많다면서. 남들이 안 알아봐?”

“나야 이름만 유명하지, 얼굴은 잘 모르더라고.”

브라이언조차, 내가 ‘투자의 신’ 이라는 걸 곧바로 알아보지 못했을 정도로.

“그래도 혹시 몰라서 대비는 했어. 안심하고 말해도 돼.”

그러자 톰슨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는,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내 앞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마스크와 모자, 선글라스를 차례로 벗었다.

“사람이 없네.”

“전세 냈거든.”

희주 작품이다. 급하게 미팅 자리를 좀 만들라고 했더니 이런 짓을 했다.

심지어, 희주는 기레기 대책이라며 근처 식당을 전부 빌려버리기까지 했다. 어느 식당에서 만날지 특정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이유였다.

톰슨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우리가 기레기 끌릴 이야기를 나눌 사이인가? 유스 때 몇 번 붙어본 게 전부인데.”

“그래도 방심할 수 없어. 요즘은 별의별 찌라시가 다 돌더라고.”

“맞아요! 선덜랜드 구단주의 은밀한 사생활 같은 거요!”

옆에서 희주가 끼어들었고, 톰슨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어··· 그거 나도 봤어. 구단주와 미모의 여비서가 모종의 관계라던데··· 정말로 찌라시인 거지?”

“당연히 찌라시지. 얘는 내 여동생이거든. 혹시 기레기들 만나면, 미모의 여비서 같은 소리 작작 하라고 전해 줘.”

“미모는 맞지만요.”

그래, 대충 넘어가자.

잠시 투닥거리던 나와 희주를 바라보던 톰슨이 소리 내 웃었다.

“그래서, 이번에 찌라시 돌 만한 사연은 뭐지?”

“영입 제안이지. 어마어마한 빅 사이닝이 될 테니까. 리그 원 최고 이적료 기록을 갈아치워 볼 생각인데.”

“취했냐?”

“진지해. 우리가 농담 따먹기 할 사이는 아니잖아? 네 말처럼, 유스때 몇 번 붙어본 게 전부인 사이인데.”

톰슨의 표정이 구겨졌다.

“진담이면 악질이네. 첼시에서, 프리미어리그에서 뛰던 사람을 리그 원 팀이 영입하겠다고?”

“지금은 노리치에 있고, 챔피언십에서 뛰지.”

“올해 바로 프리미어로 승격할 거야.”

“우리도 마찬가지야. 2년 연속으로 승격할 테니까, 우리 팀에 와도, 네가 프리미어에 복귀하는 건 딱 1년 차이야.”

“되게 자신 있게 단언하네.”

“실제로 자신 있으니까. 우린 2년 연속 승격을 이룰 거고, 다시 프리미어리그에 돌아갈 거야.”

그러자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던 톰슨이 웃었다.

“멋지긴 한데,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 있지? 선덜랜드를 다시 위대하게? 로망 있는 일이지. 하지만 그건 썬, 네 로망이야. 내 로망이 아니라. 내 심장은 스탬포드 브릿지에 두고 왔어.”

“무릎도 두고 왔겠지. 그렇잖아? 톰슨.”

서서히 굳어지는 톰슨의 모습을 보며, 나는 자신의 추리를 확신했다.

톰슨이 식당에 들어왔을 때부터 짐작했다. 오른쪽 무릎에 부담이 가지 않도록, 감싸며 걷는 모습을 본 순간.

아주 미묘한 차이긴 했다. 어쩌면 선수 버릇 찾는데 도가 튼 브라이언조차 구분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눈에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13년 전, 내가 저런 식으로 걸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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