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헌신의 대가 (3)
에드워드 하퍼는 올해 스물일곱 살이며, 팀에 몸담은 지는 3년이다.
내 눈에 보이는 몸값은 칠십억 원. 아마 리그 원에서는 단연 우수한 자질의 골키퍼이며, 챔피언십에서도 충분히 경쟁력 있는 선수일 것이다.
오죽하면 “골키퍼가 팀의 문제점” 이라고 단언했던 브라이언조차, “하퍼를 내보내기는 아깝다” 고 평가했을 정도로.
다만, 지금의 우리 팀에 잘 맞는 골키퍼는 아니었다.
지금은 선방 능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수비조직 전체에 안정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골키퍼가 훨씬 절실히 필요한 상황이니까.
샐리가 준비한 분석 영상을 태블릿으로 돌려 보면서, 나는 잠시 하퍼에 대해 생각했다.
노크 소리가 났고, 희주의 목소리가 뒤따랐다.
“구단주님, 에드워드 하퍼 선수가 도착했습니다.”
“안내해 줘.”
잠시 후, 하퍼가 구단주실로 들어왔다.
“저를 보자고 하셨습니까?”
하퍼의 표정은 어두웠다. 하긴, 이적시장이 열린 상황이니까, 이맘때 구단주실에 불려 오는 선수의 표정이 밝을 리가 없다.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사무적으로 말했다.
“실은, 이번 여름에 골키퍼를 추가로 영입할 생각입니다. 아직 계약 전이지만, 그래도 미리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말씀은, 저보고 나가라는 뜻입니까?”
“본인이 그걸 원한다면요.”
그러자 하퍼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봐요. 갑부 구단주님. 저는 지난 3년간 여기 골문을 지켰습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압니까?”
알고 있다. 3년 전의 이 팀은, 챔피언십에 있었으니까. 그것도 강등당한 직후였다.
비록 강등보조금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스쿼드를 지킬 정도의 금액에는 못 미친다. 누군가는 돈 때문에, 누군가는 여전히 상위 리그에 뛰고 싶다는 열망 때문에 이적을 선택하기 마련이다.
1군 선수단은 공중분해 되었고, 선덜랜드는 깊은 상처를 입고 허우적거렸다.
당시 스물넷이던 젊은 골키퍼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팀에 합류했을지는 확실하지 않다.
선덜랜드가 다시 프리미어리그로 돌아갈 수 있는 팀이라고 믿었을지, 아니면 챔피언십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있었을지는 하퍼만이 아는 문제다.
확실한 건 두 가지뿐이었다.
3년 전의 하퍼는 팀이 리그 원으로 굴러떨어질 줄은 몰랐을 것이며, 심지어 2년 연속 승격에 실패할 줄은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알았으면 절대 안 왔을 테니까.
그런데도 하퍼는 팀을 떠나지 않았고, 3년간 선덜랜드의 골문 앞을 지켰다.
“압니다. 그래서 지금 미리 이야기하는 겁니다. 지난 3년간 팀에 해준 걸 생각하면, 당신은 자신의 미래를 선택할 권리가 있을 테니까요.”
그러자 하퍼의 얼굴이 조금 누그러졌다.
“알겠습니다··· 그럼, 새로 영입할 골키퍼는 누굽니까?”
“누군지는 알려줄 수 없습니다. 아직 협의 중이라서요. 다만, 최소한 톰슨 급의 네임밸류 있는 키퍼가 들어올 거라는 점만 미리 말해두죠.”
“가혹한 주전 경쟁이 되겠군요. 비싸게 영입한 선수는 그만큼 기회를 후하게 받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입술을 살짝 핥으며, 하퍼가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팀에 잔류할 경우 저는 컵 대회를 맡게 되는 겁니까?”
일반적으로 세컨 키퍼는 컵 대회를 담당하는 게 관례지만, 우리로서는 장담할 수 없는 문제였다. 나는 최대한 무감정하게 말하기 위해 노력했다.
“선수 기용은 기본적으로 감독의 권한입니다. 그래도 구단주로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해두자면, 나는 컵 대회에서도 최대한 높이 올라가길 요구할 겁니다.”
하퍼의 얼굴에 절망이라는 감정이 떠올랐고, 이윽고 그 감정은 분노로 바뀌었다.
“알겠습니다. 결국은 저보고 나가라는 거군요. 세 시즌동안 팀에 헌신한 대가가 겨우 이거라니···.”
하퍼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한다. 주전 경쟁은 힘들 것이며, 컵 대회에도 내보내 줄 수 없다고 말하면··· 선수 입장에선 괜히 놀린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나는 하퍼의 처우를 결정하지 않았다. 그의 처우를 결정하기 전에,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있었기에.
“하퍼.”
하퍼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힘주어 물었다.
“혹시 당신이 말하는 헌신이, 챔피언십 수준의 골키퍼가 리그 원에 와서 3류 수비진의 뒤치다꺼리를 해왔다는 걸 뜻하는 겁니까?”
순간 하퍼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정곡을 찔린 모양이다. 나는 그런 하퍼를 바라보며 차분히 덧붙였다.
“하퍼, 그런 건 헌신이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은 보통 그런 모습을 독선과 아집이라고 부르죠.”
“저는 그렇게 생각한 적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까?”
하퍼는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사실 대답을 기대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하퍼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은 따로 있고, 이 상황에서의 침묵은 곧 긍정일 테니.
“우리 분석팀은 당신의 수비 조율이 영 별로라고 하더군요.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건, 수비 조율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선수에게나 쓸 수 있는 평가거든요.”
어제, 샐리는 하퍼의 조율 능력을 혹평했다. 수비수를 제대로 움직였다면 위기조차 아니었을 거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조율 시도는커녕 간단한 의사소통조차 하지 않았던 그의 태도가 훨씬 문제였다.
샐리가 준비한 영상에서, 하퍼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지시는 고사하고 불평조차 하지 않았다.
포백라인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실망도 없이, 그저 자기 혼자 공을 막아내려는 장면들.
팀의 수비라인을 자신의 동료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보일 수 없는 모습이다.
하퍼가 머뭇거렸다.
“그건···.”
“네, 우리 수비진이 미덥지 못했겠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내가 보기에도 그다지 프로답지 못했던 선수가 많았으니까요.”
바르샤전, 하퍼는 경기 종료 직후 웃지 않았던 네 명의 선수 중 하나였다. 프로다운 승부욕을 가진 선수다.
그리고 나는, 하퍼가 훈련 중 요령을 피웠다는 이야기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하퍼의 눈에, 3부리그에 굴러떨어졌는데도 줄곧 헤실거리던 다른 선수들이 곱게 보였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제 우리 팀은 바뀌려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당신도 바뀌어야 하지 않습니까?”
하퍼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고, 나는 그의 침묵에 만족했다. 만일 그가 곧바로 바뀌겠다고 대답했다면, 진정성을 의심했을 테니까.
약간의 침묵이 흐른 후, 하퍼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혹시 제가 바뀌겠다고 하면, 골키퍼 영입 이야기는 없던 게 되는 겁니까?”
“아뇨. 골키퍼는 영입할 겁니다. 당신 말만 믿고 팀의 시즌 준비를 진행할 순 없으니까요.”
마음가짐을 고쳐먹는 정도로 나을 증상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수비 조율을 안 하던 습관이 하루아침에 낫지도 않을 테고.
하퍼가 바뀌는 데에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 사이 팀의 골마우스를 든든히 지켜줄 선수가 필요하다.
“다만 변화를 약속할 경우엔, 공정한 기회를 받을 수 있도록 감독님과 협의하죠.”
“제가 변화를 거부한다면요?”
“그 경우, 두 가지 선택을 드릴 겁니다. 세컨 키퍼로 벤치에 머무르거나, 떠나거나요.”
하퍼 정도의 재능이 팀을 떠나겠다고 한다면 속이 꽤 쓰리겠지만, 그래도 우리 선덜랜드가 3년간 일한 선수를 엉망으로 대우하는 클럽이 되어버리는 것보단 낫다.
젠장, 갈증이 난다. 단 게 좋겠는데.
잠시 후, 하퍼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알겠습니다. 조금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중요한 문제니 충분히 시간을 주고 싶지만, 팀의 새 시즌 준비와도 직결되는 문제니까 너무 시간을 끌 수는 없습니다. 사흘이면 되겠습니까?”
“충분합니다. 이틀 안에 답변을 드리겠습니다.”
하퍼는 차분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
하퍼가 떠난 다음, 희주가 불쑥 말을 걸었다.
“오빠, 만약에 하퍼가 떠나겠다고 하면, 정말로 곱게 보내줄 거야? 부메랑 맞을 걸 알면서?”
“그럴 생각인데.”
무덤덤하게 대답하자, 희주가 눈을 빛냈다.
“꽤 후한 대우네. 하퍼가 그동안 했던 건 헌신이 아니라고 잘라 말했으면서.”
“그렇다고 하퍼가 3년간 선덜랜드 골마우스를 지킨 과거까지 없어지는 게 아니잖아.”
그러자 희주가 웃었다.
“거짓말쟁이. 충분히 현역으로 뛸 수 있는 선수를, 뛰지 못하게 만드는 게 싫었던 거면서.”
눈이 마주치자 희주가 곧바로 웃으며 브이자를 그렸다. 영국에선 욕이라는 소릴 들은 뒤로 자제하는 중이었지만, 나랑 둘만 있을 때는 거침이 없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폼으로 구단주 비서하는 건 아니구나.”
“그렇다기보단, 폼으로 동생을 하는 게 아닌 거지. 태어나면서부터 오빠가 되는 사람은 없지만, 동생은 태어나면서부터 동생인걸?”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동생님.”
“네 갑부 오라버님.”
“지금 내가 가장 원하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제로콜라가 테이블 위에 놓였다.
“기왕이면 따서 가져오지.”
“안 돼. 손톱 상하거든.”
그걸 신경 쓰는 애가 고양이 인형이며 가죽 소파를 벅벅 긁었냐.
물끄러미 바라보자, 희주가 명랑한 목소리를 냈다.
“괜찮을 거야! 하퍼도 아마 눈치챌 테니까. 오빠가 왜 자기에게 그렇게까지 해 주는 건지.”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희주 너, 그동안 네가 이길 것 같다고 말했던 경기마다 귀신같이 진 거 알아?”
“그거랑 이건 다르지. 완전 다르다니까?”
흘끗 바라보자 희주의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
결론부터 말하면, 이번 일은 희주 말처럼 되었다. 이틀이 걸리지도 않았다.
다음날 오전, 하퍼는 잔류를 선언했다. 새 골키퍼로 누가 오더라도 훈련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 반드시 주전 자리를 되찾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수완이 좋으시네요, 구단주님. 우리가 가장 바라던 결과잖아요?”
샐리가 휘파람을 불었다.
“새 골키퍼는 예정대로 데려오고, 하퍼는 세컨 키퍼로 팀에 그대로 남겨두고··· 그런데 하퍼가 불만도 없고! 비결이 뭐죠? 역시 금융 치료인가요?”
“아뇨. 사람은 원래 돈만으로 움직이지 않거든요.”
그러자 샐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무척 상식적인 말씀이지만, 세계적인 투자자 입에서 들으니 조금 어색한데요.”
“그건 넘어갑시다. 그래서, 추천할 골키퍼 명단은 나왔습니까?”
“네, 하퍼가 남아주는 덕분에 일이 쉬워졌어요. 하퍼보다 수비조율이 나으면서, 서로 적당히 경쟁할 수 있는 선수면 충분할 테니까요.”
“아뇨, 그 반대죠.”
“당장 일곱 명 정도가 떠오르는데, 정리해서 감독님과 구단주님께 보여드리면··· 네?”
순간적인 상황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샐리를 향해, 나는 차분히 의도를 전달했다.
“하퍼에게 롤모델이 되어줄 정도로 클래스 있는 선수여야 합니다. 그 와중에 하퍼가 좌절하지 않고 계속 경쟁에 나서게 하려면, 하퍼보다 나이는 많아야겠죠.”
샐리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 그 말씀은···.”
“유럽 4대 리그의 1부 팀 소속 중, 올해 계약이 끝나는 골키퍼 위주로 리스트업해주세요. 은퇴를 고민할 정도의 노장들로.”
커리어를 신경 쓰는 선수라면 절대 3부 리그에는 오지 않을 테니, 당장 은퇴해도 이상하지 않은 노장을 노릴 수밖에 없다.
“리스트업은 해 드릴 수 있는데··· 그런 선수를 정말로 데려올 수 있겠어요?”
미심쩍은 표정을 짓는 샐리를 향해, 나는 짧게 대답했다.
“샐리 씨, 금융 치료는 이럴 때 하는 겁니다.”