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자의 신이 키우는 축구단-23화 (23/422)

23화 변화의 바람 (3)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내 무릎이 어디가 어때서.”

굳이 대답하는 대신, 무릎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내 눈이 무슨 스캐너라도 되는 것처럼.

그러자 톰슨은 전략을 바꿨다.

“아프긴 한데, 솔직히 우리 나이에 몸 성한 운동선수가 어디 있냐? 다들 잔병 하나쯤은 달고 살잖아. 그냥 딱 그 정도야.”

“무릎 망가진 사람 앞에서 괜히 발뺌할 생각 말고.”

톰슨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은 거뜬해. 다만··· 앞으로 2년을 넘기진 못할 것 같다. 일종의 시한폭탄이지.”

옆에서 희주가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선수 생명이 끝날 정도의 폭탄인 거에요!?”

“그야 터져보지 않았으니 모르죠. 선수생명 끝나기 전에 고칠 생각이긴 합니다. 저는 아가씨네 오빠 같은 미련퉁이가 아니니까요. 다만··· 제 나이가 적지는 않아서 걱정이네요.”

톰슨의 나이는 이제 서른.

그의 예상대로 상황이 흘러간다면, 톰슨의 무릎은 서른둘에 망가진다. 회복에 필요한 시간까지 고려하면, 사실상 선수로서 경쟁력은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톰슨이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네 말처럼, 프리미어리그로 돌아가는 게 딱 1년 차이일지도 몰라. 3, 4년쯤 지나면 노리치보다 선덜랜드가 훨씬 강팀일 가능성도 있어··· 하지만, 그건 내가 은퇴한 뒤의 일이잖아, 안 그래?”

“그래서, 올 시즌에 꾸역꾸역 승격하고, 내년에 프리미어에서 뛰는게 네 계획이냐? 그러다가 내년 중순쯤 무릎 터져나가가서 은퇴하는 게?”

“그러면 내 심장을 가지러 갈 수 있으니까. 스탬포드 브릿지에 남겨둔.”

톰슨은 진지했다. 예전부터 줄곧 그랬던 것처럼.

톰슨과 내가 아주 잘 아는 사이였던 것은 아니다. 그저 유스에서 몇 번 붙어본 게 전부인 그런 관계.

그래도 축구선수의 삶은 결국 공을 차는 방식을 보면 알 수 있다.

진지하고, 외골수이며, 자신이 한 번 정한 목표 이외에는 곁눈질하지 않는 인간. 내가 기억하는 톰슨의 모습 그대로다.

다행히 나는, 축구선수 톰슨을 상대하는 방법을 안다.

“만일, 네 은퇴 시기가 달라질 수 있다고 하면?”

“어떤 식으로?”

“우리는 절대로 널 혹사시키지 않을 거야. 우리 팀 프런트는 선수의 부상에 트라우마가 있거든. 감독과 코치는 물론, 구단주··· 비서까지.”

옆에서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희주를 바라보며, 천천히 덧붙였다.

“우리 전력은 이미 리그 원에선 상위권이야. 너는 올해 스무 경기 이상 소화할 필요가 없을 거고, 우리 3선엔 너 대신 미친 듯이 뛰어줄 선수가 있어.”

우리 3선에는 잭이 있다. 지칠 줄 모르고, 발이 빠르며, 경기장의 어느 누구보다 열정적인 선수가.

“우리는 최고의 의료진과 트레이닝 설비를 갖출 거야. 적어도 네가 은퇴하는 날까지는, 네 무릎이 박살나지 않도록 해주겠어.”

“어, 그 소리는 모든 구단주가 하는 이야기 아닌가?”

“차이가 있지. 나는 돈이 아주, 아주 많거든.”

심지어 경기장이나 아카데미 관련 투자는 FFP에 걸리지도 않으니까, 앞으로 펑펑 쓸 생각이다.

“스탬포드 브릿지에서의 단 한 경기가 필요한 거라면, 그냥 노리치에 남아. 그게 제일 빠른 길일 거야. 하지만, 그걸로 부족하다면 우리에게 와.”

묵묵히 테이블 위를 내려다보던 톰슨이 고개를 들었다.

“괜찮겠어? 이미 말했다시피··· 내 심장은 스탬포드 브릿지에 두고 왔는데.”

“괜찮아. 그래도 프로답게 굴어줄 거라고 생각해. 너는 철저한 성격이고, 네가 노리치에서 불성실했다는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무릎에 폭탄이 달렸는데도?”

“안 터트리면 그만이지.”

“나는 선수로서의 내 퀄리티에는 자신이 있지만, 내게 상품성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나보다 어리고, 무릎에 폭탄이 달리지 않은 선수도 얼마든지 있을 텐데.”

찾아보면 그런 선수가 없진 않을 거다. 챔피언십 팀의 미드필더들은, 적어도 지금의 선덜랜드에서 뛰기엔 아무 손색이 없는 선수들이니까.

그래도 톰슨을 데려오고 싶었다.

프리미어리그, 빅클럽에서 뛰던 선수를.

“실은, 우리 팀에 젊은 선수들이 있어. 한번 제대로 키워 보고 싶은 선수가.”

그것도 둘이나.

“그래서 널 데려오려는 거야. 프리미어리그 미드필더가 어떤 식으로 뛰는지, 우리 애들에게 보여주고 싶으니까.”

예전, 나와 브라이언의 시절. 그때의 선덜랜드는 프리미어리그 팀이었고, 1군에서 뛰는 선수들은 1부리그에 맞는 실력과 멘탈을 갖춘 상태였다.

본받을 만한 선수, 롤모델로 삼고 싶은 선수를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었다.

지금의 잭과 요니에게는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톰슨이어야 했다.

장차 프리미어리거가 될 젊은 선수들에게는, 프리미어리거만이 롤모델이 될 수 있을 테니까.

“잊지 않아도 괜찮아, 네 친정팀을··· 처음 데뷔한 팀을 죽을 때까지 사랑하는 그 마음, 우리 선수들에게 가르쳐 줘.”

지그시 눈을 감고 내 이야기를 듣던 톰슨의 눈이 떠졌다. 잠시 후, 그의 고개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여졌다.

“그렇게까지 말해 준다면, 옮겨야지.”

“잘 생각했어.”

“그런데 썬, 일단 불러서 나오긴 했는데··· 이거 템퍼링 아니냐? 아무리 요즘은 서로 그냥 넘어가는 분위기라지만···.”

불안해하는 톰슨을 바라보며, 나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아 그건 걱정 마. 왜냐면, 그쪽 구단주하고는 이미 이야기가 끝났거든. 너만 동의하면 우린 널 제값 주고 사갈 거야. 오늘 당장.”

“그 말인즉슨···.”

“넌 이번 뮌헨전부터 선덜랜드 선수로 뛴다는 뜻이지.”

톰슨이 피식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혹사 안 시킨다더니, 벌써 앞날이 아주 훤하다.”

***

톰슨의 영입으로, 팀에는 새로운 활력이 돌았다.

“첼시에서 뛰던 선수지?”

“지난 시즌엔 노리치, 그래도 프리미어리그 출신이지만.”

“우리 팀에도 드디어···!”

“근데, 피터 톰슨 정도 되는 선수가 단순히 돈만 보고 오진 않았을 텐데, 어떻게 사 온 거지?”

“구단주님이 직접 설득했다던데? 예전에 아는 사이였다고.”

선수들에게는 자신감을 붙여줄 계기일 것이다.

우리는 프리시즌에 레알이나 바르샤, 뮌헨을 연습 상대로 부를 수 있는 팀이고, 프리미어리거를 영입할 수 있는 팀이라고.

이런 경험을 반복해 나가다 보면, 선수들은 자연히 팀의 위상을 실제보다 높게 생각하게 된다.

우리는 절대 리그 원 따위에서 머물 팀이 아니라고.

자칫 방심으로 이어질 수도 있지만, 새 시즌을 준비하는 선수들에게 자신감을 붙여 주고 싶었다.

말은 안 하지만, 크리그의 표정도 평소보다 밝았다.

톰슨이 옮겨오면서, 크리그가 갖고 있던 리그 원 최고액 영입 기록이 소멸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크리그는 팀내 최고 주급자 자리에서도 내려왔다.

선수에 따라서는 오히려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줄곧 부담을 느끼던 크리그는 오히려 어깨가 가벼워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우리 선수 중, 톰슨을 가장 반긴 사람은 역시 잭이었다.

“피터 톰슨!? 정말로 우리 팀 오신 검까? 혹시 사인 좀 해주실 수 있슴까?”

지나친 친밀감에, 천하의 톰슨조차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같은 팀 선수끼리 사인은 무슨···.”

레알전에서의 투지 넘치는 모습 덕분에 일부에서는 “선덜랜드의 사냥개” 로 통하는 잭이었지만, 이럴 때 보니 꼭 강아지 같다.

새삼 잭의 나이가 실감된다. 쟤 이제 겨우 스물하나였지.

반면, 요니의 표정은 평소보다 어두웠다. 톰슨을 포지션 경쟁자라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요니는 그동안 팀의 패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맡았던 선수다. 넓은 시야와 정확한 패스를 장기로 삼는 톰슨이 영입된 이상, 자연히 자신이 후보로 내려간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요니는 그날 연습 내내 집중력 없는 모습을 보였다.

톰슨이 롱 패스를 뻥뻥 날려 보낼 때마다 옆에서 따라 차다가 현저한 파워 차이에 시무룩해졌고, 잭이 달릴 때면 늘 뒤따라 달리다가 먼저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 와중에도 요니는 쉼 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렸고, 수시로 로저스 감독이나 브라이언을 향해 불안한 시선을 보냈다.

음, 꼭 분리불안 증상 같다. 쟤도 강아지네.

하긴, 쟤도 이제 겨우 스물한 살이니까.

보다 못한 로저스 감독이 불호령을 쳤다.

“요니! 뛸 생각은 있는 거냐? 축구 하기 싫어진 거면 당장 때려 치워!”

감독의 고함 소리에 요니가 움찔거렸고, 덕분에 발이 멈췄다. 그 모습이 로저스 감독을 더 자극했다.

“왜, 팬들이 박수 좀 보내 줬다고 네가 무슨 스타라도 된 거 같냐? 봐라! 얼마 전까지 프리미어에서 뛰던 선수도 오늘의 너보단 성실하게 뛴다!”

요니는 당장에라도 울 것 같은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조금 전까지의 요니가 분리불안 증세를 보이는 강아지였다면, 지금은 꼭 버림받은 유기견 같다.

보다못한 브라이언이, 요니를 다독여 훈련장 밖으로 내보냈고, 나는 곧바로 요니를 구단주실로 호출했다.

요니는 불안한 표정으로 나와 마주 앉았다.

“저기··· 구단주님. 저는 후보라도 열심히 할 수 있어요. 잭을 질투하지도 않을게요. 그러니까 제발 팔지 말아 주세요.”

어, 이게 무슨 소리냐? 아니, 지적할 포인트가 너무 많아서 대체 어디부터 정정해야 할지 감도 안 온다.

일단 마지막 거부터 하자. 그게 제일 중요하니까.

“누가 너를 판다고 그래? 절대 안 팔아.”

“안 파시나요?”

“절대로. 내가 미치기 전엔, 아니 미쳐도 안 팔아. 네가 떠나겠다고 하지 않으면, 아무 데도 안 보낼 거야.”

할 수만 있으면 평생 유소년 기숙사에 가둬 두고 싶은 심정이라고 덧붙이자 요니의 표정이 아주 살짝 밝아졌다.

음, 얘도 참 취향 특이하네.

“그리고 너를 후보로 쓸 생각은 없어. 체력 안배는 하겠지만, 너는 기본적으로 다음 시즌 풀타임 주전이야.”

“하지만 톰슨을 영입하셨잖아요? 그분 정말 잘하던데··· 저도 같은 선수니까 보면 압니다. 저하곤 급이 달라요. 패스가 무슨··· 지금의 저는 죽어도 그렇게는 못 찹니다.”

“아까 봤어. 파워 차이가 꽤 나긴 하더라. 어쩔 수 없지. 너하고 톰슨은 체격부터 다르니까.”

다시 시무룩해진 요니를 향해, 빠르게 덧붙였다.

“네 말대로 3선에서 경기장 곳곳에 패스를 보내며 경기를 조율하는 역할은 너보다 톰슨이 나을 거야. 그래서 우리는 앞으로 널 2선 자원으로 쓸 생각인데.”

“제가 2선으로요? 저보다 잭이 훨씬 낫지 않나요? 걔가 저보다 훨씬 빠르고, 체력도 좋거든요. 그리고 사실 팬들도 저보단 잭이 골을 넣는 걸 훨씬 좋아할 테니까요.”

“진짜 팬이면, 그저 골만 넣으면 좋아해. 누가 넣는지는 신경도 안 써.”

“그래도 선덜랜드의 살인마 잭 더 리퍼. 요즘 팬들 사이에서 꽤 유명하던데···.”

“그 별명은 쓰지 말자. 걔 진심 싫어하니까.”

잭 더 리퍼. 피범벅이 된 얼굴로 웃는 모습 덕분에 붙은 별명이었다. 이름이 잭이기도 하고.

강렬한 인상을 줄 수 있는 별명이라서 나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선수 본인이 질색하는 마당이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즘 구단에서 잭을 위해 “사냥개” 라는 별명을 밀기 시작한 이유다.

“아무튼, 사실 잭은 너보다 빠르지 않아. 아니, 내가 보기에 우리 팀에 너보다 빠른 선수는 아무도 없어.”

“네?”

눈을 동그랗게 뜨는 요니를 향해 부연했다.

“언론은 스피드와 통찰을 혼동한다. 크루이프의 명언이지. 사실 내 생각엔 언론은 그거 말고도 혼동하는 게 많지만, 크루이프 말이니까 그렇다고 치자.”

“아, 구단주님하고 여동생분 사이 같은 거요?”

“제발.”

일전에 나하고 희주가 한집에서 나란히 걸어 나오는 모습을 찍힌 적이 있다··· 남매니까 사실 특별한 일은 아니다. 실제로 같이 살긴 하니까.

그 사진 한 장을 구단주와 여비서의 내연으로 몰아간 게 바로 타인위어 스포츠 수준이다. 심지어 희주보고 미모의 여비서라던데, 눈알을 못 빼겠으면 하다못해 카메라 렌즈라도 좀 빼서 닦지.

지금은 농담처럼 말하지만, 그 기사 처음 본 날은 입맛이 뚝 떨어졌었다. 꼭 정어리 파이에 장어 젤리 무쳐 먹은 것처럼 속이 메슥거려서.

별로 유쾌한 소재는 아니니까, 넘어가자.

“너는 충분히 빨라. 그 발만으로도 2선에서 뛸 수 있을 정도는 될 거야. 그 발에 영리함을 더하면, 너는 누구보다 빠른 선수가 될 수 있어.”

크루이프가 말한 것처럼, 세상은 종종 스피드와 통찰을 혼동한다. 먼저 움직이면, 그 선수가 빨라 보인다.

축구는 단거리 경주가 아니다. 백 미터 경주에서 남들보다 먼저 달려 나가면 부정 출발이지만, 축구에서는 완벽한 공간 침투가 된다.

“제가 할 수 있을까요?”

변함없이 불안해 보이는 요니에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낼 수 있는 가장 힘 있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믿으니까 너를 2선으로 올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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