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변화의 바람 (4)
“브로, 요니는 좀 어때?”
“좀 진정된 거 같아. 아마 불안했던 거겠지.”
대답을 듣자 브라이언이 환하게 웃었다.
“역시 브로에게 맡기길 잘했어. 베이비시터 역할엔 누구보다 소질이 있을 줄 알았거든.”
“그건 또 무슨 근거냐?”
“나이 차이 나는 여동생이 있다는 근거? 어린애들 어르고 달래는 게 특기라고 생각했는데.”
제길, 부정하기 힘들다. 나는 말을 돌렸다.
“애들 달래는 거, 원래는 코칭스태프 업무 아니냐? 이번에는 브라이언, 네 일이었잖아.”
감독한테 깨진 날엔 코치가 다독이고, 코치한테 까인 날엔 감독이 토닥인다. 기초적인 상식이다.
그러자 브라이언이 앓는 소리를 냈다.
“좀 봐줘. 요즘 업무가 몰려서 죽을 것 같거든.”
하긴, 요즘 브라이언의 업무량이 심상치 않은 수준까지 늘어나긴 했다.
전문 영상팀을 동원하면서 비디오 분석의 퀄리티가 크게 올랐지만, 그 분석에도 결국 브라이언이 직접 관여하기 때문이다.
코치 노릇에 더해, 분석팀장 역할까지 하다 보니 매일 야근이 기본이다. 하다못해 분석관 업무라도 덜어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후임을 구해 줘야겠지··· 이번 3연전이 끝나면.
그때까지는 부디 좀비처럼 버텨 주길 바란다.
우리의 대화를 듣던 로저스 감독이 턱을 쓸었다.
“레알전까지만 해도 제법 강단이 있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기가 약해서야···.
로저스 감독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소질은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격을 보면 과연 2선에 쓰는 게 맞을지 모르겠군.”
로저스 감독의 우려도 일리가 있다.
요니의 새 포지션은 직접 골을 노리거나, 혹은 결정적인 도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리다.
자연히 주목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만큼 비난도 많이 받게 된다.
하지만 내게도 확신은 있었다.
“제 예상이 맞으면 기가 약한 타입은 아닐 겁니다. 소심한 선수였으면 사만 구천 명 관중 앞에서 그렇게 날뛰지 못했죠. 심지어 상대는 레알이었는데요.”
“흠. 그럼 숙련된 베이비시터 눈에는 어떻게 보였나?”
제길, 이대로 가다가는 이상한 별명이 정착될 것 같다. 짧은 한숨에 섞어 대답했다.
“제 생각엔 포지션 경쟁에 져서, 정확히는 팀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는 이유로 기가 죽은 것 같습니다.”
“쫓겨난다고?”
“유소년 출신은 보통 충성심이 높죠. 물론 세상에서는 로컬 보이인 잭을 좀 더 충성스럽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 요니의 충성심도 잭 못지않을 겁니다.”
“충성심이라.”
“충성심, 구단에 대한 애정, 뭐 그런 느낌인 거죠. 따지고 보면 잭은 그냥 자기 고향 구단에 들어온 거지만, 요니는 자기 발로 찾아와 선덜랜드 유스가 된 선수 아닙니까?”
옆에서 브라이언이 히죽거리며 끼어들었다.
“하긴, 멀리서 찾으실 것도 없습니다. 썬, 쟤가 정확히 그 케이스잖아요. 솔직히 저놈 재력이면 빅클럽도 샀을 텐데, 굳이 이 팀을 고른 이유가 뭐겠어요.”
“제 사례는 차치하고라도, 아무튼 다른 팀은 눈에도 안 들어오는데··· 정작 팀에선 자기를 내보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기가 죽겠죠.”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짝사랑은 슬프니까요.”
로저스 감독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나는 안 쓰겠다고 한마디도 안 했는데··· 조금만 생각해보면 서른 살 선수 때문에 유스 출신 유망주를 내보낼 리 없다는 걸 왜 몰라.”
“절대 안 내보낸다고, 할 수만 있으면 우리 기숙사에 평생 가둬두고 싶다고 했더니 표정이 좀 풀리더군요.”
로저스 감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려. 너무 어려··· 그 애송이를 써서 바이언 상대로 한 골을 따오라는 말이지.”
“네, 중요한 목표입니다. 팀이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그리고 기껏 끌어온 관중을 지켜내기 위해서도요.”
이번 3연전의 홍보 효과로, 시즌권은 곧바로 매진되었고 일반 판매 티켓도 매번 줄을 선다.
레알이나 바르샤, 뮌헨이라는 강팀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유럽 대회에서 줄곧 소외된 영국 북동부의 축구 팬들에게는 가뭄에 단비 같은 이벤트였다.
덕분에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는 전 좌석 만석, 그야말로 사람이 꽉꽉 들어찼다.
하지만 레바뮌이 아닌, 3부리그 팀들을 상대하게 되는 정규시즌에서도 지금의 관중동원력이 유지될 가능성은 없다.
가만 내버려 두면 관중이 떠나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 우리 팀이 나아지고 있다는 걸 확실히 보여주어야 한다.
뮌헨 상대로 1점을 따낸다면 더할 나위 없는 성장의 증거가 될 것이다.
“근데 브로, 관중 동원 문제라면··· 홈페이지부터 좀 손봐야 하지 않아? 또 먹통인 거 같은데.”
“그거? 일부러 놔두는 거야. 그래야 티켓박스에 사람들이 몰리고, 밤새 줄을 설 테니까.”
시즌이 개막하면 당연히 손볼 거지만, 이번 3연전에는 아니다. 일부러 불편하게 만든 거니까.
“이번에 구단 제휴 축구 펍과 숙소를 잔뜩 늘렸잖아? 그러니까 시티 오브 선덜랜드까지만 오면 축구를 볼 수 있어.”
“티켓을 사지 않아도 말이지, 브로.”
“상관없어. 그 사람들은 결국 같은 유니폼을 입고 미쳐 날뛰는 팬들 사이에서 축구를 보게 되거든. 그 와중에 피 흘리며 뛰는 우리 선수들을 봐. 어떻게 되겠어?”
“티켓이··· 너무 갖고 싶겠네. 줄을 서서라도.”
“그렇게 줄을 선 팬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 생각하겠어? 도대체 뭔데 저 난리인가, 궁금하겠지? 그러면 어떻게 될까? 펍이라도 한번 가 보겠지?”
브라이언이 입술을 핥았다.
“브로, 이것도 혹시 투자 기법이야?”
“예전에 마케팅 회사에 투자한 적이 있거든. 그때 어깨너머로 조금 배웠지.”
내 대답에 감탄하던 브라이언이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언가 생각난 것처럼.
“잠깐, 그럼 이번에도 우리 애들이 막 피 흘리고 그래야 하나?”
“그냥 최고의 축구를 하기만 하면 돼.”
나는 빙긋 웃으며 덧붙였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축구를.”
그렇게만 하면, 이제 이 한껏 달아오른 축구 팬들을, 우리 선덜랜드 팬으로 바꿀 방법이 생길 테니까.
***
잭은 스마트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아까부터 계속 요니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영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잭은 쓴웃음을 지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 저녁 먹었냐?
곧바로 답장이 돌아왔다. 전화는 안 받더니, 메시지할 기력은 있는 모양이다.
- 굶었어. 속이 너무 안 좋아서.
- 또 굴 파냐?
- 그럼 안 파겠어? 갑자기 2선에서 뛰라는데?
- 2선이 어때서. 너 유스 때는 공미였잖아.
- 전부터 파커 감독님이 계속 그랬잖아. 나는 가짜라고. 가짜 뮐러라고. 도저히 2선에서 뛸 재능이 아니라고. 팔려나가고 싶은 거 아니면, 그냥 얌전히 3선으로 내려가라고.
그런 일이 있긴 했다.
불합리하다고 생각했지만, 당시의 잭과 요니는 갓 콜업된 어린 선수에 불과했고, 자신들을 발탁해준 감독의 판단에 감히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이젠 상황이 달라졌다.
- 그 사람은 잘렸잖아.
- 새 감독님도 날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낮에 나 혼나는 거 봤잖아.
- 로저스 감독님은 그냥 좀 엄격한 거야. 기대하지 않으면 널 2선으로 올릴 리가 있겠냐?
- 팬들이 실망하면 어쩌지.
- 우리 팬들? 야, 내가 메시한테 알까기 당해도 박수치던 분들인데 무슨.
- 너랑은 다르지. 너는 로컬 보이고, 나는 결국 여기선 이방인이니까.
“미친놈.”
저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잭은 이를 악문 다음, 바쁘게 손을 움직였다.
- 소시지 좀 싸갈 테니까 그거나 처먹고 기운 내라.
잭의 어머니가 만드는 컴버랜드 소시지는, 독일인인 요니에게 있어 일종의 소울푸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소년 시절부터 줄곧 그랬다.
경기에서 지거나 코치에게 혼났을 때, 혹은 고향 생각을 견딜 수 없어질 때마다 요니는 방에 틀어박혔다. 그런 요니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건 언제나 잭의 일이었다.
몇 년째 활약 중인 컴버랜드 소시지를 백팩 한가득 채워 넣은 다음, 잭은 부지런히 걸었다.
그러던 잭이, 스타디움 오브 라이트 옆을 지날 때쯤이었다. 이상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티켓박스 쪽에 줄을 선 사람들이야 그러려니 하겠는데, 그 반대쪽··· 스태프용 통로 쪽이 부산하다. 퇴근 시간이 지났을 텐데도.
호기심에 발걸음을 옮기자, 선덜랜드 레플리카를 입은 구단 직원들이 카트 같은 것을 밀며 움직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니 고소한 냄새가 났고, 아는 얼굴도 보였다. 구단주 비서 이희주였다.
“그거 뭠까?”
“팬 서비스로 내갈 건데요. 피자랑 뭐 그런 거요.”
“구단주님이 쏘시는 검까?”
“네. 공식적으론 선수분들이 사는 거로 되어 있지만요.”
“그렇슴까.”
잭은 잠시 망설이다가, 백팩을 풀어 내밀었다.
“그럼 이것도 같이 나눠드리십쇼. 집에서 만든 소시지임다. 요니 주려고 싸온 건데, 아마 요니도 이렇게 쓰는 걸 훨씬 더 좋아할 검다.”
이희주가 백팩을 받아들자마자, 잭은 곧바로 전화기를 꺼냈다. 그리고 요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전히 요니는 전화를 받지 않았고, 음성사서함만이 잭을 반겼다.
잭은 개의치 않았다.
“야, 굴 그만 파고 당장 경기장에 와봐. 걷지 말고 뛰어. 너 오늘 연습 중간에 땡땡이쳤잖아.”
메시지를 남긴 다음, 잭은 품에서 네임펜을 꺼냈다. 그리고는 카트에 다가갔다.
“서비슴다. 선수들이 사는 셈 치려면, 이 정도는 해드려야 하지 않슴까?”
이희주가 웃었다.
“하긴, 그래 주면 내일 청소하기도 편하겠네요. 선수 사인이 들어간 종이박스를 버릴 팬은 없을 테니까요.”
“우리 팬들은 원래 쓰레기 아무 데나 안 버리심다··· 엿차.”
본격적으로 사인을 시작한 잭을 바라보며, 이희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근데요, 잭 선수? 보시다시피 음식이 좀 많은데요.”
“괜찮슴다. 축구선수는 원래 손 쓸일 없슴다. 그러니까 제 손은 사인용임다.”
“무슨 소리예요. 경합할 때 손 쓰잖아요?”
역시 명색이 구단주 비서답게 축구 좀 아는 사람 같다. 잭은 피식 웃었다.
“이럴 땐 그냥 속아주시는 검다.”
그렇게 얼마간 사인에 몰두하던 잭의 귀에, 환호성이 들렸다.
티켓박스 쪽이었다.
“잠깐, 저기 요니다! 요니가 왔어!”
“요나스 뮐러! 선덜랜드의 보물!”
“나는 너 크는 재미만 보고 산다! 뮌헨전도 잘 부탁할게!”
환성을 들으며, 잭은 빙긋 웃었다.
“미친놈, 이래도 지가 이방인이라고.”
“자기가··· 이방인이래요?”
“보다시피 개소림다. 이제 정신 차릴 검다··· 이랬는데도 훈련할때 계속 얼타면, 감독님 번거롭게 할 것도 없슴다. 그냥 제가 죽여버릴검다.”
“역시 살인마 잭···.”
“아, 제발요. 그건 좀.”
울상짓는 잭을 향해, 이희주가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시간이 흘러, 바이에른 뮌헨전 당일이 되었다.
홈팀 드레싱룸에서는 오늘도 로저스 감독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여러분은 메시가 될 수 없다. 아자르나 크로스가 될 수도, 노이어가 될 수도 없다. 오늘 상대할 뮌헨 선수들은 전부 여러분보다 훨씬 공을 잘 다룬다.”
드레싱룸은 조용했고, 선수들은 숨소리조차 내지 않은 채 감독의 지시를 경청했다.
“하지만, 축구 규칙의 어디에도 공을 잘 다루는 선수에게 가산점을 주는 항목은 존재하지 않는다. 축구에서 승패를 가르는 요소는 오직 점수뿐이다.”
고요한 드레싱룸, 완벽하게 집중한 선수들에게 만족하면서, 로저스 감독은 목소리를 높였다.
“점유율을 내줘라. 상대가 계속 공을 가지고 놀게 해라. 하지만 점수만은 절대로 쉽게 내주지 마라. 그건, 우리 팬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잠시 후, 스크린에 티켓박스 앞에 길게 늘어선 팬들의 모습이 비쳤다.
카메라가 그 팬들 한 명 한 명을 클로즈업했고, 그때마다 마이크가 건네졌다.
[보다시피 텐트 치는 중입니다. 오늘도 여기서 잘 거니까요!]
[저요? 이틀째인데요. 이번 경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직접 보고 싶어서···.]
[춥죠. 이 동네는 여름에도 밤이면 쌀쌀해서···. 그래도 괜찮아요. 경기 볼 생각 하니 끄떡없습니다.]
“오늘 모인 팬들은, 저렇게 밤새 줄을 서서 티켓을 구한 사람들이다. 그렇게 줄을 서고도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이, 도시 곳곳의 축구 펍에 흩어져 있다.”
선수들의 얼굴은 진지했다.
요 며칠간 버려진 강아지같던 요니도, 줄곧 어둡던 크리그도 오늘은 차분한 투지를 조용히 불태우는 중이었다.
“끝까지 싸우고 와라. 휘슬이 울릴 때까지. 우리 팬들에게 한 골을 선물할 때까지.”
선수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며, 로저스가 힘주어 덧붙였다.
“그때까지, 선덜랜드의 축구를 하고 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